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자동차 산업의 초기, 자동차는 당시로서는 중산층 이상의 계층에서나 구매할 수 있는 매우 고가의 제품이었다. 현대자동차가 독자모델 포니를 양산하기 시작한 1975년도 이후의 시점에서도 자동차는 경제력이 뒷받침되는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 이용할 수 있었던 운송수단이었다. 지금도 우리나라가 자동차를 일종의 '자산'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남아 있는 것도 과거부터 이렇게 자동차를 부의 상징으로서 바라보는 시선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970년대는 빠른 경제 성장과 더불어 고급 승용차 시장이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여기에 1978년 상공부의 6기통 자동차 생산 제한 조치가 해제됨과 더불어 노후화된 관용차량 교체수요가 발생하면서 고급 자동차에 대한 수요가 늘기 시작한 것. 이에 현대자동차는 포드 그라나다로, 새한자동차는 GM과의 연계를 통해 들여 온 오펠 레코드로 고급 승용차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기아자동차도 끼어 들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당시 기아자동차는 마땅히 시장에 내놓을 만한 고급 승용차 모델이 전무했다. 기아자동차는 일본 토요공업(現 마쯔다)과 기술제휴 관계에 있었으나, 이 당시 토요공업을 통해 들여오고 있었던 차종은 주로 중소형 상용차종에 국한되어 있었고, 승용차 모델은 브리사와 당시 인수한 아시아자동차에서 생산한 이탈리아 피아트(FIAT)의 132 정도가 전부였다. 이러한 가운데 기아자동차가 들여 온 차가 바로 푸조 604였다.
푸조 604는 푸조가 제 2차 세계대전 이전에 만들었던 601 이래 처음으로 새로 개발한 대형 고급 승용차다. 이 차는 1975년 제네바 모터쇼에 처음 공개되었고, 동년 9월부터 유럽 시장에 판매를 개시했다. 이 차는 미국 시장에도 수출되었던 몇 안 되는 푸조의 양산차이기도 했다. 이 차는 독일 BMW나 메르세데스-벤츠의 고급 승용차와 경쟁하기 위해 개발된 차량이기도 하다.
푸조 604의 스타일링은 페라리의 스타일링을 맡았던 것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유서깊은 카로체리아 '피닌파리나(Pininfarina)'의 작품이다. 당시의 트렌드이자, 피닌파리나의 주특기이기도 한, 직선적인 기조의 스타일링으로 늘씬하고도 세련된 이미지를 잘 표현해 냈으며, 단정하고도 중후한 이미지의 대형 세단으로 빚어졌다. 전반적으로 당대의 독일제 고급 승용차들을 강하게 의식한 스타일이 도드라지는 특징이다.
또한 기나긴 보닛과 당당하게 앞으로 뻗어 있는 앞바퀴에서 이 차가 후륜구동 자동차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은 후륜구동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푸조지만, 이 당시만 해도 후륜구동 자동차를 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푸조 604는 길이 4,720mm, 폭 1,770mm, 높이 1,430mm의 크기를 가졌으며, 휠베이스는 2,800mm에 달했다. 당시 기준으로 대형세단에 걸맞은 체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역시 독일제 고급 세단을 의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내 또한 수평기조를 중심으로 하는 대시보드를 중심으로 간결하면서도 기능적인 면을 중시하는 형태로 짜여져 있었다. 물론, 장식적인 요소를 상대적으로 적극적으로 사용한 포드 그라나다나 새한 레코드와는 다소 다른 느낌이었지만, 실내에 붙여 둔 604 엠블럼과 더불어, 고급 내장재를 사용하여 실내 분위기를 고급스럽게 꾸몄다. 마감 처리도 당시 기준으로 우수한 편에 속하는 것은 물론, 대시보드에 내장된 잠금장치와 전좌석 파워윈도우를 갖추고 있었다.
