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의 기대를 업고 한국에 행차하고 보니 막상 시장은 황량한 사막 같았다. 기아차 프라이드는 소형 크로스오버 '스토닉' 투입 이전 생산이 중단되며 홀연히 시장을 떠났고, 쉐보레 아베오는 여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게 용할 따름. 마지막으로 현대차 엑센트는 여전히 뱀의 머리 역할을 도맡고 있지만, 그마저도 과거의 영광은 온데간데없다.
제품들의 상품성 저하가 지속적으로 이뤄진 데다, 소형 SUV라는 카테고리가 신설된 이후에는 수요 자체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소형차들이 내수 시장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완전히 희미해진 상황, 르노 클리오가 한국 땅을 밟은 건 전혀 의미 없는 일이었을까.
가장 늦게 시장에 합류한 만큼 시장을 휘어잡을 무언가가 필요했다. 일단 시선을 잡아 끄는 화려한 외모는 합격점. 현행 클리오도 모델 주기가 썩 싱싱하다고 할 입장은 아니지만 이미 경쟁 모델들은 해외에서 풀체인지까지 이뤄졌음을 고려하면 그나마 양반이었다. 특히 페이스리프트를 통해 최신예 르노 스타일링으로 다듬어진 클리오의 모습은 탄성이 절로 나오게 했다.
화려한 디테일의 LED 퓨어 비전 헤드램프와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로장쥬 엠블럼을 중심으로 펼쳐낸 얼굴은 그야말로 클리오 디자인의 백미. 꾸준히 호평받고 있는 여타 르노 라인업 제품들의 핵심 스타일링들을 잘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여기저기 빨간색 라인을 그어 스포티한 맛을 더했고, 도어캐치를 C필러에 그린하우스 끄트머리에 숨긴 센스까지 더해져 외관을 둘러보는 데에 있어 심심할 틈이 없다.
외관에 비해 속내는 다소 수수한 모양새였다. 메인 모니터 - 송풍구 - 공조장치 조작부로 구성된 센터페시아는 컴팩트하고 심플하여 군더더기가 없다. 대시보드도 밋밋한 듯 보이지만 빨간색으로 액센트를 더한 송풍구가 분위기를 한결 살린다. 다이얼을 중심으로 펼쳐낸 공조장치 컨트롤러는 별도의 LCD 모니터가 없어도 수동 에어컨처럼 온도를 다이얼로 지정할 수 있어 상당히 직관적이면서도 효율적이다.
철저한 로컬라이징을 거친 7인치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은 모니터 사이즈가 다소 작은 느낌이긴 해도 정전식 터치 방식에 어울리는 깔끔한 유저 인터페이스가 높은 사용 편의성을 자랑했다. 신뢰도 높은 'T맵' 내비게이션 역시 무난한 사용성을 보였고, BOSE 사운드 시스템은 국내 시판 소형차 중 가장 뛰어난 음질을 뽐냈다.
의외였던 점은 내장재 사용이다. 직물과 가죽이 혼합된 시트는 제법 우수한 착좌감을 자아냈고, 대시보드에 가죽을 감싼 건 아니었어도 적어도 딱딱한 촉감의 플라스틱만 덩그러니 모습을 드러낸 게 아니었다. 부드러운 내장재로 감싼 대시보드와 도어 트림의 감각은 훌륭하다고 평가 내리긴 어려워도, 적어도 감성 품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보였다.
다만 전장이 4미터를 겨우 넘는 소형 해치백인 만큼 희생해야하는 부분도 더러 있었다. 우선 2열에 손님들을 태우기가 미안하다. 전반적으로 머릿 공간이나 무릎 공간에는 여유가 없고, 승차 공간 폭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도어 암레스트 면적을 최소화해 놓은 모습이다. 결과적으로 도어 트림 쪽에는 팔을 올려놓기가 애매하며, 심지어 센터 암레스트도 없어 편히 앉아 있기가 어렵다.
이외에도 다분히 르노 스타일로 배치된 크루즈 컨트롤, ECO 버튼의 위치는 언제봐도 심란했다. 더불어 푸조와 르노 같은 프랑스 국적 제품들에는 공통적으로 열선 시트 작동 버튼을 시트 하단 모서리에 위치시키고 있어 작동 상황을 파악하기 어렵다. 클리오를 시승했던 시점이 태양빛이 내리쬐는 여름철이었기에 망정이었다.
