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했던차]신진공업사 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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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했던차]신진공업사 신성호
  • 박병하 기자
  • 승인 2019.10.14 10: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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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자동차산업의 초창기는 그야말로 빈 손으로 시작한 것이나 진배 없었다. 당시는 한국전쟁의 참화가 한반도를 송두리째 뒤집어 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그리고 미군이 발을 들였던 필리핀 등과 마찬가지로, 미군들이 남기고 간 지프들의 부품을 하나 둘씩 주워다가 복제, 내지는 온갖 방식으로 개조하는 방식으로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실상은 제대로 된 자동차라기보다는 과거 도심이나 농촌 등에 종종 나타났던 영운기와 유사한 형태였다.

대한민국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자동차라고 할 수 있는 국제차량제작(國際車輛製作)의 시-발이 바로 그러한 예다. 시-발은 본래 미군으로부터 불하(拂下)받거나 남기고 간 군용 지프들의 부품을 수집하여 그 중 상태가 양호한 것을 골라 짜맞추는 방식으로 생산된 자동차였다. 시-발 자동차는 최초의 국산자동차로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5.16 쿠데타로 제 3공화국 체제가 들어서면서 박정희 정부는 ‘국가재건 방안’ 중 하나로 내놓은 ‘자동차공업보호육성법’을 제정 및 공표했다. 이는 외산 자동차 및 부품의수입을 제한하고 국산화율 의무화 등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새나라자동차 새나라>

새로운 정권은 대한민국 자동차 업계에 눈독을 들이기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군사 정권의 중앙정보부 주도로 자동차 기업이 하나 등장하게 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자동차 기업이 바로 ‘새나라자동차공업주식회사(이하 새나라자동차)’였다. 새나라자동차는 명목 상, 닛산자동차의 초대 블루버드(Bluebird)를 반조립(Semi-Knock-Down) 방식으로 라이센스 생산한 자동차였다. 새나라자동차는 당시 우리보다 자동차 선진국으로 한참 앞서 나가고 있었던 일본의 승용차를 그대로 들여 온 모델에 가까웠기에, 품질이나기술적 완성도 면에서 국제차량제작의 시-발 자동차와는 차원이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새나라 블루버드는 ‘새나라 양장 미인’이라는 이명으로 불리면서 시발자동차의 몰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 편, 1963년 부산에 위치한 '신진공업사'라는 정비개조공장에서 새로운 자동차가 나타났다. 신진공업사는 미군에서 불하 받은 4/3톤 군용트럭을 개조하여 국내 최초로 규격화된 소형버스를 제작하던 회사였다. 이 때 그들이 만들어 낸 소형 버스들은 버스 수요가 높아지고 있었던 1960년대, 대중교통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 낸 승용 자동차는 시-발 자동차 이래 국내 기술로 만들어진 두 번째 자동차, '신성호'였다.

시-발 자동차 이후 두 번째로 나타난 국산 자동차
신성호는 당시 새나라자동차가 생산(사실 상 수입)하던 닛산 블루버드의 디자인을 모방한 세단형 승용차로, 설계적인 기반은 시-발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미군이 사용했던 군용 지프의 섀시와 엔진, 변속기, 차축 등을 활용했다. 외관은 새나라자동차의 디자인과 매우 흡사했다. 

신진공업을 세운 설립자 김창원씨는 새나라자동차를 보게 된 이래, '순수한 국산 세단'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신성호를 완성시켰다. 비록 설계적인 기반은 군용 지프를 바탕으로 했지만 외형만큼은 하나하나 두들겨서 만들어진 수제품으로, 닛산 블루버드와 매우 흡사한 외형을 가졌다. 게다가 차창과 타이어는 우리나라에서 만든 제품을 사용했다. 이 덕분에 윤치영 당시 서울시장의 도움으로 신성호를 서울 시청 앞 광장에 전시했다. 이를 통해 많은 수의 국민이 신성호의 존재를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대한민국에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신진공업사의 신성호는 국민들과 정부의 관심을 받았다. 심지어 당시 상공부 장관이 직접 신성호를 타고 김포가도를 달리며 국산 승용차의 탄생을 축하했다. 하지만 국내 기술로 만들어진 이 유선형의 승용차에 대한 기대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특히 근본적으로 시-발 자동차와 크게 다르지 않은, 군용 지프의 재생품에 가까웠기 때문에 표준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품질이 조악했고 그만큼 고장도 잦았다.

여기에 새나라자동차에 비해 가격이라도 저렴했다면 나름대로 저렴한 국산자동차를 찾는 수요를 맞출 수 있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신성호의 가격이 전혀 저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생부품을 사용한 데다, 차체 하나하나가 모두 수공업에 의존하여 만들어진 탓에,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단가 상승의 원인으로도 작용했다. 당시 신성호의 가격은 새나라자동차에 비해 2배에 달했다. 여기에 상술한 잦은 잔고장과 낮은 신뢰도 탓에 현대적인 생산 방식으로 만들어져 우수한 품질에 가격마저 낮은 새나라자동차와는 도저히 경쟁을 벌일 수 없었다. 우리기술로 만들어진 두 번째 자동차인 신성호는 고작 318대 밖에 생산되지 못했다.

하지만 전화위복이라 했던가. 최대의 경쟁자였으며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던 새나라자동차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실 새나라자동차는 처음부터 그 설립과 운영에서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다. 중앙정보부 주도로 세워진 새나라자동차는 군사 정권이 제정한 자동차공업 보호육성법과는 정반대로 운영되었던 것이다.

새나라자동차는 일본에서 부품을 들여와 조립생산하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일본에서 만들어진 완제품 상태인 닛산 블루버드를 공장을 세우기도 전에 들여와 판매하고 있었던 것도 모자라, 정부의 각종 특혜를 통해 수입함으로써 엄청난 마진을 붙였으며, 이를 통해  획득한 자금이 공화당의 정치자금으로 쓰였다는 내용의 언론 보도가 쏟아진 것이다. 이 때문에 새나라자동차는 증권 파동, 워커힐 호텔 신축, 파칭코 부정 도입 등과 함께 이른 바 제3공화국의 ‘4대 의혹’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이에 신진공업은 소형자동차 제조면허를 취득하고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던 새나라자동차의 부평 공장을 인수, 신진자동차로서 새출발을 하게 된다. 새나라자동차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신진공업으로서는 실로 전화위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자본, 자재, 기술 등, 모든 것이 열악한 환경에서도 완성해 낸 신성호는 신진자동차의 밑거름이 됨과 동시에, 국내 자동차산업에 새로운 활력이 되어 주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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