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피니티 FX 시리즈는 지난 2003년 처음 선보였다. ‘스타일리시 SUV’란 장르를 제시한 주인공이었다. SUV도 얼마든 멋을 부릴 수 있다. 그러나 암묵적 합의가 존재해 왔다. 실용성에 누가 될 정도여선 곤란하다고. 1세대 FX는 역으로 이 점을 노렸다. 꽁무니를 매몰차게 잘라 스타일을 가꿨다. 시야와 트렁크, 뒷좌석 머리 공간을 눈 질끈 감고 희생시켰다.
나아가 엔진을 앞 차축 뒤쪽에 얹었다. 소위 ‘프런트 미드십(FM)’ 구조다. 그래서 코너의 정점을 파고들 때 앞머리가 안쪽으로 착착 휘감기는 느낌을 전한다. 일찌감치 엄살을 피우며 언더스티어로 흐르다 주행안정장치가 끼어드는 여느 SUV의 빤한 코너링 성능과 확연히 차별화했다. 원가절감을 위한 플랫폼 공유가 낳은 보너스기도 하다.
2012년 2세대 FX가 다시 한 번 도전장을 던졌다. 디젤 엔진을 얹은 FX30d를 선보인 것. 일본 자동차 업체 가운데 국내 최초다. 인피니티 브랜드로 아시아 최초이기도 하다. 엔진은 V6 3.0L 디젤 터보로 238마력을 낸다. 최대토크는 56.1㎏·m. V8 가솔린 엔진을 얹을 FX50보다 5.2㎏·m 더 높다. 이 엔진은 르노가 2008년 라구나 쿠페에 얹어 처음 선보였다.
변속기는 자동 7단이다. 스티어링 휠에 마그네슘 패들시프트까지 곁들였다. 알루미늄 페달도 갖췄다. 시트는 허벅지와 허리 떠받칠 모서리를 우뚝 세웠다. 센터페시아의 모니터는 한글 내비게이션을 띄운다. 그런데 본사가 아닌, 국내에서 따로 개발했다. 이 때문에 나머지 기능과 유기적 연결은 기대하기 어렵다. 켜는 방법부터 누가 알려주기 전엔 알기 어렵다.
콩알만 한 ‘백(Back)’ 버튼을 4초 이상 눌러야 한다. 내비게이션은 터치스크린으로 조작할 수 있다. 국내 제품이라 TPEG 기능도 되고 맵도 친근하다. 그런데 다른 기능과 충돌을 일으킨다. 가령 블루투스 핸즈프리로 전화가 올 때 모니터 화면이 바뀌지 않는다. 기어이 휴대폰에 손을 대야 한다. 또한, 초성 검색 때 종종 에러를 내며 멈췄다. 보완이 시급하다.
여느 SUV와 달리 FX의 운전석에 앉으면 서늘한 긴장이 샘솟는다. 좌석을 에워싼 대시보드와 가파르게 누운 A필러, 몸을 오므리듯 감싼 시트 때문이다. 이처럼 호전적인 느낌은 인피니티의 매력 가운데 하나다. 비장한 마음가짐은 거친 운전으로 이어지기 쉬웠다. 거침없이 치솟는 엔진회전과 맹렬한 가속에 탐닉하다 보면 연비는 까맣게 잊기 십상이었다.
반면 이번엔 FX는 디젤이다. 막강한 토크와 더불어 경제성도 강조했다. 그래서 더욱 궁금했다. 과연 인피니티 고유의 ‘성깔’을 담아냈을지. 엔진이 숨통 트는 순간, 안도감과 걱정이 동시에 몰려들었다. 이유는 같았다. 조용해서다. 가솔린 엔진의 섬뜩한 포효가 불현듯 그리웠다. 한편으로, 소음과 진동을 꾹꾹 눌러 디젤 엔진의 존재를 감춘 건 반가웠다.
가솔린 엔진과의 차이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인피니티의 자료에 따르면, FX30d의 엔진은 1500rpm부터 최대토크의 90% 이상을 뿜는다. 출발 후 0.5초 이내다. 하지만 실제 느낌은 설명의 감흥엔 못 미친다. 반응은 예민하다. 그러나 가속페달에 발바닥만 스쳐도 움찔거리는 가솔린 FX처럼 경쾌하진 않다. 대신 육중하고 저돌적인 가속을 꾸준히 이어간다.
FX30d은 해외 테스트에서 시속 100㎞ 가속을 8.3초에 끊었다. 라이벌로 손꼽은 BMW X5 x드라이브 30d과 포르쉐 카이엔 디젤의 7.6초엔 다소 뒤진다. 그러나 초반 잠시 주저할 뿐, 가속은 회전수가 치솟을 수록 매서워진다. 게다가 사운드가 중독성 있다. 3000rpm 부근에서 터빈이 돌며 휘파람 소리를 낸다. 4000rpm을 넘어서면 본격적으로 으르렁거린다.
FX30d는 ‘아테사(ATTESA) 지능형 사륜구동 시스템’을 쓴다. 앞뒤 구동력 나누는 비율이 동급 맞수와 사뭇 다르다. 출발할 땐 앞뒤 똑같이 50:50으로 나눈다. 그런데 출발 직후 이 비율을 0:100으로 바꾼다. 슬립이 감지될 때 시스템은 구동력을 다시 50:50까지 잽싸게 옮긴다. 결국 평소엔 파트타임 4WD처럼 뒷바퀴 굴림이란 이야기다.
여기에 프론트 미드십 구조를 어울렸으니, 몸놀림은 은근히 짜릿짜릿하다. 바깥쪽 뒷바퀴에 잔뜩 무게를 실어 고속으로 코너를 감아 돌 때의 느낌은 후륜구동 스포츠카와 비슷하다. 중저속 타이트한 코너에서는 정점을 예리하게 파고든다. 이때 오버스티어가 날듯 말듯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노니는데, 이 재미가 FX를 세상의 다른 SUV와 구분 짓는 담벼락이다.
물론 끝이 뭉툭해진 토크처럼, FX30d에서 이 같은 자극은 어느 정도 희석되었다. 다운시프트 때 팡팡 회전수 띄우지도 않고, 머릿속 아득하게 울부짖지도 않는다. 그러나 쾌감을 다소 양보한 대신 넉넉한 보상이 뒤따른다. 연비와 연료비, 그리고 항속거리다. 출발할 때 634㎞였던 정보창의 주행가능거리는, 촬영을 마칠 무렵 776㎞까지 늘어났다. 게다가 동급 라이벌보다 승차감과 운전감각이 편안하다.
글 김기범|사진 최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