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리급 마세라티의 가치 - 마세라티 기블리 디젤 시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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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리급 마세라티의 가치 - 마세라티 기블리 디젤 시승기
  • 박병하
  • 승인 2016.04.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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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태어난 마세라티의 초대 기블리는 페라리 데이토나와 함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GT 중 하나로 통했다. 주지아로가 디자인한 롱 노즈/숏 데크 형상의 아름다운 디자인, 325마력의 5000GT에 사용했던 4.9리터 V8엔진을 실은 기블리는 마세라티 라인업에서도 손꼽히는 미학과 성능을 자랑했다. 이 덕분에 초대 기블리는 마세라티 고성능화의 신호탄으로도 통하게 된다. 이 이름은 90년대를 풍미한 마세라티 바이터보 시리즈의 쿠페 버전의 이름으로 쓰이기도 했다. 그리고 2013년, 마세라티 브랜드의 새로운 국면을 맞게 해 준 3세대 기블리가 태어나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마세라티는 3세대 기블리를 통해 과거보다 가격을 낮추고, 접근성을 높임으로써 볼륨을 늘리고자 한다. 이러한 정책은 꽤나 효과적으로 먹혀 들었다. 기블리의 데뷔 첫 해인 2013년, 브랜드 최초로 1만대 이상의 연간 판매량을 달성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그 두배가 넘는 약 3만 6천여대의 판매고를 올렸다. 또한 최근 제네바 모터쇼에서 선보인 신형 SUV 르반떼(Levante)와 함께 2016년까지 5만대 판매고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마세라티 볼륨 확대의 선봉장인 기블리, 그 중에서도 국내 시장에서 비중이 가장 높은 디젤 모델을 시승했다. VAT 포함 가격은 9,980만원.




마세라티 기블리의 외관 디자인은 신형 콰트로포르테를 통해 드러난 마세라티의 새로운 디자인 언어를 더욱 완성형에 가깝게 다듬어 낸 결과물로 볼 수 있다. 콰트로포르테의 차체 형상을 80% 정도로 축소한 듯한 차체와 디테일들은 마세라티 가(家)의 일원임을 나타내는 표식으로 작용한다. 실제 기블리의 전장X전폭X전고는 각각 4,971X1,945X1,461 mm. 길이는 확실히 콰트로포르테보다 짧지만 전폭은 고작 3mm 밖에 차이가 나지 않고, 전고는 20mm 더 낮다. 이 때문에 기블리는 시각적으로 여타의 E세그먼트 세단에 비해 훨씬 커 보인다. 기본으로 장착되는 19인치 알로이 휠이 작아 보일 정도다.




측면의 실루엣을 보고 있으면 보닛이 유난히 길고, 트렁크 리드가 짧아 보인다. 쿠페 스타일의 정석과도 같은 롱 노즈 숏 데크 스타일을 세단의 울타리 안에서 절묘하게 구현해 놓았다. 극단적인 쐐기 형상의 보닛에서 시작하여 덕 테일 스타일의 트렁크 리드에 이르는 측면의 선이 인상적이다. 프론트 휀더에 자리한 3개의 에어 홀과 C필러에서 빛나고 있는 삼지창 엠블럼은 측면에서조차 이 차가 마세라티의 차임을 피력하고 있다.



맏형인 콰트로포르테를 쏙 빼닮은 몸매를 지닌 기블리. 그렇지만 마세라티는 얼굴마저 콰트로포르테의 것을 복제하는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다. 기블리의 얼굴은 콰트로포르테에 비해 훨씬 도발적인 인상을 준다. 기블리의 얼굴은 말 그대로 조각 미남의 그것이지만, 선하고 귀족적인 기품보다는 반항적이고 퇴폐적인 미의식을 자극한다. 마치 젊은 시절의 알랭 들롱처럼 날카롭고 차갑다. 이 얼굴은 차체의 전반적인 조형과 일체감을 이루며 디자인의 완성도를 높임과 동시에 기존 모델들과 차별화를 이루는 부분이다.




이탈리안 디자인의 힘을 오롯이 드러내는 외관과는 달리, 실내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스포츠카에 가까운 스포티함이 실내 디자인 전반에 걸쳐 강조되어 있는 편이다. 실내 곳곳은 분명 이탈리아에서 무두질된 양질의 가죽으로 뒤덮여있다. 그렇지만 독일, 혹은 영국식의 세심함이나 정갈함은 찾아보기 어렵다. 디테일로 파고들수록 이러한 면모들은 더 부각된다. 여기에 실내 곳곳에서 보이는 크라이슬러의 부품들은 다수의 소비자들과 미디어에서 꾸준히 지적되고 있는 부분이다.



