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녹록치 않았던, 기아 플래그십 세단의 42년사
상태바
결코 녹록치 않았던, 기아 플래그십 세단의 42년사
  • 모토야
  • 승인 2021.06.03 18:13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아는 창사 초기, 승용차보다는 중소형 상용차를 중심으로 자동차 사업을 전개했다. 기아산업 시절, 일본 토요공업(現 마쓰다주식회사)으로부터 라이센스를 받고 생산한 기아마스타 K360 삼륜차가 대표적인 예다. 

그러던 기아산업이 플래그십 세단을 갖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정답은 1970년대 후반부터다. 1978년 상공부의 6기통 자동차 생산 제한 조치가 해제됨과 더불어 노후화된 관용차량 교체수요가 발생하면서 고급 자동차에 대한 수요가 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현대자동차는 포드 그라나다로, 새한자동차(舊 대우자동차, 現 한국지엠)는 GM과의 연계를 통해 들여 온 오펠 레코드로 고급 승용차 시장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리고 여기에 기아자동차도 한 몫 끼어 들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1970년대 말, 고급승용차 시장에 진출할 방법을 찾고 있었던 기아산업은 사실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다. 당시 기아산업은 일본 토요공업과 기술제휴 관계에 있었으나, 이 당시 토요공업을 통해 들여오고 있었던 차종은 주로 중소형 상용차종에 국한되어 있었고, 승용차 모델은 브리사와 당시 인수한 아시아자동차에서 생산한 이탈리아 피아트(FIAT)의 132 정도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기아산업은 현대 그라나다나 새한 레코드와 마찬가지로, 유럽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는 고급 승용차종을 물색하게 되었고, 이 때 출시하게 된 차가 바로 당시 프랑스 푸조의 플래그십 세단인 604였다. 그리고 이 푸조 604를 시작으로 기아 플래그십 럭셔리 세단의 역사가 시작된다.

뿌조 604(1979~1981)
푸조 604는 푸조가 제 2차 세계대전 이전에 만들었던 601 이래 처음으로 새로 개발한 대형 고급 승용차다. 이 차는 독일 BMW나 메르세데스-벤츠의 고급 승용차와 경쟁하기 위해 개발된 차량으로, 미국 시장에도 수출되었던 몇 안 되는 푸조의 양산차이기도 하다. 기아산업은 이 차를 OEM 방식으로 생산하기로 했고, 1979년 국내 시장에 '뿌조 육백사(604)'라는 이름으로 출시했다. 기아산업을 통해 국내에 출시된 푸조 604는 V6 2.7리터 PRV 가솔린 엔진을 탑재했다. 이 엔진은 듀얼 카뷰레터(기화기) 시스템이 적용되여 종래의 승용차 대비 한층 정숙하면서도 여유로운 동력성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또한 대용량의 디스크브레이크를 적용하여 제동 성능도 당대 고급 세단들 중에서도 뛰어났다고 평가되었다.

하지만 야심차게 출시한 기아자동차의 첫 고급 승용차는 처참한 실패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집이 굴러다니는' 수준의 지나치게 비싼 가격과 1978년말 오일쇼크를 전후하여 관용차에 4기통 제한이 붙는 바람에 그나마 있던 계약마저 줄줄이 빠져나가며 판매량이 바닥을 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신군부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내 자동차 산업의 '교통정리'를 명목으로 자행한 '자동차공업 통합조치'로 인해 승용차 생산이 불가하게 되어, 결국 출시한 지 단 3년도 되지 않아 단종을 맞고 말았다.

머큐리 세이블(1986~1995)
푸조 604의 실패를 뒤로하고, 자동차공업통합조치 시절의 암흑기를 거쳐 다시금 승용차 생산이 가능하게 된 기아자동차는 미국 포드자동차와의 제휴로 프라이드(포드 페스티바)를 생산하고 이 차가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재기의 원동력을 찾게 된다. 그리고 프라이드의 성공을 지켜 본 포드자동차는 자사의 양산차가 한국 시장에 판매되지 않았기에, 기아자동차에게 일종의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들이밀었다. 그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 바로 머큐리 세이블이다.

머큐리(Mercury)는 포드자동차의 준 고급 브랜드에 해당하는 브랜드로, 대형세단을 위주로 하는 라인업을 꾸리고 있었다. 마치 GM 산하의 뷰익과도 같은 포지션이라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머큐리 세이블(Sable)은 미국 시장에서 포드 토러스의 고급화 버전으로 통하는 모델이었으며, 미래지향적인 외관 및 실내 디자인과 준수한 품질 및 성능으로 인기를 얻고 있었던 모델이다.

