[특별했던차]기아 스포티지(NB-7)

기사입력 2018.03.02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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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자동차는 초기에는 일본 마쯔다(당시 토요공업)와 미국 포드자동차와의 관계를 통해 성장해 나갔다. 기아 최초의 승용차인 브리사는 마쯔다의 기술 지원을 통해 만들어져 새한의 제미니, 현대의 포니와 경쟁했다. 한국 자동차산업을 후퇴시킨 전두환 정권의 ‘자동차공업 통합조치’가 시행 중이었던 1980년대에는 마쯔다의 소형 상용차, ‘봉고’를 라이센스 생산하며 위기를 넘겼다. 그리고 ‘설계는 마쯔다, 생산은 기아, 판매는 포드’라는 전략 하에 탄생한 월드카 ‘프라이드(Pride)’를 통해 다시금 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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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에게 합병되기 전의 기아자동차는 당대 국내 자동차업계에서 모험적인 제품 개발과 기술력 중시 성향을 가진 제조사로 통했다. ‘기술의 기아’를 기치로 내건 기아의 자동차들은 상품으로서의 자동차보다는 뛰어난 주행 성능과 과감한 신기술을 내세우는 경향이 강했다. 기아의 기술 중심적 사고와 제품 개발 사상은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의 역사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모델들을 남겼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초대 스포티지다.


포드가 먼저 제안한 혁신적 아이디어

미국 포드는 기아가 마쯔다 121을 조립 생산하던 시절부터 기아의 생산 능력에 주목했다. 조립 기술이 우수하면서도 인건비 측면에서도 이득이 있었다. 이에 기아자동차, 마쯔다와 함께 진행한 월드카 프로젝트, 프라이드(포드 페스티바)가 성공을 거두면서 포드는 기아의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하여 1987년, 포드는 기아에게 전에 없던 새로운 컨셉트의 자동차를 생산해 줄 것을 제안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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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후반, 프로젝트명 ‘UW-52’로 알려진 포드의 신차는 ‘작은 SUV’ 컨셉트였다. 당시 미국 시장에서 대유행 중이었던 픽업트럭 기반의 풀사이즈 SUV가 아닌, 승용차 수준으로 작은 크기와 승용차에 가까운 디자인을 가진 이 차는 새로운 수요를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프라이드의 성공 이후 기아자동차의 지분 10%를 인수하고 있었던 포드는 기아에게 두 번째 월드카 프로젝트를 제시했다.


하지만 이 공동 프로젝트를 위해 포드가 기아에게 내민 조건은 신차의 연간 생산량 15만대 중 10만대를 기아에 배정해 주는 대신 기아의 주식 50%를 요구한 것이다. 이는 “물건 많이 사 줄테니 회사를 내놓아라”라는 말로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게다가 기아에 기술을 제공하고 있었던 마쯔다는 경영위기로 인해 이러한 방식으로 포드에게 자본이 잠식당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포드는 이미 70년대부터 마쯔다 지분의 1/4 가량을 소유하고 있었고 90년대에는 결국 마쯔다는 포드에 완전히 인수되기에 이른다.


김선홍 당시 기아산업 회장은 이 조건을 당연히 말도 안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자존심이 상했던 김선홍 회장은 포드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고 포드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이에 당황한 포드는 당시 기아가 계획 중이었던 아산공장(現 화성공장)을 별도 법인화하고 그 지분의 절반을 요구하는 내용으로 수정된 제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기아는 이 제안 역시 거절했다.


