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부활하는 차들은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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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활하는 차들은 이유가 있다
  • 김기범
  • 승인 2012.07.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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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관이 명관이다.’ 널리 알려진 격언이다. 하지만 자동차의 경우엔 꼭 그렇지 않다. 전통을 내리 물림한 부활작의 인기가 원조 모델 못지않게 뜨거워서다. 대중차에서 초고급차, 세단에서 로드스터까지,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회귀 모델이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가교를 자청하면서 애틋한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  


◆ 알파로메오 8C 콤페티치오네 
국내에 수입 되니 마니 뒷이야기만 무성한 알파로메오. 전 세계 각지에 수많은 팬을 거느린 브랜드지만, 아쉽게도 여전히 우리 땅에서는 만나볼 수 없다. 국내에도 알파로메오를 기다리는 팬이 꽤 많다. 정열적인 스타일링과 이태리 명품을 떠올리게 하는 인테리어, 거울처럼 반짝이는 매니폴드 등 호기심을 자극하는 매력이 가득해서다.



과거 모터스포츠의 우승컵을 싹쓸이했던 ‘전설’이나 마세라티를 거느렸을 뿐 아니라 페라리 지분을 85%나 갖고 있는 피아트 소속이라는 사실이 막연한 환상을 부채질한다. 시작점을 되돌아보면 페라리는 알파로메오의 후손. 알파로메오에서 일하던 엔초 페라리가 세운 레이싱 팀, ‘스쿠데리아 페라리’가 오늘날 수퍼카의 대명사로 손꼽히는 페라리의 출발점이다.


1950년대 초 레이스에서 페라리가 알파로메오를 물리쳤을 때, 엔초 페라리가 “나는 어머니를 죽였다”고 중얼거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86년 피아트는 경영난에 시달리던 알파로메오를 인수해 ‘알파-란치아’를 세웠다. 피아트의 자동차 사업부문은 피아트, 알파로메오, 란치아, 피아트 경상용차의 4개 법인으로 나뉜다. 크라이슬러의 지분도 61.8% 거머쥔 상태다.


알파로메오는 순항 중이다. 개성 넘치는 모델로 니치 마켓을 알차게 일궈냈다. 미토·줄리에타·159·GT·브레라·스파이더 등 최신 모델에 대한 평도 좋다. 스포티한 이미지도 물씬하다. 하지만 토센 방식 AWD를 쓴 159 Q4를 빼곤 죄다 앞바퀴굴림 모델뿐이었다. “스포츠카 메이커로서 알파로메오의 생명은 끝났다”는 푸념이 끊이지 않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알파로메오가 이런 볼멘소리쯤 익히 알고 있었다는 듯, 2007년 아주 특별한 모델을 내놓아 ‘왕년의 실력’을 뽐냈다. 주인공은 알파로메오 8C 콤페티치오네. 2003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컨셉트카로 처음 선보여 반응을 살폈다. 2005년 미국의 클래식카 행사 ‘페블비치 콩쿠르 델레강스’에서는 한층 완성도를 높인 컨버터블 버전의 8C 스파이더도 공개했다.


그리고 이듬해, 파리 오토살롱에서 ‘500대 한정생산’을 못 박은 8C 콤페티치오네를 내놨다. 2007년 9월 25일, 피아트의 세르지오 마르치오네 회장이 8C 스파이더의 양산을 최종 승인했고, 1천200명의 신청이 줄을 이었다. 8C 콤페티치오네는 2008년 말 500대째 생산을 마쳤다. 90대의 미국에 이어, 80대의 이태리와 독일, 70대의 일본 등의 순서로 팔렸다.



8C 콤페티치오네라는 이름엔 알파로메오의 황금기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C는 이태리어로 실린더를 뜻하는 ‘칠린드리’의 첫 글자. 8C는 8기통이란 뜻이다. 과거 알파로메오 C 계열의 모델은 고성능 스포츠카의 대명사였다. 당시 8C 엔진을 설계한 주인공은 천재 엔지니어 비토리오 야노(Vittorio Jano). 한편, 그 때의 8C는 V형이 아닌, 직렬 8기통이었다.


영어로 ‘Competition’(경쟁)을 뜻하는 이태리어 ‘콤페티치오네’는 1950년 밀레밀리아 경주에서 마뉴엘 후안 판지오가 몰았던 6C 2500 콤페티치오네에서 따왔다. 미끈한 보디라인과 커다란 눈망울엔 1967~1971년 단 18대 생산된 33 스트라달레(Stradale, ‘Street’라는 뜻의 이태리어. 일반 판매용으로 개조된 경주차의 이름에 주로 붙는다)의 잔영이 어른댄다.



