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을 돌아보다] 베르타 벤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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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을 돌아보다] 베르타 벤츠
  • 김상혁
  • 승인 2017.12.12 14: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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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을 넘어간 인류의 자동차 역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노력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이는 기술적인 부문에서, 어떤 이는 경영의 측면에서, 또 어떤 이는 심미적인 부문에서 혁신을 제시하고 이를 성취해 냄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또한 모터 스포츠에서의 전설적인 활약으로 이름을 날렸던 이들도 있다. 본 연재는 자동차의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들에 대하여 돌아 보고자 한다. 이번 인물은 자동차 역사 첫 페이지에 새겨질 이름, ‘베르타 벤츠’에 대한 이야기다.

자동차 역사의 시작을 논할 때면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이름이 칼 벤츠다. 1886년 칼 벤츠가 내놓은 ‘페이턴트 모터바겐’이 내연기관 자동차의 시작이며 메르세데스 벤츠의 시초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 벤츠의 위대한 업적이 세상에 알려지고 인정받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은 그의 아내 베르타 벤츠 덕분이었다.

베르타 벤츠 1849년 독일 포르트 하임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 본래는 베르타 링거라는 이름이었으나 1872년 칼 벤츠와 결혼하며 베르타 벤츠가 됐다. 베르타 벤츠는 칼 벤츠에게 결혼 지참금을 쥐여주며 개발을 도운 든든한 후원자 겸 버팀목이었고 칼 벤츠가 만든 내연기관 자동차이 분명 새로운 이동 수단이 될 것이라는 믿음과 확신이 있었다. 

칼 벤츠가 페이턴트 모터바겐을 만들었지만 세간의평가는 좋지 않았다. 니콜라 조셉 퀴뇨가 처음 증기자동차를 내놨을 때 사람들이 몬스터를 봤다며 놀라고혐오스러운 시선을 보냈듯, 페이턴트 모터바겐도 낯설고 두려운 물건, 말이끌지 않는 이상한 수레 정도로 여겨졌다. 소심한 성격으로 알려진 칼 벤츠는 그런 세간의 평가에 속으로끙끙 앓고만 있었는데 이때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 베르타 벤츠였다. 

1888년무더운 8월, 베르타 벤츠는 새벽에 15살의 오이겐 벤츠와 13살의 리하르트 벤츠, 두 아들을 데리고 친정집으로 향한다. 당시 베르타 벤츠와 칼 벤츠가살던 곳은 서남부 만하임이었고 친정집은 약 100km 떨어진 포르트 하임이었다. 친정집에 다녀온다는 것은 핑계였고 베르타 벤츠는 약 100km의거리를 페이턴트 모터바겐을 타고 이동할 생각이었다. 의기소침해 있는 남편과 세간의 평가를 뒤집겠다는생각으로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혹시나 남편이 잠에서 깰까 봐 두 아들과 페이턴트 모터 바겐을 일정 거리까지 밀어 온 후에 시동을 걸었다. “두 아들을 데리고 친정집에 다녀올게요.” 쪽지를 남기고선 말이다. 역사적으로는 첫 장거리 시운전이었다.


베르타 벤츠의 친정집 여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최초’라는 타이틀에는 고난이 따르기 마련이라지만 안타깝다 못해 가혹할 정도였다. 약 4.5리터 가량의 연료통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고 자동차가 처음으로 발명된 시대니 당연히 주유소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베르타 벤츠와 두 아들은 연료를 찾아 한 약국에 들러서 연료를 충당할 수 있었다. 연료만이 문제였다면 쾌재를 질렀겠지만 그 이상의 문제들이 찾아들었다. 장거리 운전으로 인해 엔진이 과열되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시냇물로 달려가 물을 퍼 날라 엔진을 식혔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달리다 보니 승차감은 말할 필요도 없고 차체에 심한 부담을 안겨주는 것은 당연했다. 지금처럼 차체 강성을 높인 기술도 없었다. 그로인해  차체는 삐걱거리고 차체를 지지하는 고정 축이 느슨해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베르타 벤츠는 자신의 옷가지나 가터를 이용해 고정시키며 자체적으로 수리해 나갔다. 기화기에서 혼합기의 분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나 연료라인이 막힐 때면 머리핀으로 구멍을 뚫어 다시 주행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언덕길을 생각하면 평지는 그나마 수월한 편이었다. 약 0.9마력의 차에 3명이 타고 오르막길을 오르는 것은 무리였다. 어쩔 수 없이 베르타 벤츠는 운전대를 잡고, 두 아들은 뒤에서 힘껏 차를 밀어야 했다. 이때의 경험으로 베르타 벤츠는 칼 벤츠에서 변속 기어의 필요성을 조언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목재 브레이크가 말썽을 피우자 근처 구두 수선집을 찾아가 가죽을 사온 후 브레이크에 덧대기도 했다. 최초의 브레이크 패드라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친정집에 도착한 베르타 벤츠는 칼 벤츠에게 잘 도착했다는 전보를 한 통 넣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자신이 왔던 길과 다른 경로로 돌아왔다고 한다. 한편 베르타 벤츠는 친정집 여정의 시운전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성능이 이뤄져야 할 부분과 보완이 필요한 부분 등을 칼 벤츠에게 알려주었고, 칼 벤츠는 베르타 벤츠의 조언으로 더욱 뛰어난 자동차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세계 최초로 가솔린 엔진 자동차를 만든 사람은 칼 벤츠였지만 이를 세상에 알리고 인정받게 만든 사람은 베르타 벤츠였다. 그녀의 확신과 믿음, 그리고 도전정신이 없었다면 지금의 메르세데스 벤츠와 자동차 기술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뿐만 아니라 장거리 시승을 통해 성능 개선 데이터까지 얻어냈으니 칭송해 마다않을 업적이다. 자동차 역사의 첫 페이지에 새겨진 그녀의 이름은 ‘베르타 벤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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