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과거에는 고위층과 부유층의 상징이었고, 가까운 과거에는 성공한 중산층을 상징했던 현대자동차의 그랜저는 이제 '국민차'의 반열에 올랐다고 봐도 무방하다. 2010년대 후반 들어 그랜저의 판매량이 자타공인 국민차였던 쏘나타를 추월하기 시작하더니, 최근 몇 년간, 가장 많이 판매된 승용차종으로 우뚝 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1986년 첫 등장 이래 지금까지 국산 준대형~대형 세단 시장에서 부동의 1위 자리를 줄곧 지켜 온, 진정한 챔피언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그랜저의 등장에 가장 위기감을 느꼈던 제조사는 당연하게도, 로얄 시리즈로 시장을 틀어쥐고 있었던 대우자동차였다. 그랜저의 등장에 위기감을 느낀 대우자동차는 기존 로얄 시리즈의 고급화 가지치기 모델인 수퍼살롱을 출시하는 한 편, 오펠의 모트로닉 직렬 6기통 엔진을 탑재한 최고급 세단 임페리얼까지 출시하는 등, 그랜저의 시장 점유를 막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하지만 대우자동차의 세단 전성시대가 막을 내리는 것은 끝내 막을 수 없었다.
급기야 대우자동차는 일본 혼다기연공업(이하 혼다)의 플래그십 세단, 레전드(Legend)를 라이센스 생산한 아카디아(Arcadia)까지 선보이게 된다. 아카디아는 당대 국내에서 만들어진 대형세단 중 가장 선진적이고 진보된 세단이었다. 하지만 아카디아 역시, 그랜저의 아성을 넘지 못했다. 초기 품질 문제와 더불어 국내 조립생산 차량임에도 지나치게 높은 가격 등이 발목을 잡았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현대자동차가 1996년, 그랜저보다 윗급에 위치하는 다이너스티를 내놓기 시작했고, 다음 해인 1997년에는 메르세데스-벤츠의 기술제휴를 등에 업은 쌍용자동차가 '체어맨'을 내놓는 등, 국내 대형세단 시장의 경쟁이 과열되는 양상으로 흘러갔다. 게다가 1997년 하반기 불어닥친 외환위기를 전후하여 대기업들 간의 인수합병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대우자동차가 쌍용자동차를 인수, 당대 대형세단 시장의 슈퍼스타였던 체어맨을 손에 넣게 되자, 아카디아는 말 그대로 '버리는 카드'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이후로 대우 그룹이 막대한 부채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해체되면서 대우자동차는 GM의 산하로 넘어가, ‘지엠대우오토앤터크놀로지(이하 GM대우)’가 출범하고 쌍용자동차가 분리 독립하는 과정에서 대우자동차는 한동안 대형세단을 가지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한편, 현대자동차는 이미 시장에서 굳건하게 자리잡힌 '그랜저'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끌어 내리려 했다. 지금에 와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현대자동차는 1995년에 고급 중형세단 마르샤(Marcia)를 내놓은 이래 그랜저 브랜드를 점진적으로 폐기할 예정이었다. 다이너스티의 출시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일이었고, 1999년, '초대형 세단' 에쿠스(EQUUS)를 내놓으면서 완전히 폐기 수순을 밟으려 했다.
하지만 이러한 현대자동차의 계획은 이미 시작부터 큰 차질이 생긴 상태였다. 야심차게 준비한 고급 중형세단 마르샤가 시장에서 외면 받은 것이다. 그리고 마르샤의 후속차종으로 개발되고 있었던 프로젝트명 XG에 어떤 이름을 부여할지를 두고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다 현대차는 자신들이 버림패로 생각하고 있었던 그 이름, 그랜저를 붙이게 되었다. 이로써 그랜저는 대형세단이 아닌, '고급 중형세단', 내지는 오늘날의 '준대형 세단'으로 포지셔닝이 변화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대성공이었으며, 지금까지도 그랜저는 현대자동차의 플래그십 세단이자,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세단 차종으로 등극하게 된다. 이번 기사에서는 그랜저 XG 및 그 후계 차종들에 맞섰던 범 대우자동차 계열(現 한국지엠)의 차종들을 살펴본다.
