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래 인류는 셀 수도 없이 다양한 종류의 무기를 만들고 사용해 왔다. 그 중에서도 총기의 발명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전쟁은 물론, 마침내 인간을 먹이사슬의 정점에 올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총기 역사의 초기에는 한 사람이 다룰 수 있는 작은 크기의 화포에서 시작한 총기는 수 백년의 역사동안 끊임없이 진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총기가 전장의 주역을 꿰어 찬 이래로 총기는 전장과 민간을 아우르는 다양한 요구에 따라 변형 및 발전해 왔다.
총기의 발전사는 '격발 방식'에 따라서 정리된다. 금속제 탄피가 등장하기 전까지의 수 백년 동안 인류는 '화약에 어떻게 불을 붙일 것인가'를 고민해 왔기 때문이다. '뇌관'과 '금속제 탄피'가 일반화되어 있는 오늘날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지금의 형태가 정립된 것은 19세기 후반에 와서야 가능했던 이야기다. 초기의 화약 무기는 탄환과 화약을 총/포구로 장전하는 전장식(Muzzleloader)이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추진용 화약과 점화용 화약, 그리고 탄환을 따로따로 잴 수 밖에 없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대체 이 '쇠 막대기'를 어떻게 해야 '불 막대기'로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과 시행착오, 그리고 혁신에 대한 이야기다.
대포를 줄여보자 - 핸드캐논
총기는 인류 역사에서 화포가 등장한 지 한참 지난 15세기 경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최초의 총기는 '핸드 캐논(Hand Cannon, Handgonne)'이라고 불렸다. 핸드 캐논은 말 그대로 '손에 들 수 있을 정도로 작게 줄인 대포'였다. 그리고 크기만 작을 뿐, 작동 방식은 전장식 대포와 다를 것이 없었다. 당시의 대포는 아무리 경량급이라도 최소 3명 이상이 함께 운용해야 했는데, 이 구조를 그대로 가져왔고, 심지어 이 3명의 역할을 병사 1명이 수행해야 했다. 따라서 사용이 매우 불편했다. 추진용 화약과 점화용 화약, 그리고 탄환을 모두 따로따로 총신 내에 재어야 했고, 개머리판도 없었기 때문에 발사시의 반동과 충격도 제어할 수 없었다.
한편 동양에서는 서구권에서 핸드 캐논이 나타나기 이전부터 비슷한 형태의 무기를 개발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바로 중국의 화전(火箭)이나 고려의 주화(走火)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주화나 화전은 총포류로 취급되지 않는다. 주화나 화전은 화약이 연소하면서 생기는 가스의 힘으로 가속시킨 탄자의 '운동에너지'를 이용하지 않고, 화약 그 자체를 추진제로 사용하는 '휴대용 로켓 병기'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핸드 캐논은 총기의 기본 원리로 작동하는 최초의 개인용 화기로 취급된다. 비록 그 구조는 조악하기 이를 데 없지만 화약이 연소하면서 생기는 가스의 힘으로 가속시킨 탄자의 '운동에너지'를 이용하여 목표물을 타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총기의 역사는 이 문제 투성이인 핸드 캐논을 하나하나 고쳐나가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자나깨나 불 조심! - 화승총(Matchlock)
초창기 핸드 캐논은 구식 화포와 동일하게, 불 붙은 심지를 약실에 가져다 대어 격발시키는 '터치 홀' 방식으로 격발했다. 하지만 이러다 보니 사람 1명이 조작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16세기를 전후하게 되면 이 붙 붙은 심지를 고정하는 장치와 함께, 석궁에서 사용하는 방아쇠 구조가 접목된 '화승총(Matchlock)'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격발기구의 개발은 총기 운용에서 큰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다. 방아쇠가 생긴 덕분에 사수는 목표물을 바라보면서 총을 겨눌 수 있게 되었고, 방아쇠를 이용해 이론 상 원하는 시기에 격발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혁신 덕분에 총기는 유럽에서 조금씩 전쟁 병기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총기는 1525년 벌어진 파비아 전투를 전후하여 군대의 무기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화승총으로 무장한 스페인 총병대가 고도로 훈련된 프랑스 기사대를 물리치며 그 막강한 위력을 과시했던 것이다.