8C 콤페티치오네의 엔진은 V8 4.7L. 페라리·마세라티의 엔진을 대폭 손질해 얹었다. 7천rpm에서 최고출력 450마력, 4천750rpm에서 최대토크 48.9㎏·m를 뿜는다. 변속기는 스티어링 휠의 패드로 조작하는 반자동 6단 셀레스피드. LSD와 VDC를 기본 장비로 갖췄고, 앞 245/30 ZR 20, 뒤 285/35 ZR 20의 큼직한 네 발이 아스팔트를 박찬다.


성능은 0→시속 100㎞ 가속 4.2초에 최고속도는 시속 300㎞ 이상, 400m 가속 12.4초로 수퍼카급. 하지만 도로용 경주차인 33 스트라달레와 달리 8C 콤페티치오네는 장거리 여행을 위한 GT의 성격이 짙다. 8C 콤페티치오네의 뜨거운 성공에 고무된 알파로메오는 2009년부터 또 하나의 500대 한정판인 8C 스파이더의 생산에 나섰다.   


◆ 피아트 500
피아트의 창업자, 지오반니 아넬리는 무엇 하나 아쉬울 것 없이 자란 상류층 자제였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의 관심은 늘 대중의 곁을 맴돌았다. “자동차는 부자의 전유물이 되어선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널리 알려진 피아트의 베스트셀러가 모두 아담한 소형차인 이유였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모델이 바로 피아트 500이다.



1937년 피아트는 이태리어로 ‘작은 생쥐’라는 뜻의 ‘토폴리노’(Topolino)를 선보인다. 직렬 4기통 569㏄ 수랭식 엔진을 앞쪽에 얹고 뒷바퀴를 굴려, 최고속도 시속 85㎞를 냈다. 토폴리노는 1955년까지 52만 대가 팔려 나갔다. 토폴리노를 단종시키면서 피아트는 직렬 4기통 633, 767㏄의 두 종류 엔진을 꽁무니에 얹고, 뒷바퀴를 굴리는 600을 선보인다.


그리고 3년 후인 1957년엔 600보다 한결 아담한 크기의 500을 내놓는다. 500은 ‘친퀘첸토’란 이름으로 더욱 잘 알려진 피아트의 간판 소형차다. 영국의 로버 미니, 프랑스의 시트로엥 2CV와 함께 미니카 가운데 최고의 명차로 손꼽힌다. 이름이나 디자인, RR 방식의 레이아웃이 600과 닮은꼴.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500은 토폴리노의 후속 모델이다.


500은 RR 방식인데다, 공랭식 엔진을 얹었기 때문에 드라이브 샤프트, 라디에이터 등이 필요 없었다. 약간의 과장을 섞어 품에 쏙 안을 수 있을 만큼 작은 크기에 어른 네 명을 태울 공간을 짜낸 비결이 여기에 있다. 계기판엔 속도계가 전부였다. 연료계도 없었다. 연료의 4분의 3을 쓰면 경고등이 들어오는, 지극히 원시적인 방식이었다.



1957년부터 1977년까지 생산된 피아트 500은 6가지 모델로 나뉘었다. 1957~1960년을 장식한 최초의 500은 영어로 ‘New’라는 뜻의 ‘누오바’(Nuova). 2기통 479㏄ 13마력 엔진과 뒤쪽에 힌지가 달린 ‘수어사이드’ 도어를 갖췄다. 배기량을 499.5㏄로 키우고, 깜찍한 빨간색 스트라이프를 덧씌운 21마력짜리 스타일리시 스포츠 버전도 선보여 인기를 끌었다.


1960~1969년엔 누오바를 대체하는 D가 등장한다. 생김새는 누오바와 거의 같았지만, 기본 엔진의 배기량을 499㏄로 늘렸다. 최고출력은 17마력. D와 동시에 왜건 버전인 K도 선보여 1977년까지 생산했다. 엔진을 트렁크 바닥에 숨겨 적재 공간을 넓힌 게 특징이었다. 1965년엔 힌지를 앞쪽에 단 도어를 갖춘 F를 선보였다. 그밖에 L과 R이 잇따라 선보였다.


피아트 500은 1975년 R을 끝으로 126에게 바통을 넘겨주고 역사 속으로 표표히 사라졌다. 이후 친퀘첸토(1991~1998년), 세이첸토(1998~현재)가 명맥을 이었지만, 동급 라이벌의 치열한 공세에 밀려 뚜렷한 족적을 남기진 못했다. 오히려 생산이 끝난 지 30여 년이 지난 원조 500의 인기가 식을 줄 모르고 계속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지난 2007년 7월 4일, 500이 데뷔 50주년 만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피아트가 원조 500의 정신을 계승한 신형 500을 공개한 것이다. 피아트 500은 2004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공개된 컨셉트카 ‘3 1’을 밑그림 삼아 개발됐다. 이동수단으로서의 운전 편의성이나 경제성은 물론 운전의 즐거움까지 안겨주기 위한 아이디어를 앙증맞은 틀 안에 꼭꼭 눌러 담았다.