GM대우 매그너스
GM대우 매그너스는 당시 자사의 중형세단 레간자가 개발이 완료될 무렵이었던 1997년도부터 개발에 착수, 슈퍼살롱 브로엄(Brougham)의 뒤를 이을 준대형세단으로 개발되었다. 매그너스는 1999년에 출시가 이뤄졌다. 따라서 고작 2년에 불과한 엄청난 속도로 개발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는 당시 대우자동차가 부분적으로 도입하고 있었던 ‘동시공학(Concurrent Engineering)’ 개념을 본격적인 단계로 적용한 첫 차였던 덕분이다. 스타일링은 라노스, 레간자 등의 스타일링을 맡았던 주지아로가 맡았다.
매그너스의 외관은 기존 레간자의 우아한 곡선을 살리면서도, 당대에 유행했던 ‘뉴 에지(New Edge)’ 경향에 부합하도록 다듬은 것이다. 이렇게 빚어진 매그너스의 외관은 부드러운 스타일링이 강조된 레간자와는 달리, 화려하고 강인하며, 남성적인 인상을 가졌으며, 당대 중형 세단들 가운데 가장 거대한 차체 크기를 가졌다. 또한 내수용과 수출용 차량의 디자인을 달리하면서 이를 국내 시장에서도 매그너스 이글이라는 이름으로 선보이는 등, 당시로서는 상당히 독특한 시도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시장 진입 초기에 받았던 관심은 2001년, 뉴 EF 쏘나타의 등장과 함께 빠르게 식어 들어갔다. 그리고 대우는 레간자를 EF쏘나타 및 옵티마급의 보급형 중형 세단으로, 매그너스를 그랜저XG에 대응하는 고급형 중형세단으로 어필했지만 시장에서는 매그너스를 그랜저 XG와 동급으로 인정해주지도 않았다. 이렇게 되자, 대우는 2000년도에 레간자를 영업용 전용 모델로, 매그너스는 일반적인 중형 세단 모델로 포지셔닝을 재조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매그너스를 진정한 고급 중형세단으로 만들어 줄, 개발이 지연되고 있었던 '새로운 심장'이 드디어 완성되면서 매그너스는 대우자동차 역사 상 손꼽히는 히트작으로 거듭났다. 바로 'L6' 엔진으로 유명한 직렬 6기통 XK엔진이 적용된 것이다. 매그너스를 날아오르게 만들어 준 이 엔진은 국내 완성차업계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한 최초의 직렬 6기통 엔진이다. 그리고 이 엔진을 품은 매그너스는 당시 볼보자동차 S80 과 함께 세계에서 단 둘 뿐인 전륜구동형 가로배치 직렬 6기통 엔진을 탑재한 차로 기록되었다.
‘L6 매그너스’는 당시 중형세단 시장에서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랜저급 이상의 고급 세단에나 적용할 수 있었던 6기통 엔진을 중형 세단의 영역까지 확장했다는 평가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한층 고급스러운 스타일로 다듬어진 외관, 그리고 2.5리터 엔진의 적용으로 준대형~중형을 아우르는 '고급형 중형 세단'으로 거듭난 것이다. 물론 시장에서는 여전히 매그너스를 그랜저 XG와 동급으로 인정해 주지 않았고, 실질적인 주력 또한 2.0이었지만, 오랫동안 GM대우의 플래그십 세단으로 기능했다.
게다가 후속 차종인 토스카(Tosca)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고급 중형 세단'을 표방하고 있었던 매그너스와는 달리, 확고하게 통상의 중형세단으로 포지셔닝이 바뀌게 된다. 즉 GM대우는 '고급형 중형 세단'으로 내세울 만한 모델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2010년 한국지엠으로 변화하고, GM 계열의 모델들을 국내로 도입하면서 새로운 준대형 세단이 등장하게 된다.
한국지엠 알페온
한국지엠체제로 전환된 이후, 한국지엠은 XG 이후의 그랜저급에 맞설 준대형 세단 모델의 도입을 기획하게 된다. 이들이 도입하고자 했던 모델은 당시 북미 시장에서 이른 바 '렉서스 킬러'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던 뷰익(Buick) 브랜드의 전륜구동 고급세단 라크로스(LaCrosse)의 2세대 모델이었다.
