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자동차 산업은 아주 일찍부터 그 역사를 시작했으며, 1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 많은 제조사들이 생겨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여 오늘날의 체제로 재편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끝까지 생존하여 지금도 그 역사를 이어 나가고 있는 제조사도 존재한다. 그 중 대표적인 예가 바로 12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아메리칸 럭셔리' 브랜드 캐딜락(Cadillac)이다. 캐딜락은 창사 초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미국 최대의 자동차 기업인 제너럴 모터스(GM) 산하의 고급 브랜드로 존속하고 있으며 미국 내수 시장은 물론, 대외적으로도 가장 잘 알려진 미국계 고급 자동차 제조사 중 하나다. 우리나라에서는 구한말 순종 황제가 탔던 순종황제어차(純宗皇帝御車)가 캐딜락의 타입 57(Type 57)이기도 했으며, 1996년부터 한국 시장에도 공식 진출하여 지금도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캐딜락의 양산차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을 꼽는다면, 그 '디자인'에 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따라하려는 순간, 그대로 '표절'이 되어버리고 마는 그들만의 독보적인 디자인 언어는 캐딜락 브랜드의 매력을 이루는 주요한 요소 중 하나다. 특유의 각이 살아 있고, 당대의 자동차들 가운데서도 유달리 눈에 띄고 파격적인 디자인을 보여주는 캐딜락 고유의 '아트 & 사이언스(Art & Science)' 디자인 언어는 오늘날 캐딜락이 가진 강렬한 개성을 만들어주는 밑거름이 되었다.
한편 캐딜락의 아트 & 사이언스 디자인 언어로 조형되는 자동차들에서 나타나는 파격적인 면모에는 캐딜락의 오랜 역사와 '전통'이 녹아 들어있다는 반전이 존재한다. 지금은 에스칼라 컨셉트의 등장 이후로 가로형 헤드램프가 적용되고 있지만, 에스칼라 컨셉트의 등장 이전에 출시되었던 캐딜락의 차량들은 너나할 것 없이 세로형 헤드램프를 사용했다. 여기에 보닛 중앙부가 솟아오른 형상과 중앙부에 각이 진 격자형 라디에이터 그릴, 그리고 핀 타입의 후면부 디자인 등, 오늘날 캐딜락의 시그니처 스타일로 통하고 있는 요소들은 모두 캐딜락의 전통적인 디자인 요소를 차용해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캐딜락만의 스타일을 처음으로 제시하며, 캐딜락의 브랜드 이미지를 쇄신하는 데 크게 기여한 차가 바로 초대 'CTS'다.
1990년대, 캐딜락은 추락하고 있었다
1백년도 넘는 캐딜락의 역사에서 1세대 CTS는 태어난 지 고작(?) 20년 밖에 되지 않은 모델이다. 이 차는 비록 캐딜락의 역사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지만, 수많은 미국의 자동차 제조사들이 쓰러져가는 와중에도 오늘날까지 캐딜락이 '아메리칸 럭셔리 브랜드'로서 존립할 수 있었던 터닝 포인트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되는 모델이다.
캐딜락 CTS가 이러한 평가를 받게 된 데에는 CTS의 등장 이전, 그러니까 2002년 이전의 캐딜락의 상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캐딜락은 1950년대의 캐딜락 엘도라도 이래 이렇다 할 혁신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두 차례의 석유파동 이래로 '제품의 혁신' 대신 '비용 절감'으로 때우려고 했던 GM의 안일한 경영으로 인해 럭셔리 브랜드로서 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 당시 미국의 자동차 제조사들은 기술의 혁신을 통해 매력적인 신제품을 내놓고 있었던 외국의 자동차 제조사들에게 점유율을 지속적으로 빼앗기고 있었다. 특히 대중차 시장에서는 일본계 자동차 제조사들이, 그리고 고급 자동차 시장에서는 독일을 위시한 유럽계 제조사들의 맹공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른 바 '빅 3(GM, 포드, 크라이슬러)'라고 불렸던 미국의 자동차 제조사들은 승용차 시장에서 몰락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GM은 이른 바 '배지 엔지니어링(Badge Engineering)'을 가장 무분별하게 남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꼽힌다. 배지 엔지니어링은 동일한 차종에 서로 다른 제조사의 배지(마크)를 적용하는 것으로, 신차 개발비용의 절감은 물론, 수출 시장에서의 현지화나 개발비 절감, 판매망을 유연하게 운용할 수 있는 등의 순기능이 존재한다. 하지만 GM은 이를 지나치게 남발하는 것에 더해 극도의 비용절감을 우선하는 전략이 '환장의 콜라보'를 이루었다. 극도의 비용절감을 위해 이렇다 할 기술 혁신 없이 승용 라인업 전반을 하나의 가로배치 전륜구동으로 통일하는 것도 모자라, 그렇게 개성이 무색해진 차종에 배지만 바꿔 달아 판매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영으로 인해 GM 계열의 차종 간 개성은 날이 갈수록 무색해져만 갔고, 제품 경쟁력은 나날이 떨어져 갔다. 특히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까지 캐딜락의 기함 자리를 맡고 있었던 대형세단 드빌(De Ville)은 물론, 준대형에 해당하는 스빌(Seville)마저 같은 가로배치 전륜구동을 사용하고 있었을 지경이었다. GM의 배지 엔지니어링은 워낙 악명이 높았던 탓에 코미디 프로그램의 소재거리로까지 쓰이는 등, 미국을 대표하는 고급 자동차 브랜드로서의 위신마저 실추되었다. 이 때문에 캐딜락은 이미 1970년대부터 젊은 소비자들에게서 외면받기 시작했으며, 80~90년대에는아예 '노인용'이라는 평가마저 나올 정도였다. 따라서 캐딜락에게는 이러한 이미지를 타파하고, 브랜드의 위신을 다시 세우기 위한 뼈를 깎는 '혁신'에 들어가게 된다.
