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했던차]쌍용자동차 코란도훼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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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했던차]쌍용자동차 코란도훼미리
  • 박병하 기자
  • 승인 2019.10.15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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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의 SUV, ‘코란도(Korando)’를 만든 쌍용자동차는 창업 이래 과거부터 현재까지 ‘SUV’를 주력으로 사업을 전개해 오고 있다. 코란도를 통해 확립되기 시작한 ‘SUV 전문 제조사’라는 정체성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으며, 2017년도와 2018년도에는 SUV/크로스오버의 열풍에 힘입어 한국지엠마저 제치고 내수판매량 3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도 다양한 SUV/크로스오버 라인업을 전개하며 ‘SUV 명가’로의 재도약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사진: 쌍용자동차)

쌍용자동차의 브랜드 정신을 상징하는 이름인 ‘코란도’는 1969년, 신진자동차가 미국 카이저(Kaiser) 사의 CJ-5(민수용 지프, Civilian Jeep)를 그 조상으로 하는 지프 형태의 SUV 모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는 신진지프자동차, 거화자동차, 동아자동차를 거쳐 쌍용그룹에 인수된 이후 최종적으로 단종을 맞는 95년도까지 이러한 형태를 줄곧 유지했다. 즉, SUV의 시조격인 지프의 형태를 하고 있는 전통적인 SUV였다.

(사진: 쌍용자동차)

쌍용자동차의 코란도는 거화 시절만 해도 다양한 가지치기 모델들이 존재했다. 기본적인 숏바디 형태의 차종은 물론, 9~12인승 사양의 롱 바디 모델도 존재했으며, 심지어 픽업트럭형 모델도 존재했다. 하지만 동아자동차에 인수된 직후인 1985년도 이후, 경제성을 이유로 저성능의 엔진을 채용함과 더불어 경쟁력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또한 차량 자체의 형태 역시 당시의 국내 자동차 시장의 요구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았다. 코란도는 군용 차량의 특색이 그대로 남아 있는 매우 고전적인 형태의 SUV였기 때문에 승용 시장에서는 판매량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진: 쌍용자동차)

물론, 코란도의 주인이었던 거화자동차는 이를 누구보다도 절감하고 있었다. 거화자동차는 1982년도부터 현대적인 개념의 다목적 차량을 개발하는 데 착수하여 동아자동차 시절을 거쳐 쌍용자동차 대에 이른 1988년에 처음으로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이 차는 국내 완성차 업계에서 현대정공 갤로퍼보다 먼저 출시된 가장 현대적인 형태의 SUV인 이 차의 이름은 ‘코란도훼미리’다.


갤로퍼보다 앞서 등장한, 국산 SUV의 선구자
쌍용자동차 코란도훼미리는 앞서 언급한 대로 거화시절부터 개발이 시작되었다. 거화자동차는 당시 파워트레인을 공급받고 있었던 일본 이스즈(Isuzu)사가 생산하고 있었던 SUV 모델 빅혼(Bighorn)의 섀시를 바탕으로 한, 스킨체인지에 가까운 형태의 모델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차명인 코란도훼미리는 가족을 뜻하는 영단어 ‘Family’에서 가져왔으며, “기존 코란도와는 완전히 다른, 지프의 장점을 살리면서 승용차의 안락함과 거주성을 극대화한다”는 컨셉트를 반영한 것이다.

(사진: 쌍용자동차)
(사진: 쌍용자동차)

코란도훼미리의 개발은 장장 5년여에 걸쳐 진행되었다. 거화는 코란도훼미리의 개발이 시작된 지 2년이 되는 1984년 서울국제무역박람회에 ‘KR-600’이라는 이름의 컨셉트카를 내놓았는데, 이 차는 코란도훼미리의 특징을 대부분 갖추고 있었다. 외관 디자인은 미쓰비시의 파제로와 지프의 그랜드체로키 등을 벤치마킹한 흔적이 엿보였다. 코란도훼미리는 250kg의 모래주머니를 싣고 테스트 드라이버 4명이 탑승해 국내에서 가장 험악한 비포장 도로들을 오가며 1년 6개월 동안 250,000km를 주행하는 혹독한 테스트를 마쳤으며, 이를 통해 완성도를 높여갈 수 있었다. 코란도훼미리는 개발기간 동안 제작한 프로토타입만 70여대에 이르렀다.