기아자동차는 1989년도부터 머큐리 세이블을 OEM 방식으로 생산하여 국내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머큐리 세이블은 권위적인 스타일의 일본식 고급세단에 익숙했던 국내 시장에서 마치 SF영화에서 튀어 나온 것만 같은 미래지향적/공기역학적 스타일링과 더불어, 풍부한 편의장비, 그리고 국산차에 근접한 가격대와 기아자동차의 서비스 망을 이용할 수 있었던 장점들이 더해져, 수입차로서는 최초로 연간 1천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는 신기록을 세웠다. 세이블은 1995년도까지 기아자동차에서 계속 생산되었으며, 1992년 포텐샤의 등장으로 플래그십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포텐샤(1992~2002)
하지만 기아자동차는 세이블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다. 90년대 들어 승용 라인업의 재건에 몰두하고 있었던 기아자동차는 자사만의 고유모델을 원하고 있었고 이에 일본 마쓰다주식회사와 협력하여 새로운 후륜구동 고급세단 모델을 선보이게 되는데, 이 차가 바로 포텐샤(Potentia)다.

1992년에 등장한 포텐샤는 마쓰다의 고급 중형세단 루체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마쓰다 루체는 오너드라이버 지향의 고급 세단으로, 주행질감을 중시했던 마쓰다의 전통적인 설계사상이 그대로 녹아 있는 차였다. 루체를 기반으로 개발된 포텐샤는 국내 고급세단 시장의 성향에 맞춘 디자인 변경과 더불어, 강력한 성능을 내는 2.2리터 가솔린 엔진과 그랜저의 싸이클론 엔진을 뛰어넘는 성능의 3.0리터 V6 엔진을 탑재해 '성능'을 중시하는 기아 다운 면모를 뽐냈다. 여기에 차의 크기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국내 시장의 성향을 감안해 차체 길이를 대폭 늘려, 현대차의 2세대 뉴 그랜저 보다 더욱 긴 차체를 달성했다.

하지만 포텐샤는 세이블과는 달리, 크게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뒷좌석의 VIP를 위한 대형세단을 중시했던 국내 시장의 정서와는 다소 맞지 않는 차종이었던 데다, 경쟁자들이 포텐샤의 출시 이듬해 현대 다이너스티, 대우 아카디아 등등의 쟁쟁한 신차들을 줄줄이 등장하면서 고급세단으로서의 가치가 급속하게 퇴색되어 버린 탓이다. 기아자동차는 포텐샤의 부진을 거울삼아, '진짜배기' 럭셔리 세단을 준비하게 된다.

엔터프라이즈(1997~2002)
포텐샤가 시장에서 부진을 면치 못하게 됨에 따라, 기아자동차는 보다 크고, 보다 강력하며, 보다 호화로운 대형세단을 원하게 되었다. 이에 기아자동차는 포텐샤의 기술적 토대를 제공해 주었던 마쓰다와 다시금 협력하여 완전히 새로운 모델을 내놓는데, 이 차가 바로 엔터프라이즈(Enterprise)다. 

기아 엔터프라이즈는 마쓰다의 최고급 대형 세단 센티아(Sentia)의 2세대 모델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차다. 엔터프라이즈의 모태가 되는 마쓰다 센티아는 2세대 모델로, 당시 일본 내수시장에서도 현역으로 뛰고 있었던 최신 차종이었다. 기아는 센티아에도 포텐샤를 개발할 때와 같은 방법론을 적용했다. 더욱 권위적이고 화려하고 장식적인 면을 강조하는 외관으로 손을 보고, 뒷좌석의 편의장비 또한 크게 강화해 고급세단으로서의 가치를 높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 놈의 '타이밍'이 문제였다. 엔터프라이즈는 1997년 3월에 출시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개발일정이 지연되면서 당초 목표한 1월에 비해 2개월 늦어진 것이었다. 게다가 동년 7월 기아자동차가 부도를 맞게 되면서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설상가상으로 출시 반 년을 갓 지난 시점에서 '벤츠 기술'을 등에 업고 태어난 쌍용자동차 체어맨과 맞붙어야 했고, 동년 하반기 한국전쟁 이래 최악의 국난(國難)으로 기록된 1997년 외환위기가 비로소 현실로 다가오면서 엔터프라이즈의 앞길에는 먹구름만 잔뜩 끼었다.

물론 이러한 악재 속에서도 엔터프라이즈는 생산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1999년, 현대자동차가 절치부심 끝에 준비한 '초대형 세단' 에쿠스까지 등장하며 관짝에 못이 박히게 된다. 물론 2001년도에 상품성을 개선한 마이너체인지 모델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강대한 경쟁자들을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한 2000년대 들어 새롭게 제정된 배기가스 규제를 충족시키지 못하여, 2002년 쓸쓸히 단종을 맞는다.

오피러스(2003~2011)
엔터프라이즈의 단종 이래, 기아자동차의 플래그십 세단은 한동안 공백 상태였다. 기아차는 현대자동차에 인수되기 이전에 엔터프라이즈의 형제차종으로 또 다른 고급 세단(프로젝트명 SJ)를 개발하고 있었는데, 현대자동차가 기아차를 인수하게 되면서 일본 마쓰다와의 제휴관계가 끊기는 바람에 개발이 중단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반면 현대자동차는 다이너스티의 후속차종으로서 프로젝트명 'GH'를 새롭게 개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기아 차종으로 출시했는데, 이 차가 바로 오피러스다.