살아남기 위한 '혁신', 그리고 아트 & 사이언스
캐딜락은 종래의 GM 계열 승용차와는 근본부터 다른 혁신적인 차가 필요했다. 그 중에서도 브랜드의 허리를 담당해야 할 중형(D세그먼트)급에 해당하는 세단 모델이 필요했다. 특히 고급 중형차 시장을 잠식하고 있는 독일계 브랜드의 D세그먼트 세단에 정면으로 대항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조종성능과 승차감을 뒷받침할 수 있는 후륜구동이 요구되었으며, 차량의 크기 또한 종래의 GM 계열 차량에 비해 한층 작아지면서도 더욱 탄탄한 기반을 갖출 것이 요구되었다.
이렇게 개발된 설계기반이 'GM 시그마 플랫폼'이다. GM 시그마 플랫폼은 GM이 그동안 사용해 왔던 G 플랫폼과 V 플랫폼을 대체하는 성격의 플랫폼으로, 4륜 독립 현가장치와 후륜구동 및 후륜구동 기반의 사륜구동 자동차에 사용할 것을 고려해 개발되었다. 캐딜락이 2002년 국내에 CTS를 출시하면서 밝힌 바에 따르면, 스타일링의 측면에 있어서는 메르세데스-벤츠의 E-클래스를, 안전성에 있어서는 볼보자동차의 C70을, 그리고 주행성능은 BMW의 5시리즈와 아우디 A6를 벤치마킹했으며, 차량 가격은 렉서스의 ES300과 동등한 수준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한다.
이렇게 설계 기반을 확보하는 동안, 캐딜락은 자사만의 독보적인 개성을 부여할 새로운 디자인 언어 또한 마련했다. 캐딜락은 자사의 전통과 유산을 담아내면서도, 그 어떤 제조사보다도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디자인 언어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1999년 디트로이트 모터쇼를 통해 선보인 컨셉트카 '이보크(EVOQ)'가 만들어지게 된다. 캐딜락 이보크는 초기 아트 & 사이언스 디자인 언어에 근간을 두고 만들어진 첫 번째 컨셉트카이자 스터디 모델로서 등장했다.
또한 캐딜락은 CTS의 외관을 디자인하면서 오직 캐딜락만이 가능한, 미국적인 외양을 부여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들은 미국을 대표하는 독특한 디자인 요소이자, 최첨단 기술의 집약체인 스텔스 항공기의 이미지를 차용했다. 특히 스텔스 항공기는 예나 지금이나 전세계에서 미국이 가장 앞서 있는 분야이기에 '새로운 시대의 미국'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제격이었다. 특히 스텔스 항공기 특유의 각지고 날카로운 선과 기하학적인 형상은 차량에게 또렷한 인상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요소였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GM 내부에서도 굉장히 위험천만한 시도로 여겨졌으나, 캐딜락은 자사의 새로운 시대를 위한 신차를 위해 과감하게 이러한 방향성을 관철했다.
인테리어는 '편안함'과 '편리함'을 강조하는 한 편, 고급 승용차를 찾는 소비자들이 기대하는 다양한 편의장비를 제공할 수 있는 디자인으로 만들어졌다. 인테리어 디자인 역시, 당대의 그 어떤 차와도 닮지 않은 CTS만의 독자적인 언어가 살아 있었으며, 비록 독일식의 정형화된 디자인은 아니었지만, 외관 디자인과 조화를 이루는 미래지향적인 분위기가 특징이다. 여기에 천연 소재의 마감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시도를 통해 현대적인 느낌과 전통적인 고급스러움의 균형을 잡고자 했다. 우드 트림의 경우에는 스티어링 휠 일부, 기어노브, 도어 핸들과 같이 손이 닿는 부분에만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21세기, '새로운 시대의 캐딜락'을 제시한 혁신의 아이콘
종래의 캐딜락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설계 기반, 그리고 완전히 새로우면서도 브랜드의 전통은 충실하게 이어가는 기막힌 디자인 언어를 만나 완성된 신차는 'CTS'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CTS는 카테라 투어링 세단(Cattera Touring Sedan)을 의미하는데, 이 이름은 사실 썩 좋은 이름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카테라(Catera)는 캐딜락이 과거에 독일 오펠의 중형세단 오메가(Omega)에 자사 배지를 붙인 배지 엔지니어링 모델 중 하나다. 원판인 오펠 오메가는 후륜구동 기반의 탄탄한 만듦새를 가진 중형 세단이었으나, 이 차는 어디까지나 대중 브랜드의 모델이 기반이었으므로 고급 승용차 시장의 요구에 못 미치는 상품으로 평가받고 빠르게 사장된 실패작이었기 때문이다.