스티어링 휠은 스포티한 디자인의 3스포크 타입으로, 콰트로포르테의 것과 유사한 형상을 지니고 있다. 직경이 다소 큰 편이지만 쥐었을 때의 질감은 좋은 편이다. 그 뒤편에는 통 알루미늄을 절삭해서 만든 큼지막한 시프트 패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멋들어진 시프트 패들의 위치 탓에, 방향지시등 및 와이퍼 조작을 위한 레버가 다소 뒤로 물러나 있어, 손이 작은 사람에게는 다소 불편하다. 센터페시아 상단에는 마세라티의 로고가 그려진 길쭉한 형상의 아날로그 시계가 자리잡고 있다. 그 아래에는 터치스크린식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이 자리한다. 이 시스템은 MTC(Maserati Touch Control)라 쓰고 크라이슬러 유커넥트(Uconnect)라 읽으면 된다. 사용 편의성은 좋은 편이지만 UI의 디자인이 그다지 세련된 편은 아니다. 내비게이션은 지니맵을 쓰고 있다. ZF의 8단 자동변속기를 제어하는 레버 역시 크라이슬러 차량들과 작동 구조가 같다. 목재와 가죽으로 마감된 플로어 콘솔은 콰트로포르테와 동일하다. 컵홀더는 너무 얕고 수납공간이 전반적으로 부족한 편이다.



앞좌석은 부드럽게 몸을 감싸준다.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질감의 가죽으로 마감되어 있으며, 안락한 착석감을 자랑한다. 독일 세단들처럼 수십 방향의 조절기능은 없어도, 몸이 알아서 좌석에 맞춰지는 느낌이다. 앞좌석은 양쪽 모두 8방향의 전동조절 기능과 4방향 허리받침, 그리고 2단계의 열선 기능을 제공한다. 운전석은 2개의 메모리 기능이 추가된다.




기블리의 뒷좌석은 성인 남성이 편안하게 승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전반적인 공간 설계가 E세그먼트 세단 기준으로도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다. 등받이는 각도가 다소 서 있는 편이고 머리받침은 숫제 고정식이다. 이는 뒷좌석에는 크게 비중을 두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반면, 좌석의 착좌감 자체는 우수한 편이다. 뒷좌석은 좌우 양쪽에 각 2단계의 열선기능과 전동식 후방 선 셰이드 등의 편의장비를 제공한다. 트렁크 용량은 500리터로, 수치 상으로는 동급에서 넉넉한 편에 속한다. 트렁크 리드는 전동 개폐 기능을 지원한다.



기블리 디젤의 심장은 VM모토리(VM Motori)의 3.0리터 V6 디젤 엔진이다. 이 엔진은 마세라티 브랜드 역사상 최초로 사용하게 된 디젤 엔진이다. 최고출력은 275마력/4,000rpm, 최대토크는 61.2kg.m/2,000~2,600rpm이다. 이 엔진은 플래그십 세단인 콰트로포르테에도 올라가는 엔진이다.



디젤 엔진을 사용하는 차가 가솔린 엔진을 사용하는 차에 비해 소음이 적은 경우가 있을 수 있을까? 기블리 디젤이 바로 그러한 경우에 속한다. 기블리 디젤은 일반, 혹은 I.C.E 모드 상에서는 마세라티의 기준에서 가장 조용하다고 할 수 있다. 시동 초기부터 주행 중까지 가솔린 엔진을 탑재한 다른 마세라티 모델들에 비해 한층 정숙한 느낌이다. 일상적인 운행 중에는 이 차가 마세라티임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다. 파워트레인으로부터 들어오는 진동은 다소 있는 편이지만 신경이 쓰일 정도로 떨림이 심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승차감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들다. 안락한 승차감을 지향한다고 말하기에는 노면으로부터의 충격이 지나치게 강하게 받아내고, 스포티한 승차감을 지녔다고 말하기에는 요철 통과 후 자세를 추스르는 모습이 은근슬쩍 서투르다. 심지어는 다른 마세라티에 비해 편평비가 약간 높은 타이어를 신었는데도 불구하고 노면에 대한 정보를 낱낱이 읽어 들인다. 이 때문에 덩치에 비해 스티어링 휠과 척추에 전달되는 피드백의 양도 많은 편이다. 차체가 주는 느낌은 상당히 묵직한 편이다.