또한, 화승총은 활에 비해 숙련되는 데 시간이 압도적으로 적게 들었기 때문에 파비아 전투를 전후로 유럽 각국은 너도나도 총병대를 확보하는 데 몰두했다. 숙련된 궁수를 양성하는 데에는 1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활은 당기는 데에 상당한 근력을 필요로 했고, 정확하게 명중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승총은 단 몇 주면 무기의 사용법을 익힐 수 있었다. 조선 후기, 조총을 두고 "어린아이도 항우를 능히 대적할 수 있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파비아 전투 이후인 16~17세기는 화승총의 전성시대였다. 이 당시 화승총은 주로 '아퀘버스(Arquebus)'와 '머스킷(Musket)'의 두 가지 종류로 나뉘었다. 아퀘부스는 '휘어진 총'을 의미하며, 개머리판이 없이 휘어진 형태의 손잡이가 존재하는 구조였다. 약 1m 내외의 길이와 5kg 가량의 무게를 가지며, 구경은 머스킷에 비해 작은 50구경(약 13mm) 내외의 탄환을 사용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이 사용했던 조총(鳥銃)이 아퀘버스의 일종이다.
머스킷은 아퀘버스에 비해 훨씬 대형의 총기로, 약 1.4m 내외의 길이와 7kg 가량의 무게에 75구경(약 19mm) 내외의 납 탄환을 사용했다. 화승총 시대의 머스킷은 워낙 크고 무거웠기 때문에 반동 제어를 위해 개머리판에 더해 별도의 거치대까지 사용해야 했다. 16세기 경 등장한 개머리판은 조준선을 시선과 일치시켜 주는 역할을 해 줌으로써 총기의 명중률을 높히는 역할을 했다. 여담으로 머스킷 총 사수는 16~17세기의 군대에서 가장 후한 대접을 받았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에 등장하는 총사대(Musketiers, 머스킷티어)는 아예 프랑스 국왕의 '친위대'였을 정도로 엘리트 집단이었다.
라이터가 왜 거기서 나와? - 치륜식(Wheellock) 총
하지만 16~17세기에는 화승총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화승총은 핸드 캐논 대비 한층 진보된 무기였지만 여전히 문제점들이 산적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는 바로 불이 붙어 있는 심지(화승)를 꺼지지 않게 유지하는 일이었다. 이 당시 사용했던 화승은 전투 중에 한 번 꺼지게 되면 불이 다시 불을 붙일 방법이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화승의 불 관리는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이는 항상 살아 있는 불씨를 들고 다니는 것과 같아서 야습은 고사하고 주간에 매복작전을 하기도 어려웠으며, 비라도 오는 날에는 값비싼 몽둥이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화승총보다 조금 늦게 나타났지만, 화승총의 시대에서 화승총과 꽤나 오랫동안 공존하던 격발 방식이 있다. 바로 치륜식(Wheellock)이다. 치륜식은 작은 톱니바퀴와 부싯돌 사이의 마찰에서 발생되는 불꽃을 이용해 격발하는 방식이다. 즉, 현대의 일회용 라이터와도 유사한 방식이다. 차이가 있다면, 일회용 라이터는 톱니바퀴를 사람의 손가락으로 직접 돌리지만, 치륜식 총은 태엽으로 톱니바퀴를 돌린다는 차이가 있다. 태엽을 감아 놓은 총기의 방아쇠를 당기면 톱니바퀴가 힘차게 돌면서 불꽃을 일으켜 장약을 점화시키는 것이다. 이 덕분에 치륜식은 화승총이 가지지 못한 '즉응성'과 '은밀함'을 모두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특성 덕분에 치륜식은 미리 탄약을 장전한 상태라면 한 손으로도 총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치륜식 총기는 '기병'을 위한 무기로 제격이었다. 하지만 이 방식은 구조가 너무 복잡해 당시의 공업능력으로는 대량생산이 불가능해 가격이 지나치게 비싸서 대량 보급이 불가능했다. 또한 부싯돌로 사용되는 황철석이 매우 고급품이었기 때문에 치륜식 총들은 그 자체로도 고가품이었다. 복잡한 구조 때문에 신뢰성에도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17세기를 전후하여, 화승총과 치륜식 총의 단점을 모두 대체한 혁신이 이루어지면서 이 두 방식은 나란히 사장길에 오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