포드와의 결별과 독자 개발의 길

하지만 포드가 제안한 새로운 차종인 ‘작은 SUV’란,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스즈키의 비타라(Vitara)나 짐니(Jimny), 다이하츠의 록키(Rocky) 등의 소형 SUV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포드의 UW-52 프로젝트는 그보다 조금 더 커서 가족용 자동차로의 활용이 가능해야 하며, 승용차에 근접한 디자인과 특성으로 일상과 여가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차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기아와 포드는 초기에는 신차의 개발을 공동으로 진행하면서 디자인과 설계에 대해서는 가닥을 잡은 상태이기는 했지만 기아가 포드의 무리한 요구를 거절하면서 개발은 중간에 끊긴 상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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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는 무리한 요구를 들이 민 포드에게서 돌아 섰지만 이미 진행하고 있었던 프로젝트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그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구현해내기 위한 길에 나선다. 기아는 새로운 컨셉트의 SUV를 직접 만들기 위해 본래 기술을 제공해 주고 있었던 마쯔다에게 기술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미 한창 포드에 자본을 잠식당하고 있었던 마쯔다는 지원을 거부했다. 이제껏 독자 모델을 개발한 경험이 없었던 기아에게 있어 신차의 개발은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모험이었다. 신차의 개발에는 막대하 자금이 소요되었지만 기아는 이를 감내하고 개발을 강행했다. 그 결과 1991년도에 컨셉트 모델을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기아는 이 컨셉트카를 당시 세계에서 손꼽는 모터쇼로 통했던 도쿄모터쇼에 출품했다. 일상과 여가를 아우르는, 진정한 ‘도심형 SUV’가 만천하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극동의 한 작은 나라에서 만들어 낸 혁신적인 SUV는 곧 바로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때 출품한 차종 중에는 기아차가 바닥부터 끝까지 독자설계한 신형 승용차, 세피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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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의 이름은 스포티지(Sportage)로 정해졌다. 차명인 스포티지는 스포츠(SPORTs), 대중(mAss), 명품(prestiGE)를 각각 합성한 단어로, 레저와 스포츠를 즐기면서도 합리적인 가격의 브랜드를 선호하는 매스티지(Masstige) 계층을 겨냥한 차라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스포티지는 오늘날 일반화된 승용차와 같은 일체형(Monocoque) 차체구조가 아닌, 전통적인 바디-온-프레임(Body-on-frame) 구조를 채용한 SUV였다. 스포티지의 뼈대라 할 수 있는 프레임은 그 독특한 구조로 종래의 바디-온-프레임 방식 SUV에서 구현하기 어려웠던 낮은 지상고를 구현해낸 점이 특징이다. 전/후륜에 걸리는 부위를 아치형으로 굽혀 놓은 설계를 함으로써 지상고를 낮춘 것이다. 또한 작은 차체와 가벼운 설계를 통해 2.0리터급의 가솔린 엔진으로도 충분한 동력성능을 제공할 수 있도록 했다. 사륜구동 시스템 역시 획기적이었다. 스포티지는 국내 최초로 60km/h 이하의 속도에서 구동방식을 전환할 수 있는 시프트-온-플라이 시스템을 도입했다. 스포티지의 섀시 설계는 K-111을 대체한 국군의 신형 기동차량인 K-131과 그 민수용 모델인 레토나의 설계에도 응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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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스포티지에는 당시의 정서에서 비롯된 보수적인 구석도 존재한다. 바로 뒷부분에 외장형 스페어 타이어를 설치한 점이다. 당시 국내 자동차 시장에는 SUV라는 개념이 이제 막 자리잡기 시작할 때였고, 이 때까지만 해도 SUV를 구식 지프형 차량의 연장형으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따라서 당시 기아의 경영진은 스포티지가 적어도 SUV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차체 뒷부분의 외장형 스페어타이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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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는 스포티지의 양산 전, 파리-다카르 랠리에 출전시키기도 했다. 비록 참가한 2대 중 1대가 탈락하여 공식 완주는 이루지 못했지만 국내에서는 상당한 주목을 끄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여기서 얻게 된 귀중한 데이터는 양산형 차량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반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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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스포티지의 양산은 자꾸만 늦어졌다. 그리고 그동안 외국의 자동차업계는 이미 1991년 도쿄모터쇼에서 스포티지 컨셉트를 마주한 이래, 부지런히 스포티지의 컨셉트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열중했다. 그리고 발빠르게 세계 시장에 출시함으로써 스포티지가 노리고 있던 시장을 빠르게 선점했다.  스포티지의 최초 공개는 1991년이었지만 내수시장에 출시한 것이 1993년 하반기였다. 그리고 당시 기아차가 수출망이 지금처럼 넓지 못했기에 가장 큰 시장으로 점쳐졌던 북미 시장에서의 출시가 늦어졌다. 그리하여 한 발 앞서 출시되어 돌풍을 일으킨 토요타의 RAV4나 혼다 CR-V에 시장을 선점당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포티지는 북미와 유럽 등지에서 적지 않은 관심을 받았다. 전반적으로 내수시장보다는 수출 시장에서의 반응이 더 호의적인 차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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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대한민국에 출시된 스포티지는 기본형인 5도어형 모델만 출시되었다. 이 기본형 모델의 전장X전폭X전고는 각 4,045 X 1,735 X 1,655mm로, 현재 기아에서 가장 작은 SUV인 스토닉보다 95mm짧고 25mm좁으며 135mm 높은 크기다. 후기형에서는 길이가 4,125mm까지 늘어나지만 이마저도 스토닉에 비해 15mm짧다. 좌석은 기본적으로 5인승 구조였으며, 7인승 모델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1996년에는 트렁크 부분을 확장한 롱바디 모델인 ‘스포티지 그랜드’를 출시했고 1997년에는 이를 바탕으로 한 2인승 ‘빅 밴’ 사양도 마련하여 선택의 폭을 넓혔다. 1998년에는 라디에이터 그릴의 디자인을 변경하고 초기형의 단점을 대폭 보완한 아멕스(AMEX) 모델도 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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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티지는 초기에는 2.0리터 SOHC 가솔린 엔진을 먼저 실었다. 이 엔진은 동사의 중형 세단 콩코드에서 사용된 엔진이기도 하다. 후기형에는 2.0 DOHC 엔진이 탑재도기 시작했다. 디젤 모델의 출시는 그 이듬해인 1994년부터 시작되었다. 디젤 모델에는 베스타에 사용한 마쯔다의 2.2리터 디젤 엔진을 탑재했다. 이 디젤엔진은 1997년, 새로운 2.0리터 RT 디젤엔진으로 대체되었다. RT 디젤 엔진을 탑재한 스포티지는 142km/h의 최고속도를 낼 수 있었다.


