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미리 타본 렉서스 신형 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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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미리 타본 렉서스 신형 ES
  • 김기범
  • 승인 2012.07.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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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미국 오리건 주 뉴버그에서 열린 렉서스 신형 ES 시승회에 참가했다. 뉴버그는 와인 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포틀랜드 공항에서 차로 40분 거리인데, 사람보다 양, 집보다 헛간이 많은 시골이다. 밤엔 숙소 주위만 빼고 암흑천지. 밤하늘에 깨알 같은 별이 자글자글했다. 주최 측은 자랑에 여념 없었다. 뉴버그만큼 신형 ES와 잘 어울리는 곳도 없다면서.



ES는 1989년 렉서스 브랜드 출범과 함께 선보인 차다. 당시 주인공은 단연 LS400. 하지만 혼자 덜렁 내놓을 순 없었다. 이때 조연으로 발탁된 게 ES250이었다. LS400은 브랜드의 ‘신분상승’을 위해 철저히 원점에서부터 개발한 차. 반면 ES는 일본 내수시장을 위해 만든 토요타 윈덤의 복사판이었다. 이 같은 ‘유전자 조작’은 심지어 4세대 ES까지 이어졌다.


이번 ES는 6세대 째다. 세대를 거듭날 수록 ES는 LS 뺨치게 미국 시장에 어울리는 차로 진화했다. 이 같은 변화는 토요타 윈덤과 이란성 쌍둥이였던 시절부터 시작됐다. 일본 자동차 시장의 주력 차종으로 경차와 RV가 급부상하면서, 세단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진 탓이기도 했다. 오늘날 ES는 덩치는 물론 색감마저도, 일본적 분위기와 거리가 먼 차가 됐다.



다음날 신형 ES를 만났다. 파격적이었다. 이전 ES와 연결고리를 몽땅 끊었다. ‘스핀들 그릴’로 콧등 찡그리고 ‘메이저 체인지’라며 뿌듯해하는 RX와 차원이 다른 변화다. 물론 신형 ES의 콧날에도 ‘스핀들 그릴’을 심었다. 그러나 CT나 GS, RX처럼 과격하진 않다. 매끈하게 둥글린 얼굴에 썩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스핀들 그릴’ 형제 중 표정이 가장 우아하다.


하지만 앞 범퍼의 안개등 주위는 낯설다. 으레 흡기구 뚫는 부위다. 그러나 신형 ES는 땜질하듯 꼼꼼히 막았다. “냉각을 중시하는 엔지니어 입장에선 솔직히 달갑지 않죠. 그런데 디자인 파트의 의지가 워낙 강경했어요. 공기저항을 줄일 수 있어 연비에 도움 되니 결사반대할 당위성도 희박했고요.” 신형 ES를 개발한 켄지 니시무라 부수석 엔지니어의 설명이었다.



몸매 역시 담백하고 간결하다. 기교래 봤자 면끼리 만나는 지점을 만두피 여미듯 쫑긋 접어 세운 정도. 그마저도 기능을 위한 아이디어다. 공기 흐름을 유리하게 다듬기 위한 수단이다. 테일램프의 돌기가 좋은 예다. 길이 9.5, 높이 1㎝ 밖에 안 된다. 하지만 니시무라 부수석은 “시속 80㎞ 이상에서 차가 좌우로 기우는 현상을 줄이는데 도움 된다”고 밝혔다. 


렉서스는 신형 GS를 시작으로 공기역학 디자인에 푹 빠졌다. 효과를 확신했기 때문이다. 짠돌이로 소문난 토요타가 천문학적 비용 써가며 F1에 참가해 얻은 수확 가운데 하나다. 렉서스 디자인만의 색깔을 강조할 상징적 수단이기도 하고. 



외모처럼 실내도 송두리째 바뀌었다. 좌우 대칭의 빤한 구성을 버리는 한편, 세련된 분위기를 덧씌웠다. 덩치를 키운 만큼 실내도 넉넉해졌다. 앞뒤 바퀴 사이의 거리는 45㎜ 늘었다. 덩달아 뒷좌석 무릎과 발 공간 역시 각각 71, 104㎜ 더 여유로워졌다. 시트도 신형이다. 앞좌석은 10방향 파워가 기본, 허벅지 지지대까지 늘릴 수 있는 12방향이 옵션이다.