하지만 같은 해 거화는 큰 위기에 봉착했다. 당시 거화그룹의 김창원 회장이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에서 무려 23만 달러를 탕진한 사실이 적발되면서 ‘원정도박 파문’을 일으키며 검찰에 구속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1970년대까지만 해도 삼성, 럭키그룹 등과 함께 재계 서열 2~3위를 다투던 규모의 거화그룹은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그 계열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이곳저곳에 매각되기 시작했다. 물론 흑자도산하게 된 거화자동차도 매물로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된 거화를 인수한 이가 바로, ‘드럼통 버스왕’이자 당시 동아자동차 사장이었던 하동환 前 한원그룹 명예회장이었다.

(사진: 쌍용자동차)
(사진: 쌍용자동차)

코란도훼미리의 개발은 주인이 동아자동차로 바뀐 시절에도 지속되었다. 동아자동차의 하동환 회장은 당시 ‘승용차형 지프’라고 불리었던 신형 차량의 개발에 무려 250억원의 비용을 투입했다. 하지만 이미 거화를 인수하면서 상당한 자금을 사용한 터에 회사 규모에 비해 막대한 자금을 신차개발에 쏟아 부으면서 동아자동차 역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로 인해 동아자동차는 1986년, 쌍용그룹에 인수되며 오늘날의 쌍용자동차로 거듭나게 된다.


게다가 코란도훼미리는 이미 개발이 대부분 완료된 상태였지만 쌍용그룹은 이 차를 시장에 투입할 수 없었다. 이 당시는 대한민국의 자동차 산업을 망가뜨린 주범, ‘자동차공업 통합조치’가 아직 발효 중인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 당시 승용차를 만들어 팔 수 있는 기업은 현대자동차와 대우자동차 뿐이었다. 그리고 군부정권은 이를 명목으로 거화-동아자동차 시절부터 ‘승용차형 지프’의 출시를 불허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승용차형 지프’는 4륜구동 자동차를 넘어 승용차 시장에 진출하려는 ‘꼼수’로 보였기 때문이다.

(사진: 쌍용자동차)
(사진: 쌍용자동차)

이렇게 거화시절부터 개발되기 시작한 코란도훼미리는 자동차공업 통합조치가 해제된 1988년 11월에 이르러서야 겨우 출시할 수 있었다. 개발이 시작된 지 장장 6년 만이며, 개발되는 과정에서 주인은 두 차례나 바뀌었지만 쌍용자동차는 드디어 제대로 된 승용형 SUV 모델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사진: 쌍용자동차)
(사진: 쌍용자동차)
(사진: 쌍용자동차)
(사진: 쌍용자동차)

쌍용자동차의 코란도훼미리는 당시 국내 완성차 업계에서 유일하게 스테이션 왜건형의 차체를 가진, 매우 현대적인 형태의 SUV였다. 쌍용자동차 코란도훼미리는 당대의 지프형 자동차들과는 달리, 승용차처럼 뒷문이 달려 있는 5도어 스테이션 왜건 형태 덕분에 뒷좌석 승객의 승하차 편의성이 높았다. 그리고 차명인 훼미리(Family)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차는 당시 ‘3저(저유가, 저달러, 저금리) 호황’으로 성장한 중산층 가정에서 크게 주목했으며, 여가 활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한 점, 그리고 당시의 ‘마이카 붐’ 등에 힘입어 이상적인 ‘가족용 자동차’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출고는 동년 12월부터 시작되었으며, 출시 첫 날인 11월 21일 하루에만 278대를 계약하는 성과를 올렸다.


코란도훼미리는 길이 4,420mm, 폭 1,680mm, 높이 1,720mm의 크기를 가졌다. 휄베이스는 2,640mm에 전후 오버행은 각각 780/1,000mm였으며, 최저지상고는 200mm에 최소회전반경은 5.7m였다. 출시 초기 코란도훼미리는 이스즈의 2.3리터 엔진을 사용했다. 엔진 최고출력은 73마력, 최대토크는 14.2kg.m의 성능을 냈고, 변속기는 수동 5단을 기본으로, 후에 자동3단 변속기가 추가되었다. 구동방식은 저속트랜스퍼케이스를 갖춘 후륜구동 기반의 파트타임 사륜구동을 사용했다.