초대 스포티지는 내수시장보다 수출 시장에서 더 많은 관심을 받은 차다. 1993년부터 2002년까지 판매된 스포티지의 총 대수는 약 54만대로, 이 중 45만대가 수출 물량이었다. 미국 시장에서는 주로 130마력의 2.0리터 4기통 DOHC 가솔린 엔진을 탑재한 모델이 판매되었다. 차체는 기본 5도어 사양과 더불어 3도어 소프트톱 사양과 롱바디 모델까지 판매되었다. 1998년에는 미국 소비자문제 연구기관인 인텔리초이스(Intellichoice)사가 선정한 소형 4륜구동차량 부문 가장 가치있는 차(Best Overall Value Of Year)를 2년 연속으로 수상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독일의 코치빌더, 카르만에게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스포티지의 생산을 위탁하는 방식을 통하여 유럽 시장에 판매되었다.


25년을 이어오고 있는 이름, 스포티지

기아 스포티지는 기아자동차의 첫 독자개발 SUV 모델임과 동시에 기아에게 있어서 여러모로 의미가 각별한 차라고 할 수 있다. 전 세계에 ‘도심형 컴팩트 SUV’의 개념을 처음으로 알린 차라는 점 하나만으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 물론 그 원안은 포드에게서 나왔지만 정작 그 아이디어를 제시한 포드는 그보다 한참 늦은 2000년에 이스케이프를 내놓으며 후발주자 아닌 후발주자 신세가 되었다.


스포티지는 기아자동차의 프레임 섀시 설계 및 사륜구동 시스템의 개발에 지대한 영향을 준 차다. 스포티지를 통해 얻은 설계 경험은 초대 쏘렌토와 모하비까지 이어진다. 기아는 스포티지를 통해 SUV의 방향성을 정립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이름은 현대자동차에 인수된 이후 지금까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기아의 컴팩트 SUV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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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 스포티지는 2세대부터 현대 투싼의 플랫폼을 공유하는, 일체형 차체구조의 도심형 SUV로 지금까지 그 이름을 이어오고 있다. 현재에는 2015년도부터 출시된 4세대 모델이 판매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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