캐딜락은 2001년 8월 캘리포니아 몬터레이에 위치한 페블 비치(Pebble Beach)에서 새로운 고급 중형세단, CTS를 처음으로 선보였다. 캐딜락의 신차 CTS는 당대로서는 실로 파격적인 디자인과 더불어, 종래의 GM 계열 차종에서 기대할 수 없었던 탄탄하고 우수한 주행성능과 다양한 편의장비들로 무장, 고급 자동차 시장(특히 미국 시장)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차는 1988년 등장한 캐딜락 시마론(Cimarron) 이후 10여년만에 등장한 후륜구동 독자모델이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기존의 캐딜락과 궤를 달리하는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CTS는 주행성능의 측면에 있어서는 독일제 스포츠 세단들을, 고급스러움과 편의장비에 있어서는 렉서스를 위시한 일본계 제조사의 모델들과 맞대결을 벌이기 위해 만들어진 모델로 만들어졌다.
파워트레인은 220마력을 발휘하는 3.2리터 V6 엔진을 시작으로, 가변밸브 타이밍(VVT) 기구를 적용한 3.6리터 V6 엔진이 탑재되었다. 3.6리터 엔진은 255마력의 최고출력을 낼 수 있었으며, 2004년형부터 적용되었다. 또한 유럽 시장용으로 2.8리터 V6 엔진이 준비되어 있었다. 변속기는 GM 하이드라매틱 5단 자동변속기(5L40) 외에도 게트락(Getrag)의 5단 수동 변속기를 선택할 수 있었다. 이후 2005년형부터는 수동변속기가 아이신(AISIN)의 6단 수동변속기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1년 뒤인 2002년, 캐딜락은 CTS를 본격적으로 시장에 출시했다. CTS는 등장하자마자, 미국 올해의 차 후보에 오르는 것을 시작으로, 이전까지 없었던 새로운 개념의 자동차로서 캐딜락의 브랜드 이미지 제고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또한 GM은 캐딜락 CTS를 미국 내수 시장 뿐만 아니라 스포츠 세단의 본고장인 유럽 시장에서도 야심차게 선보이는 등, CTS를 통해 글로벌 브랜드로서의 행보를 시작하게 되었다.
또한 초대 CTS는 전세계적으로 대흥행을 거둔 영화, '매트릭스 2: 리로디드(The Matrix Reloaded)'에 등장하면서 세계인의 시선을 사로잡게 된다. 비록 영화 상에서는 헐리우드 영화에 출연한 자동차들이 으레 그렇듯 처참하게 부서지기는 했지만, '오늘을 사는' 양산차임에도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 완벽하게 녹아들어가면서 대중적으로도 그 이미지를 선명하게 각인시키게 된다. 캐딜락의 초대 CTS는 2002년 출시 당시 미국 시장에서만 37,976대를 넘게 판매하는 것을 시작으로 북미 시장에서 식을 줄 모르는 인기를 구가했다. 1세대 CTS는 2002년부터 단종되는 2007년까지 34만대가 넘게 판매되었다. 물론 이 판매량의 절대다수는 미국 시장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미국에서조차 추락하고 있었던 캐딜락이라는 브랜드를 되살린 일등공신으로 맹활약하며 120년의 캐딜락 역사에 중대한 이정표가 되었다.
아메리칸 퍼포먼스, V-시리즈의 탄생을 알리다
캐딜락 CTS는 캐딜락의 고성능 브랜드, V-시리즈의 시작을 알린 모델이기도 하다. 초대 CTS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CTS-V는 BMW M5, 아우디 S6 등과 경쟁하기 위해 만들어진 고성능 세단 모델이다. 이 차의 심장은 아메리칸 스포츠카, 쉐보레 콜벳의 고성능 버전인 'Z06'에 사용된 V8 LS 엔진과 6단 트레멕 수동변속기 조합의 파워트레인을 그대로 이식해 만들어져, 유럽식 스포츠 세단과는 전혀 다른, 아메리칸 퍼포먼스 세단의 이정표를 세웠다. 콜벳의 파워풀한 V8 심장을 탑재한 초대 CTS-V는 0-60mph(약 96km/h) 가속을 단 4.6초만에 끝내며, 쿼터마일(약 402m) 주파 시간은 109mph(약 175km/h)의 속도로 13.1초만에 주파가 가능했다. 이 뿐만 아니라 독일 뉘르부르크링 노르트슐라이페에서 8분 19초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워, 한동안 세계에서 가장 빠른 4도어 세단으로 기록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