(사진: 쌍용자동차)
(사진: 쌍용자동차)
(사진: 쌍용자동차)
(사진: 쌍용자동차)

쌍용자동차 코란도훼미리는 1인당 국민 소득이 4천 달러를 넘어서기 시작한 1989년도부터 인기리에 판매되기 시작했다. 당시를 기준으로 출고 대기기간이 3~4개월에 달했을 정도였다. 이 당시 언론에서는 이와 같은 형태의 자동차를 ‘패밀리차’ 혹은 ‘다목적차’ 등으로 불렀는데, 이 시기를 전후하여 국내에서는 SUV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기 시작했고 그 선봉에는 바로 코란도훼미리가 있었다. 코란도훼미리의 좌석 배치는 5인승을 기본으로 했다. 또한, 1989년에는 저렴한 가격을 내세운 아시아자동차의 록스타 등에 대응하기 위해 가격을 900만원대로 낮춘 보급형 모델도 출시했다.

(사진: 쌍용자동차)
(사진: 쌍용자동차)
(사진: 쌍용자동차)
(사진: 쌍용자동차)
(사진: 쌍용자동차)
(사진: 쌍용자동차)

코란도훼미리는 1991년, 디자인을 일부 변경했다. 변경점은 라디에이터 그릴과 헤드램프였다. 한층 대형화되고 현대적인 스타일로 다듬어진 반투명 헤드램프와 크롬 라디에이터 그릴로 화려하게 멋을 냈다. 실내 디자인도 일부 변경하여 상품성을 보강했다. 하지만 이 시절 쌍용자동차는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엔진이 없었던 데다, 그 엔진을 대우자동차에서 공급받고 있었던 이스즈제 엔진이 대우중공업 노사분규로 인해 공급이 끊기면서 거의 두 달 가까이 생산이 중단되었다. 이 때문에 쌍용자동차는 엔진 공급사를 애타게 찾아 다녀야 했고 이러한 이유로 같은 해에 새롭게 이스즈의 2.6리터 가솔린 엔진과 푸조의 2.5리터 디젤 엔진을 도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같은 해, 코란도훼미리에게 희대의 라이벌이 등장했다. 바로 현대정공에서 미쓰비시 파제로를 라이센스 생산한 갤로퍼였다. 현대정공 갤로퍼는 출시 첫 해 10월부터 12월까지의 3개월간 무려 3천대 가까이를 팔아 치우며 쌍용자동차와 아시아자동차가 양분하고 있었던 SUV 시장을 무서운 기세로 파고 들기 시작했다.

(사진: 쌍용자동차)
(사진: 쌍용자동차)

물론 쌍용자동차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1992년 하반기, 쌍용자동차는 훗날 무쏘에 쓰이게 될 3중구조 강철 프레임과 독자개발한 5링크 서스펜션을 선행 적용한 1993년형 코란도훼미리를 출시했다. 이 뿐만 아니라 차동제한장치(LSD)와 동급 최초의 연료 잔량 경고 기능 및 전자제어 경보장치를 적용하는 등 상품성 개선에 힘썼다.

(사진: 쌍용자동차)
(사진: 쌍용자동차)

쌍용자동차는 이미 1991년도부터 코란도훼미리로 파리-다카르 랠리에 출전했다. 그리고 1993년부터는 정식으로 참가하기 시작하여 1994년에 대한민국에서 만들어진 자동차 중 최초로 파리-다카를 랠리를 완주하며, 쌍용자동차의 이미지를 제고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사진: 쌍용자동차)
(사진: 쌍용자동차)
(사진: 쌍용자동차)
(사진: 쌍용자동차)

코란도훼미리는 1993년 신형 SUV 차종인 무쏘가 출시된 이후에도 무쏘와 병행생산되었다. 코란도훼미리는 무쏘보다 하위급에 위치하는 모델로 포지셔닝이 변경되었으며,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는 다목적차로 시장에 어필했다. 또한 이 때부터 코란도훼미리에는 2인승 밴 모델이 추가되었으며, 1994년에는 아예 무쏘에서 사용하던 메르세데스-벤츠의 2.3리터 디젤엔진까지 얹는 등, 큰 변화를 겪었다. 1994년부터 만들어진 코란도훼미리는 차명이 이 때부터 ‘뉴 훼미리’로 변경되었고, 2인승 밴 모델과 6인승 모델, 그리고 승합차로 분류되는 9인승 모델까지 추가하며 1996년까지 판매되다 단종을 맞았다.

(사진: 쌍용자동차)
(사진: 쌍용자동차)
(사진: 쌍용자동차)
(사진: 쌍용자동차)

쌍용자동차의 코란도훼미리는 비록 설계 기반이나 파워트레인 등 핵심 기술들은 외국 기업의 손을 빌릴 수 밖에 없었지만, 당대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가장 혁신적인 시도를 한 자동차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코란도훼미리를 통해 얻은 경험은 훗날 무쏘와 렉스턴 등을 설계하는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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