무릇, 클리오에 관심이 있는 소비자라면 단연 유럽 색깔 짙은 '몸놀림'이 가장 기대가 될 터이다. 기본적으로 소형차들은 작은 차체를 지녀 제법 날랜 움직임을 보여주는 게 일반적으로, 아직까지 국내 소형차 시장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엑센트나 아베오도 활기찬 주행 성능이 매력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단 후드 아래에 품은 건 어떤 심장인지 확인하기 위해 보닛을 열었다. B세그먼트급 모델임에도 불구하고 흔히 말하는 꼬챙이가 아닌 가스리프트로 손쉽게 보닛을 들어올리는 건 여성 소비자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이었다.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낸 엔진은 QM3에서도 접할 수 있었던 1.5리터 dCi 디젤 유닛. 배기량이나 출력 수치가 QM3 엔진과 같기에 크게 반갑지는 않았다. 엔진과 합을 맞추는 변속기도 6단 듀얼클러치로 QM3와 같다. 그러나 클리오는 QM3보다 65kg이 가벼운데다 무게중심도 낮기에 보다 나은 몸놀림을 기대하게 했다.
실제로 클리오는 경쾌한 발놀림을 자랑했다. 배기량이 낮은 디젤 엔진이지만 1.2톤 남짓한 몸무게에 저회전 영역부터 끌어내는 22.4kg.m 넉넉한 최대토크 덕에 스트레스 없는 발진 가속을 연출했다. 효율에 초점을 맞춘 게트락제 DCT는 저속 특정 구간에선 거슬리는 행동을 보이긴 하나, 중속 영역 이상에선 특별히 신경 쓸 일이 없다. 물론 최고출력이 90마력에 불과한 만큼 중고속 영역에 도달한 이후 속도를 조금 더 끌어내기엔 버거웠다.
한편, 고효율 디젤 엔진에 DCT가 합을 맞춘 만큼 주행 연비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도심에서 쉴새 없이 오른발을 움직여도 리터당 14km 아래로 떨어지는 법이 없었고, 고속도로에선 금새 리터당 19km 이상으로 평균연비 수치를 높였다.
이 프랑스 출신 소형 해치백이 진가를 발휘하는 구간은 단연 굽이굽이 흐르는 도로. 짤막한 휠베이스에 부담없는 크기의 차체가 날랜 몸놀림을 자랑한다. 물론 시승하는 내내 136마력에 달하는 VGT 엔진과 7단 DCT를 수혈받은 엑센트를 두고두고 머릿 속에 떠올리게 되지만, 몸놀림 자체는 유럽 색깔 그득히 머금은 클리오 쪽이 더 더 세련된 눈치다. 더군다나 2018년식으로 바뀐 엑센트에는 디젤 모델이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다.
속해있는 전장이 제법 낮은 곳인만큼 노면 소음이 유입되는 건 아쉽고, 이따금 도로에서 올라오는 충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는 못한다. 다만 이런 단점들이 있는데도 두 팔의 움직임에 따라 곧이 곧대로 반응해주는 활기 넘치는 움직임에 단점을 향한 자그마한 분노는 금새 누그러진다. 유럽 B세그먼트 시장을 제패한 자의 품격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시승한 하얀 색상 클리오는 고급형(INTENS) 모델로, 개별소비세 인하가 적용된 가격은 2,278만원이다. 절대적인 수치로 보면 비싼 게 맞다. 가뜩이나 시장에서 인기 없는 소형 해치백인데, 가격까지 비싸니 제아무리 톱스타라도 외면당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달리기 실력에 차이는 조금 있어도 자동변속기 기준 1,640~1,928만원까지 가격대를 보유한 쉐보레 아베오는 물론, 최대 1,733만원까지 뻗는 현대차 엑센트와 비교하면 가격 차이는 꽤나 크게 벌어진다. 특히 소비자들이 소형차 카테고리를 바라보는 눈초리를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프랑스 출신 톱스타는 분명 자신이 가진 가치를 증명하며 한국 땅을 밟은 이유에 대해 피력했다. 그러나 그 가치에 따라 모기업이 매긴 값이 상당히 높았다. 여타 브랜드의 동급 제품은 물론, 준중형 세단과 소형 SUV까지 노려볼 수 있는 가격대였기 때문. 르노는 유럽산 해치백 특유의 핸들링 성능과 Bose 사운드 시스템을 자랑했으나,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