오피러스는 그랜저 XG의 플랫폼을 기반으로 개발된 전륜구동 대형세단이다. 항간에는 다이너스티의 플랫폼을 유용하여 개발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그랜저 XG의 것을 활용했고, 2006년도의 페이스리프트를 전후하여, 차세대 그랜저(TG)의 플랫폼으로 변경되었다. 외관 디자인은 출시 초기부터 자동차 관련 미디어를 중심으로 상당히 부정적인 반응이 나타났다. "재규어를 어설프게 닮았다"는 비교적 온건한 반응은 물론, 그 특유의 라디에이터 그릴을 두고 "생선 뼈" 내지는 "매미 같다"는 등으로 조롱 당하기도 했다. 판매량 역시 신차임에도 신통치 못했다. 또한 대형과 준대형 사이에 끼어 있는 애매한 포지셔닝으로도 말이 많았다.

하지만 2006년, 그랜저 TG의 플랫폼으로 갈아입고 외관 디자인을 일신한 뉴 오피러스부터는 이야기가 크게 달라졌다. 오피러스 고유의 기조를 잘 살리면서도 한층 완성도가 높아진 외관 디자인은 초기형 오피러스에 씌워진 '비호감' 이미지를 탈피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됐으며, 그랜저 TG 플랫폼의 채용과 함께 신형 파워트레인의 적용, 그리고 130kg에 달하는 경량화를 달성하면서 주행 성능과 질감도 대폭 향상되는 등, 거의 '다른 차'가 되었다. 이렇게 달라진 오피러스는 현대자동차의 초대 제네시스(BH)와 더불어, 좋은 반응을 이끌어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9년에 또 한 번의 페이스리프트를 거치며 완성도가 더욱 향상되었고, 2011년까지 생산이 이루어졌다. 해외 시장에서는 아만티(Amanti)라는 이름의 대형세단으로 판매되었다.

K9(1세대, KH, 2012~2018)
기아자동차의 플래그십 세단인 오피러스가 단종된 지 1년여 만인 2012년, 기아자동차는 새로운 플래그십 세단 'K9'을 론칭했다. K9은 에쿠스의 후륜구동 플랫폼을 기반으로 개발한 기아자동차의 새로운 최고급 대형세단이다. 포지셔닝에 대해 논란이 있었던 오피러스와는 달리, 이 차는 명실상부한 F세그먼트급 후륜구동 대형 세단으로, 사실 상 이 차를 엔터프라이즈의 직계 후속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K9은 기존의 오피러스와는 다른 후륜구동계의 채용과 더불어, 고급 승용차 시장의 트렌드를 따른 외관과 다양한 최신 안전장비 등을 통해 후기형 오피러스가 거뒀던 만큼의 실적을 올려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하지만 시장에서의 반응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오피러스 만큼이나 애매한 포지셔닝과 더불어, 경쟁력 있는 옵션을 모조리 상위트림에 몰아 넣은 부실한 상품 구성, 그리고 '디자인 기아'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저평가 받은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요소가 겹쳐 그다지 성공적인 실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K9(2세대, RJ, 2018~현재)
초대 K9의 뒤를 이어 나타난 현행의 2세대 K9은 제네시스 라인업에 사용되는 후륜구동 플랫폼을 기반으로 개발되었다. 2세대 K9은 한층 고급스러워진 외관 디자인과으로 화제를 모았으며, 상품구성을 완전히 일신하는 등, 절치부심으로 준비한 모델이다. 아울러 출시 당시 국산차종 중 가장 고등한 단계의 자율주행 기술을 선보인 모델이기도 하다.

2세대 K9은 초대 모델과는 달리 나름대로 쏠쏠한 실적을 거두었다. 이미 제네시스라는 이름의 국산 고급브랜드가 등장한 데다, 수입 고급세단과 국산 고급 세단 간의 가격 격차가 좁혀지면서 수입 고급 세단과 제네시스 브랜드 사이를 공략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취한 것이다. 이를 위해 상품구성을 크게 변화시켜 중급 정도의 트림에서도 경쟁력 있는 상품구성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K9은 수입 E세그먼트 세단과 제네시스 G80의 가격에 만날 수 있는 합리적인 고급 대형 세단으로 접근하는 전략을 취했고, 이러한 전략이 먹혀들면서 기존의 기아 고급 세단들과 비교했을 때 뉴 오피러스 이래 가장 흥행한 대형 세단이 되었다.

또한 최근에는 대대적인 페이스리프트를 거친 신모델이 발표되었다. 새로워진 K9은 다양한 안전운전 지원 기능과 더불어 향상된 기능의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기아 페이 등의 다양한 안전/편의사양을 제공한다. 디자인 역시 기존보다 한층 수평기조에 충실한 새로운 디자인을 적용하여 고급세단으로서의 중후한 멋을 살렸다. 여기에 더욱 개선된 내부 소재와 다채로운 편의장비를 적용해 고급세단으로서의 가치를 높였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ㅇㅇ 2021-06-10 11:24:12
신형 디자인은 왜저러냐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