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져 있다시피, 폭스바겐은 독일의 자동차 회사다. 독일어로 ‘국민차’라는 의미다. 1937년, 이름 뜻 그대로 독일 국민차를 만들기 위해 설립되었다. 지금은 유럽 최대의 자동차 그룹으로 거듭났다. 아우디, 벤틀리, 포르쉐, 람보르기니, 부가티 등 11개의 쟁쟁한 브랜드를 거느렸다. 2012년 판매량은 907만 대로 세계 3위였다. 폭스바겐은 이제 규모와 판매에서 세계 최대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
이런 폭스바겐의 시작은 ‘비틀’과 함께였다. 첫차가 1939년의 비틀이었다. 비틀은 ‘국민을 위한 차’를 만들라는 당시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태어났다. 설계는 스포츠카 브랜드인 포르쉐의 창업자이자 오스트로-다임러와 메르세데스-벤츠 등에서 명성을 떨친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가 맡았다.
히틀러는 포르쉐 박사에게 몇 가지 조건을 내 걸었다. 어른 둘, 아이 셋의 일가족이 탈 수 있는 공간을 요구했다. 약간의 짐도 실을 수 있어야 했다. ‘시속 100㎞ 이상, 990 마르크(당시 USD 기준 329) 이하’라고 최고속도와 가격도 못 박았다. 이 조건은 당시의 기술수준과 원자재 가격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천재 엔지니어, 포르쉐 박사는 이를 현실로 이뤄냈다.
히틀러의 국민차 프로젝트로 인해 태어난 폭스바겐과 비틀. 물론, 이는 국민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전쟁을 일으키기 전, 국민들을 달랠 속셈도 담겨있었다. 그러나 비틀은 이런 삐뚤어진 야망과는 상관없이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한때 비틀을 비롯한 폭스바겐의 몇몇 차종이 ‘평화의 상징’으로도 여겨졌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비틀은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본격적으로 양산되었다. 이후 58년간 약 2,152만 대 이상 팔렸다. 서독에서는 1978년까지, 브라질과 멕시코 등에서는 2002년까지 생산됐다. 단일 차종으로는 세계 최다 판매 기록이다. 지금은 ‘폭스바겐하면 골프’라지만 사실상 ‘폭스바겐의 영혼’은 비틀인 셈이다.
재미있는 사실도 있다. ‘비틀’이 정식 명칭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비틀은 딱정벌레를 닮은 외모 때문에 붙은 애칭에 불과했다. 히틀러의 프로젝트 명은 ‘KDF(Kraft Durch Freude)-wagen’이었다. 우리말로 하면 ‘기쁨을 통한 힘-자동차’정도로 풀이된다. 비틀은 초창기엔 ‘타입-1’, 이후 ‘1100’, ‘1200’ 등 엔진에 따라 붙인 숫자를 이름 대신 사용했다.
그러나 1998년 ‘비틀’은 정식 명칭으로 거듭났다. ‘뉴 비틀’이 데뷔하면서 1세대와 2세대를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뉴 비틀은 비틀의 고유 디자인을 그대로 물려받아 많은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뉴 비틀은 더 이상 국민 대다수를 위한 차는 될 수 없었다. 둥글둥글한 차체와 문 두 짝으로 구성된 개성 뚜렷한 디자인은 더 이상 ‘국민차의 조건’에 맞지 않았다.
비틀은 2011년 또 한 번 진화했다. 14년 만에 등장한 3세대다. 국내에는 2012년 가을에 데뷔했다. 이번엔 ‘더 비틀’이다. 그런데 뉴 비틀 때와는 분위기가 딴판이다. 반듯한 선이 도드라져 단단한 느낌을 낸다. 실내는 이전보다 실용적이다. 움직임도 한결 빠릿빠릿해졌다. 국내에는 이미 검증된 2.0 TDi 엔진과 6단 DSG를 맞물려 얹은 모델만 판매된다.
비틀 고유의 실루엣은 여전하다. 반원 세 개가 고스란히 포개진 모양새 그대로다. 하지만 뉴 비틀 때와는 다르다. 일단 차체가 200㎜ 길고 80㎜ 넓다. 높이는 12㎜ 낮아졌다. 그래서 이전보다 존재감이 뚜렷하다. 차체 곳곳을 수놓은 선들과 안쪽을 싹둑 잘라 낸 테일램프, 도어 아래쪽에 붙인 날 세운 몰딩 등도 한 몫 한다.