인스트루먼트 패널은 위아래 두 부분으로 나눴다. 위쪽은 계기판과 모니터가 각종 정보를 띄우는 디스플레이 존이다. 각종 스위치는 아래로 몰았다. ‘리모트 터치 컨트롤’은 신형 GS와 RX처럼 2세대로 진화했다. 마우스처럼 손을 얹고 움직여 커서 움직이는 방식까진 이전과 같다. 대신 엄지로 누를 선택 버튼을 없앴다. 이젠 손바닥으로 꾹 눌러 선택하면 된다.



신형 ES는 350과 300h 두 모델로 나왔다. 모두 이전처럼 앞바퀴 굴림이다. 350은 V6 3.5L 가솔린 엔진에 6단 자동변속기를 물렸다. 이전과 같은 구성이다. 안팎을 그렇게 낱낱이 헤쳐 놓고 심장은 그대로라니. 이번 ES의 진화가 ‘눈 가리고 아웅’내지 ‘조삼모사’ 격 눈속임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시승에 앞서 니시무라 부수석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가 해명에 나섰다. “엔진은 마찰을 줄이고 압축비를 높였어요. 전기식 스티어링과 워터펌프를 도입해 엔진을 옭아매던 벨트도 없앴고요.” 한창 유행인 직분사 시스템이나 7단 이상 변속기를 쓰지 않은 이유 또한 궁금했다. 그는 당당했다. “지금 구성으로 만족할 만한 성능과 연비를 내기 때문이에요. 과잉기술로 가격이 치솟는 것도 원치 않았고요.”



하지만 석연치 않은 구석은 여전했다. 신차는 대개 이전보다 성능을 높인다. 그런데 신형 ES350의 가속은 구형보다 다소 뒤쳐진다. 가령 0→시속 100㎞ 가속 시간이 7.4초로 이전보다 0.4초 늘었다. 무게를 40㎏ 더 줄였는데도. 부수석이 다시 설명에 나섰다. “최종감속비를 낮춘 탓이에요. 연비를 높이기 위해서였지요.”


난 신차인 만큼 파워트레인과 성능 개선에 주목했다. 하지만 렉서스가 강조하고 싶었던 건 성격이었다. 이번 변화의 본질이자 핵심이었다. 지금껏 렉서스 ES는 GS와 대척점을 이뤘다. GS는 진화할 때마다 공격적 성향의 수위를 나날이 높여왔다. 반면 ES는 늘 부드럽고 편안한 차였다. 신형 ES는 그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운전감각을 보다 선명히 부각시켰다.



이 같은 결심의 배경엔 토요타 아키오 사장이 있다. 그는 창업자인 토요타 기이치로의 손자다. 쇼이치로 명예회장의 장남이기도 하다. 그는 못 말리는 자동차 마니아로 알려졌다. 독일 뉘르부르크링 24시간 내구레이스에 토요타 알테자나 렉서스 LFA 경주차를 몰고 직접 출전했을 정도다. 세계적 자동차 가문의 황태자니 세상 좋은 차는 다 타봤을 거다.


별별 차로 ‘자극의 역치’를 겪었을 그가 토요타나 렉서스 차에서 뾰족한 감흥을 받긴 어려웠을 거다. “너네 차는 좋긴 한데 지루해”라며 비수를 꽂은 또래의 귀공자 친구도 있었을 테고. 하지만 그는 경영수업 받는 내내 납작 엎드려 있었다. 기회는 별안간 왔다. 그런데 위기와 함께였다. 2008년 미국발 불황의 여파로 토요타는 창업 이래 처음 적자를 냈다.



경영쇄신을 이유로 2009년 아키오가 토요타의 왕권을 쥐었다. 적절한 구실과 적당한 시점을 찾고 있었을 뿐 예정된 시나리오긴 했다. 레이스 뛸 만큼 차에 빠진 마니아가 세계적 자동차 기업의 총수가 되었다. 그의 입에서 나올 주문은 바보 아니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운전이 재미있는 차를 만들어 주세요.” 판매가 추락한 때였으니 당위성도 충분했다.