하지만 이 복잡미묘한 승차감에 비해 똑부러지는 구석이 하나 있다. 바로 마세라티의 장기인 `소음을 소리로 바꾸는` 능력이다. 마세라티는 VM모토리의 디젤엔진에도 자사의 가솔린엔진과 같은 발성법을 주입시켰다. 그리고 이 결과는 스포츠 모드로 전환하는 순간 확실하게 드러난다. 일상적인 운행에서는 그저 여느 디젤엔진과 다르지 않은 소음을 냈던 기블리 디젤의 엔진은 스포츠 모드로 전환하면서부터 발성법을 바꾼다. 이 때부터 평범한 디젤엔진의 소음은 특대형 디젤기관차를 연상시키는 육중한 울림 아래 파묻히게 된다. 테일 파이프에서 흘러 나오는 기블리 디젤의 배기음은 디젤엔진으로서는 실로 감각적인 배기음이라고 할 수 있다. 감각적인 배기음을 조율하는 데 있어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마세라티의 각별한 정성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가속 페달을 카페트 너머로 짓이기듯 밟는 순간, 저회전에서 쏟아지는 61.2kg/m의 육중한 토크가 공차중량 1.875kg의 기블리를 기운 차게 추진시킨다. 여기에 중장비의 구동음을 연상시키는 우렁찬 울림의 배기음과 어우러져 가속의 쾌감이 더욱 극적으로 몸을 파고든다. ZF의 자동8단 변속기는 디젤 심장의 동력 성능을 충실하게 받쳐주며 전력으로 추진을 돕는다. 고정식 패들시프트로 수동변속을 하는 맛도 꽤나 각별하다. 통 알루미늄을 깎아 만든 고정식 시프트 패들은 마치 방아쇠를 당기듯 기계적인 조작감이 일품이다. 출발 후 45km/h에서 2단, 65km/h에서 3단, 95km/h에서 4단으로 변속하며 100km/h를 돌파한다. 다만 가속 감각 자체는 가벼운 화살이라기보다는 묵직한 투창에 더 가깝다. 기관차처럼 기운이 넘치지만 경쾌하지는 않다. 변속기의 능력은 충분하지만 다소 촘촘하게 나눠 놓은 초반 기어비 때문에 초기 가속에서 약간의 손해를 본다는 느낌이 든다.



크고 작은 구배의 코너를 돌아나가면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스티어링 시스템이다. 근래에 보기 드문 유압식 스티어링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는데, 전자식과는 또 다른 질감이다. 묵직하고 직결감이 나쁘지 않다. 조타에 대한 반응은 차의 덩치를 감안하면 빠른 축에 속하며, 조작에 따라 그럭저럭 민첩하게 몸을 비튼다. 그러나 승차감 단락에서 언급한 다소 생소한 감각의 섀시 설정, 그리고 상대적으로 무거운 중량 때문에 조종이 다소 까다롭다. 여기에 ESP개입도 늦는 편이고 뒤쪽이 잘 흐르는 설정이어서 조종의 난이도는 더욱 상승한다. 운전자의 입맛대로 움직여주는 충견과는 꽤나 거리가 있다. 특히, 방대한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적 지원으로 구현되는 정교함과 충실한 어시스트가 수반되는 독일식 스포츠 세단에 익숙한 운전자들에게는 기블리의 성격이 그다지 세련되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차체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서 날것의 기계다운 맛을 드러낸다.



디젤 엔진을 실은 마세라티, 기블리 디젤의 공인 연비는 도심 9.7km/l, 고속도로 13.6km/l, 복합 11.1km/l이다. 시승 중 트립 컴퓨터를 통해 기록한 구간 별 연비는 다음과 같다. 도심(혼잡) 8.9km/l,. 도심(원활) 10.0km/l, 고속도로 13.7km/l를 기록했다. 도심이건 고속도로건 트리컴퓨터 상으로 공인연비만큼은 나와준다. 여기에 마세라티 최초로 기억되는 스톱/스타트 시스템의 존재로 인해 도심에서 연료 낭비를 꽤나 줄일 수 있었다. 연비 기록 중에는 I.C.E 모드를 활성화시킨 상태로, 각 구간별 규정속도에 맞춰 정속으로 운행했다.



마세라티 기블리는 마세라티가 본격적인 볼륨 확대를 위해 내놓은 모델이다. 과거의 마세라티와는 여러모로 다른 성질을 바탕에 두고 만들어져 있다. 그 성질 중 하나는 바로 `대중성`이다. 소수의 골수 열혈 마니아들이 아닌, 불특정 다수의 소비자를 향하고 있는 차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대중성이라는 가치에 가장 충실한 모델이 바로 기블리 디젤이다. 그러면서도 흔해 빠진 독일산 세단들이 주지 못하는, 마세라티만의 색다른 감각과 성격을 살려내기 위한 고집스런 감성설계 역시 돋보인다.



그래서 기블리 디젤은 진정한 엔트리급 마세라티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합리적인 디젤 엔진과 함께 한층 높은 접근성을 주무기로 내세우면서도, 마세라티 브랜드의 가치를 표현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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