스포티한 느낌도 강해졌다. 어깨선을 바짝 끌어올린 까닭에 옆 창 비율이 스포츠카처럼 빠듯하다. 엉덩이에는 포르쉐 911 마냥 커다란 스포일러도 달았다. 이전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A필러의 각도와 지붕선이다. 반원 형태를 오롯이 드러냈던 뉴 비틀과는 달리, 1세대 비틀 처럼 A필러를 바짝 세웠다. 납작 눌린 지붕은 은근히 터프한 느낌을 낸다.
실내 역시 이전과는 딴 판이다. 앞면을 반듯하게 자른 대시보드와 곧추 선 A필러가 어우러지니, 마치 이전세대 911의 실내에 들어 선 느낌이다. 구성도 이전에 비해 실용적이다. 뉴 비틀은 원형 디자인을 강조하느라 다소 기능성을 상실했었다. 글러브 박스는 두 개. 1세대 비틀 처럼 대시보드 위쪽에도 작은 글러브 박스를 달았다. 팔걸이로 위장한 센터콘솔 아래쪽에도 자잘한 수납공간들을 마련했다.
뒷좌석 공간은 납득 가능한 수준. 하지만 패밀리카로 쓰기에는 다소 좁다. 뒷좌석 승객의 승하차를 위해 B필러 안쪽에 붙인 밴드형 손잡이는 그대로다. 반면 운전대 옆에 있던 꽃병은 자취를 감췄다. 대신 대시보드 위에 세 개의 미터를 달았다. 비틀의 성격이 확연하게 달라졌다는 증거, 가운데는 포르쉐에서나 볼 수 있었던 초시계다.
모서리를 뾰족하게 부풀린 시트와 아래 부분을 싹둑 잘라낸 ‘바텀플렛’ 스티어링 휠, 오르간 타입의 가속페달 등도 성능을 강조하는 모델들이 주로 쓰는 아이템이다. 이런 요소들은 실제로 비틀의 분위기를 확 바꾸어 놓았다. 열쇠를 꽂고 비틀어야 하는 시동장치도 스포티하게 느껴질 정도다.
파워트레인은 골프, 티구안 등에서 선보여온 직렬 4기통 2.0L 디젤 터보엔진과 6단 듀얼클러치 변속기의 조합. 최고 140마력, 32.6㎏·m의 힘을 내고 1L의 연료로 15.4㎞를 달린다. 가솔린 엔진의 뉴 비틀보다 출력도, 연비도 좋다. 엔진은 정숙하다. 진동도 소음도 적다. 기어를 착착 갈아타는 변속기 덕분에 가속과정도 매끄럽다. 역시 폭스바겐이 자랑하는 명기답다.
가속감각은 골프 2.0 TDi와 비슷하다. 마치 2.5~ 3.0L 자연흡기 엔진을 단 모델처럼 가뿐하게 움직인다. 터보엔진의 특성도 비교적 적다. 엔진 회전수에 개의치 않고 힘을 시종일관 팍팍 쏟아낸다. 실제 가속성능도 골프와 비슷하다. ‘제로백’을 9.5초만에 끊는다. 하지만 골프 GTD가 다는 170마력짜리 유닛에 대한 아쉬움은 남는다. 더 비틀의 든든한 차체와 235-45 사이즈의 두툼한 스포츠 타이어가 동력계를 압도하고 있어서다.
거동은 짐작보다 침착하다. 둥글둥글 커다란 몸집을 보고는 다소 뒤뚱거릴 것으로 생각했는데, 제법 빠릿빠릿하다. 스티어링 휠의 반응도, 자세를 다잡는 속도도 예상을 웃돈다. 이전보다 움직임이 반듯해진 것은 물론이다. 골프보다 무게중심이 조금 높지만 불만은 없다. 타이어의 접지한계를 넘어선 상황에서도 운전자가 의도한 궤적을 따라 꿋꿋하게 돌아나간다. 골프와는 다른, 토션빔 구조로 이루어진 뒤쪽 하체의 움직임도 딱히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이전 뉴 비틀은 아이들과 여성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비틀의 귀여운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폭스바겐의 의도대로 뉴 비틀은 귀여운 차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었다. 그러나 이는 스스로의 한계를 결정짓는 요소로 작용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뉴 비틀 타는 남성의 ‘성 정체성’은 의심해 봐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 돌았다.
하지만 더 비틀은 다르다. 안팎과 주행성능에 남성미를 뾰족하게 부각시켰다. 실용성도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비틀의 고유 매력은 그대로 유지했다. 그 결과 신형 비틀은 개성과 대중성이 한층 더 뚜렷해진 모델로 진화했다. 골프에게 물려 준 ‘대중차’의 자리를 빼앗아 올 정도는 아니지만, 이제 남녀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모델로 거듭난 것은 확실하다.
글 류민 기자 | 사진 한상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