엔진은 푸조와 르노자동차, 그리고 스웨덴의 볼보자동차의 3개사가 공동개발한 'V6 PRV(V6 Peugeot-Renault-Volvo)' 가솔린 엔진을 탑재했다. PRV 엔진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설계사상이 적용된 엔진으로, 다양한 사양으로 제작되어, 3개사의 중대형 차종에 두루 적용되었다. 이 엔진은 보다 나중에 등장한 푸조의 중형세단 504에도 적용된 것은 물론, 훗날 쌍용자동차를 통해 대한민국에 최초로 진출한 르노 자동차인 르노 25, 그리고 르노 산하의 스포츠카 브랜드알핀(Alpine)의 GTA(A610)에도 적용된 바 있다. 심지어 이 엔진은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도 사용되었다.
푸조 604에 탑재된 V6 PRV 엔진은 2.7리터 사양과 2.9리터 사양이 탑재되었다. 이들 중 국내에 출시된 2.7리터 사양은 134마력/5,750rpm의 최고출력과 21.1kg.m/3,500rpm의 최대토크를 발휘했다. 이 엔진은 듀얼 카뷰레터(기화기) 시스템이 적용되여 종래의 승용차 대비 한층 정숙하면서도 여유로운 동력성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또한 대용량의 디스크브레이크를 적용하여 제동 성능도 당대 고급 세단들 중에서도 뛰어났다고 평가되고 있었다.
기아자동차는 1979년 3월, 이 푸조 604를 "뿌조 604"라는 이름으로 전격 출시하며 고급 승용차 시장으로의 진출을 선언했다. 이 당시 기아자동차에서는 이 차를 직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 푸조로부터 라이센스 생산계약을 맺고 이 차를 생산했다.
하지만 이렇게 야심차게 출시한 기아자동차의 첫 고급 승용차는 처참한 실패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먼저 차량의 가격이 문제였다. 1979년 당시 기준으로 푸조 604의 가격은 2,300만원에 달했다. 이는 당시 국내에서 가장 비싼 가격이었다. 1979년 당시 대치동 은마아파트의 분양가가 대략 2천만원이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집이 굴러다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1978년 말, 오일쇼크로 인해 장관급 관용차를 4기통으로 제한하면서 사전에 푸조 604를 계약한 물량이 줄줄이 취소되는 사태마저 벌어지기 되었다. 이 때문에 기아의 푸조 604와 현대의 포드 그라나다는 고급승용차 시장에서 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심지어 1981년도에 들어가면, 신군부 정권의 폭거인 '자동차공업 통합조치'로 인해 기아자동차가 승용차 생산이 불가능하게 되어, 단 3년도 되지 않아서 강제로 단종을 맞고 말았다.
기아자동차가 생산한 푸조 604는 워낙 고가였던 데다가, 당시 정부의 정책 등으로 받은 불이익으로 인해 현대자동차의 포드 그라나다보다도 훨씬 적은 수량만이 판매되었다. 국내에 남아있는 차량은 손에 꼽는 수준이라고 전해진다. 반면, 고향인 프랑스에서는 최초 등장한 1975년도부터 1985년도까지 10년에 걸쳐 생산되었으며, 프랑스의 20대 대통령을 지낸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Valéry Giscard d'Estaing) 前대통령은 그동안 의전 차량으로 사용해 왔던 시트로엥 DS를 이 차로 대체하여 오랫동안 사용했다.
1978년도에는 푸조 604의 또 다른 변형 모델도 출시되었다. 바로 프랑스의 카로체리아 윌리에즈(Heuliez)가 제작한 롱휠베이스/리무진 모델이다. 이 모델은 당시 프랑스의 고위층과 기업가들을 중심으로 판매가 이루어졌다. 이 차는 푸조 604의 휠베이스를 170~250mm 늘려 제작한 VIP용 롱휠베이스 모델, 그리고 휠베이스를 620mm까지 연장한 스트레치드 리무진 사양이 존재했으며, 1984년도가지 약 160여대의 차량이 판매되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