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틀리 영국 크루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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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틀리 영국 크루 공장
  • 김기범
  • 승인 2012.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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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4일, 벤틀리의 고향인 영국 크루를 찾았다. 시속 300㎞ 넘는 첨단 자동차 기술의 결정체를 장인의 손맛을 담아 느릿느릿 만드는 곳이었다.



영국 맨체스터 공항에서 자동차로 40분 거리의 크루에 자리한 벤틀리 공장을 찾았다. 1931년 이후 벤틀리와 롤스로이스는 한 식구였다. 다시 남남이 되기 전까지 두 브랜드의 본거지는 영국 크루였다. 두 브랜드의 차가 사이좋게 굴러 나오던 공장이었다. 가죽 꿰매는 장인과 원목 다듬는 장인이 퇴근 후 함께 맥주잔 기울이던 시골 마을이었다.


크루 공장의 겉모습은 낡고 허름했다. 그런데 나른한 분위기는 딱 건물까지만 해당됐다. 건물 사이로 뻗은 왕복 2차선 도로는 러시아워 뺨치게 통행량이 많았다. 흰 포장으로 싼 신차와 위장막 씌운 프로토타입이 쉴 새 없이 오갔다. 사람들도 바빴다. 배가 불룩한 중년 직원과 협력업체 직원으로 추정되는 수트 차림 남자들이 분주히 건물 사이를 넘나들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겉모습과 달리 공장 안은 깨끗하고 현대적이었다. 폭스바겐 그룹이 최근 5억 파운드(약 9140억 원)를 들여 단장한 결과다. 그러나 규모엔 변함이 없다. 그래서 공간이 빠듯하다. 기다란 생산라인을 따라 각양각색 벤틀리가 느릿느릿 흘러간다. 각 공정의 간격은 12분. 일반 자동차 공장보다 훨씬 느리다. 수작업 공정이 많기 때문이다.


조립 라인을 통틀어 로봇은 10여 대뿐이다. 그래서 거칠고 시끄러운 소음이 없다. 4천여 명의 직원은 주 4일만 근무한다. 공장에선 하루 40대 안팎의 벤틀리가 완성된다. 지난해 생산대수는 7천여 대, 올해 목표는 8천 대다. 벤틀리는 뮬산을 뺀 전 차종의 최고시속이 300㎞를 넘는 초고속 차. 하지만 알고 보니 만드는 속도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느렸다.




그런데 조립공정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우드 패널 만드는 과정에서 ‘느림의 미학’은 절정을 이뤘다. 우선 나무 한 그루에서 가장 상태가 좋은 부위를 박편으로 썰어 3주간 말린다. 그리고 다시 절반으로 쪼개 0.6㎜ 두께의 패널을 만든다. 벤틀리 나무장식의 표면무늬가 좌우 대칭을 이룬 이유다. 이 패널을 나무틀 위에 씌운 뒤 8겹으로 코팅하고 광을 낸다.




벤틀리가 강조하는 ‘장인정신’의 핵심도 이 공정에 집약되어 있다. 우드 패널 다듬는 모습만 보면 가구 공장으로 착각하기 십상이다. 나무 박편을 오리기 위한 레이저나 코팅한 표면에 광을 내는 기계만 빼면 죄다 수작업이다. 대시보드 좌우를 가로지르는 기다란 패널도 전부 손으로 들고 작업한다. 가루와 냄새에 개의치 않고, 다들 작업에 완전히 몰입한 눈치다. 


벤틀리가 명차로 인정받는 건 품질에 대한 남다른 고집 때문이다. 가령 우드 패널은 탈색과 염색을 거치지 않는다. 원래 나무의 무늬와 색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또한, 북유럽에서 방목해 키운 황소의 가죽만 고집한다. 모기가 물거나 울타리에 긁힌 상처가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실내에서 금속성 광택을 띤 부위는 도금한 플라스틱이 아닌 진짜 금속이다.




벤틀리는 최고급 세단인 뮬산 한 대의 실내를 꾸미는데 황소 16~17마리 분의 가죽을 쓴다. 가죽은 37시간에 달하는 바느질을 거쳐 벤틀리의 뽀얀 속살로 거듭난다. 스티어링 휠에 가죽을 씌워 꿰매는 데만 15시간이 걸린다. 나무는 한 그루에서 4㎡만 추려 5주에 걸쳐 가공한다. 벤틀리는 나무 한 그루를 벨 때마다 묘목 한 그루를 심어 생태계의 균형을 맞춘다.



공장 옆엔 조그만 박물관이 자리한다. 벤틀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둘러볼 공간이다. 여기엔 벤틀리의 미래를 상징하는 컨셉트 모형이 있다. 한국인 디자이너 김보라의 작품이다. 홍대 미대와 영국왕립예술학교(RCA)를 졸업한 뒤 벤틀리 디자이너로 거듭난 그는 “벤틀리는 디자이너가 엔지니어를 압도하는 몇 안 되는 자동차 브랜드”라고 귀띔했다. 




벤틀리와 롤스로이스는 1998년 공식적으로 남남이 됐다. 1997년 롤스로이스 모터스의 소유주인 비커스 그룹이 자동차 사업부문을 팔기로 결정했다. 수많은 자동차 업체가 군침을 흘렸다. 롤스로이스에 V12 엔진 기술을 전수한 BMW에게 우선권이 있었다. 로버를 인수한 경험도 있었다. 그러나 주저했다. 로버가 연속 적자를 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임러 벤츠도 인수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곧 포기했다. 인수 후보는 BMW와 폭스바겐으로 압축됐다. 폭스바겐과 BMW 모두 벤틀리에 더 눈독을 들였다. 그러나 분리 인수는 여의치 않았다. 두 브랜드를 동시에 사야하는 상황에 처했다. 게다가 인수협상 역시 난관의 연속이었다. 롤스로이스의 회사 구조가 워낙 복잡한 탓이었다.



결국 폭스바겐이 크루 공장과 벤틀리를 낙찰 받았다. BMW는 롤스로이스 상표권만 거머쥐었다. 그것도 헐값에. BMW가 실익을 챙겼다는 평이 쏟아졌다. 그러나 폭스바겐의 페르디난트 피에히 회장은 “다른 방식으로 샀다면 훨씬 더 많은 비용이 들었을 것”이라며 태연자약해했다. 경합의 맞수였던 BMW의 피셰츠리더 회장은 2002년 폭스바겐의 회장이 됐다.


한편, 이름 하나 덜렁 손에 쥔 BMW는 크루 공장의 장인 스카우트에 나섰다. “몇 명 빼곤 전부 크루에 남았어요. 롤스로이스 새 공장이 자리한 굿우드는 물가가 워낙 비싸거든요.” 벤틀리에 32년째 몸담고 있는 나이젤 로프킨 씨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아들과 딸도, 벤틀리에서 일한다.


글 김기범|사진 벤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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