하지만 상황이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리콜과 대지진 등 악재가 겹쳤다. 아키오 사장은 미 청문회까지 불려가는 등 신고식을 톡톡히 치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신차 개발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다만 드러나지 않은 타협이 많았을 거다. 안팎으로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애당초 토요타가 ‘비용 대비 효과’에 남다른 노하우를 지닌 회사이기도 하고.



아키오 사장의 요구는 구체적이지 않아서 더 어려웠다. 니시무라 부수석은 “내심 반가웠지만 고민이 깊었다”고 털어놨다. 엔지니어들은 기존 가치를 유지하되 확연한 차이 담을 방법을 연구했다. 해답은 기본기 다지기. 가령 차체를 단단히 다져 서스펜션의 부담을 줄였다. 강판을 많이 써서 무게도 줄였다. 각종 제어프로그램을 손봐 반응성도 높였다.


이 같은 전략은 이번 ES의 특징과 고스란히 겹친다. 요컨대 440~1620메가파스칼의 고장력 철판을 써서 차체강성을 높였다. 차 바닥엔 바둑판무늬, 엔진룸과 트렁크엔 V자 모양으로 고강도 강철 빔을 겹겹이 짜 넣었다. 스폿 용접으로 붙인 접점도 앞문 주위는 이전의 78에서 93, 뒷문은 66에서 92곳까지 늘렸다. 


기본에 충실하기 위한 변화는 운전석에 앉는 순간 느낄 수 있다. 렉서스에서 늘 아쉬웠던 점이 바로잡혔다. 바로 스티어링 휠의 각도다. 기존 렉서스의 운전대는 앞으로 누운 형태였다. 그래서 좀처럼 반듯한 자세를 잡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젠 운전대를 보다 수직에 가깝게 세울 수 있게 되었다. 니시무라 부수석은 “24°에서 22°로 좀 더 세웠다”고 귀띔했다.



신형 ES350을 몰고 인근 굽잇길로 나섰다. 단박에 와 닿는 차이는 손맛이었다. 앞머리 움직임이 한층 빠릿빠릿해졌다. 민감해서 조심스러울 만큼 조작과 반응 사이의 간격은 가까웠다. 스티어링 기어비를 기존의 16.1:1에서 14.8:1로 옥죈 결과다. 드라이브 셀렉터를 스포츠에 두면 스티어링 답력도 무거워진다. 니시무라 부수석에 따르면, 앞 서스펜션엔 좌우 대칭을 이루도록 감은 스프링을 끼워 직진 안정성도 높였다. 


하지만 ES의 백미인 승차감은 고스란히 지켰다. 여전히 부드럽다. 결과는 흥미롭다. 차체 절반 앞쪽은 결기 넘치고 뒤쪽은 푸근하다. 때문에 종종 꽁무니가 예리하게 뒤트는 앞머리를 쫓느라 허둥대기도 했다. 토요타 가문 황태자의 원대한 이상과 빠듯한 현실 사이에서 고민한 흔적이 묻어났다.



ES350의 가속은 여전히 매끄럽고 활기찼다. 직렬 4기통 엔진의 ES300h도 전기모터의 지원사격 덕분에 초기 가속은 흠잡을 데 없다. 니시무라 부수석은 “정숙성은 플래그십인 LS 수준”이라고 자신했다. 실제로도 조용했다. 


“렉서스 ES가 미국에 선보인지 23년째에요. 기존 ES의 가치를 선망했던 이라면 신차든 중고차든 ES를 겪고도 남을 세월이죠. 이제 새로운 소비자에게 다가갈 때에요. 신형 ES엔 이런 각오와 다짐이 스몄지요.” 뉴버그에서 만난 미국 렉서스 칼리지(트레이닝 센터)의 폴 M. 윌리엄슨 매니저의 설명이었다. 렉서스 신형 ES는 올 가을 국내 시장에 데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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