2009년 데뷔한 2세대 뷰익 라크로스는 렉서스 ES를 겨냥하고 개발된 고급 준대형 세단으로, 뛰어난 정숙성과 우수한 제작품질, 안락한 승차감,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및 편의사양 등으로 뛰어난 경쟁력을 보인 바 있었기에, 한국지엠은 이 차를 자사의 새로운 플래그십 세단으로 들이기로 한 것이다. 이 차가 바로 알페온(Alpheon)이다.
한국지엠은 2010년 부산모터쇼에서 '알페온'이라는 독자 브랜드로 이 차의 출시를 알렸고, 동년 하반기부터 시판에 돌입했다. 알페온은 원본에 해당하는 뷰익 라크로스의 미국 현지가에 비해 훨씬 낮은 3천만원대에 출시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덕분에 그랜저와의 경쟁구도가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하지만 알페온이 막상 출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장의 반응은 냉담해졌다. 그 이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차량의 가격을 3천만원대로 낮추는 과정에서 상품성이 크게 떨어졌다는 점이고, 둘째는 조화롭지 못한 파워트레인 성능에 있었다.
알페온의 원본에 해당하는 뷰익 라크로스는 현지 시장에서 현대자동차의 초대 제네시스(BH)급에 상응하는 4~5천만원대의 차량이다. 하지만 그보다 한 체급 아래인 그랜저와 직접 경쟁하기 위해 억지로 가격을 내리다 보니, 지나치게 많은 안전/편의장비가 제거되었다. 그랜저에 상응하는 가격설정은 성공했지만, 상품성이 크게 저하된 것이다. 그리고 파워트레인의 경우에도 문제가 있었다. 엔진과 변속기와의 궁합이 나빠, 전륜구동 차종임에도 구동손실률이 매우 높았으며, 이 때문에 엔진이 제 성능을 내지 못했다. 이는 라세티 프리미어 1.6 모델로부터 촉발된 '보령미션'의 악명을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알페온은 원본인 뷰익 라크로스의 장점들을 그대로 이어받아, 국산 준대형으로서는 최상의 정숙성과 더불어 편안한 승차감으로 쾌적한 운행환경을 제공했다. 그리고 이러한 장점으로 인해 알페온을 선택한 소비자들도 꾸준히 존재했다. 하지만 그랜저와의 경쟁을 위해 과도하게 가격을 내리려고 한 점과, 동력성능의 부실 등으로 인해 상품성이 크게 저해되며 전반적으로는 그리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알페온은 출시된 지 6년 만인 2016년 단종을 맞았다.
쉐보레 임팔라
한국지엠은 알페온이 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자, 다른 차종을 내세우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2012년에 미국에서 등장한 10세대 쉐보레 임팔라(Impala)가 그 주인공이었다. 쉐보레 임팔라는 쉐보레 브랜드의 풀사이즈 세단으로, 9세대까지만 해도 미국의 기관이나 기업 등에 납품되는 저렴한 영업용 차량 취급이었으나, 10세대 들어 새로운 디자인 언어의 적용과 함께 상품성을 완전히 일신하여 미국의 일반 소비자 시장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
이에 국내에서도 임팔라 10세대 모델을 도입을 주장하는 여론과 더불어, 한국지엠이 임팔라를 도입하기 위한 행보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 하나둘씩 밝혀지면서 쉐보레 임팔라의 국내시장 출시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 쉐보레 임팔라에 대한 소비자들의 기대감은 날로 높아져만 갔다. 이리하여 우여곡절 끝에 한국지엠은 2015년도 7월 말부터 임팔라의 사전계약을 개시했는데, 12월까지 무려 1만 2천명의 출고 대기자가 몰렸다.
하지만 쉐보레 임팔라의 효과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오직 수입으로만 들여오는데다, 국내에 배정된 물량도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이러한 수요예측 실패로 인해 공급은 끊임없이 지연되었고, 이로 인해 대기수요를 고스란히 현대 그랜저, 혹은 기아 K7에게 빼앗겼다. 그리고 2016년, 그랜저가 6세대 모델(IG)로 대대적인 변신을 하고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쉐보레 임팔라는 시장에서 완전히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2020년 쉐보레 임팔라가 본토인 미국에서 단종을 맞으면서 국내 판매도 종료되었고, 현재까지 한국지엠은 중형세단인 말리부가 플래그십의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