구동계는 RR이었던 원조와 달리 FF로 바뀌었다. 데뷔 초기의 심장은 직렬 4기통 1.2ℓ 69마력, 1.4L 100마력의 휘발유 엔진과 1.3L 멀티젯(커먼레일 디젤) 75마력 등 세 가지. 1.2L 모델의 경우 성능은 0→시속 100㎞ 가속 12.9초, 최고시속 160㎞를 낸다. 이후 ‘아바스’(Abarth) 버전용 135, 160마력 엔진과 2기통 0.9L 트윈에어 엔진 등이 추가됐다.



안전성도 흠잡을 데 없다. 최대 7개의 에어백을 갖춘 데다, 유로 NCAP에서 별 다섯 개 만점을 받았다. 인테리어 컬러, 데커레이션 스티커 등 피아트 500을 꾸밀 수 있는 조합의 수만 수십만 가지가 넘는다. 현재 국내엔 병행수입업체가 들여온 일부가 굴러다닌다. 빠르면 올해 안에, 피아트와 동맹을 맺은 크라이슬러를 통해 국내에 공식 수입될 전망이다.


◆ 미니 쿠퍼 
석유 고갈에 대한 위기감은 수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오늘날도 원유 값의 폭락에 울고 웃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면, 그 시기를 정확히 가늠할 수 없을 뿐 석유가 꾸준히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1956년의 영국이 그랬다. 수에즈 운하 사태로 원유 공급이 줄어들었고, 산업 전반이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석유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자동차 메이커의 어려움은 두 말할 나위도 없었다. 당시 영국 최대의 자동차 메이커, BMC의 엔지니어 알렉 이시고니스는 회사에 제안을 한다. 작으면서도 연비가 뛰어나고, 공간이 충분한 소형차를 만들어보자고. 그리스와 독일출신 부모 아래서 태어난 알렉 이시고니스는 자동차 설계와 드라이빙을 즐기는 애호가였다.



디자인에 착수한 지 3년 만인 1959년 9월, 미니가 선보였다. 세상은 깜짝 놀랐다. 3m를 살짝 넘는 차체 길이는 ‘작은 생쥐’라는 별명이 붙은 피아트 토폴리노보다 짧았다. 하지만 어른 4명과 짐까지 실을 수 있었다. 네 바퀴 독립식 서스펜션, 가로배치 엔진과 일체형으로 만든 변속기, 앞 펜더 안쪽에 붙인 라디에이터 등 공간활용을 위한 아이디어가 총동원됐다.


미니가 뜨거운 인기를 끈 건 단지 패키징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빼어난 운전재미가 인기에 날개를 달아줬다. 알렉 이시고니스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스피드광이었다. 그는 “설령 소형차라도 달리는 즐거움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시고니스가 존 쿠퍼와 손을 잡으면서, 가뜩이나 범상치 않던 미니의 운전재미는 한층 수위를 높이게 됐다.


존 쿠퍼는 끼가 다분한 엔지니어였다. 잭 브라밤, 스털링 모스, 브루스 맥라렌 등 전설적인 레이서가 몰던 경주차가 그의 작품이었다. 출시된 지 3년 만인 1961년 그의 입김이 스며든 미니 쿠퍼가 선보인다. 미니 쿠퍼는 1964~1967년 몬테카를로 랠리에 출전해 세 차례나 우승을 거뒀다. 원조 미니는 처음의 모습을 거의 유지한 채 2000년까지 생산됐다.



지난 2001년 4월, BMW의 품에서 거듭난 뉴 미니가 선보였다. 디자인은 원조 미니를 계승했지만 덩치는 키웠다. 550㎜ 길어졌고, 300㎜ 넓어졌으며 무게는 400㎏ 가까이 늘었다. 엔진은 직렬 4기통 1.6L 자연흡기와 수퍼차저, 토요타의 1.4L 디젤 등을 얹었다. 뉴 미니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BMW의 생산대수를 100만 대 이상으로 끌어 올렸다.


현재의 뉴 미니는 풀 모델과 마이너체인지를 한 차례씩 거친 2.5세대 째다. 지붕만 빼고 1세대 미니와 공유하는 패널이 없을 정도로 몽땅 다시 설계했다. 유럽 보행자 안전기준에 맞춰 보닛을 20㎜ 높이고, 헤드램프를 앞당겨 달았다. 그러면서도 살짝 통통해졌을 뿐, 좋은 반응을 얻었던 1세대 때의 얼굴을 유지했다. 지난해엔 범퍼 디자인을 다시 수정했다.



미니의 엔진은 크라이슬러와 공동개발한 트라이텍에서 PSA(푸조/시트로엥)와 BMW가 공동 개발한 직렬 4기통 1.6L로 바꿨다. 직분사 시스템과 BMW의 밸브트로닉 기술을 접목시켜 효율을 높였다. 고성능 버전인 JCW(존 쿠퍼 웍스)는 과급압 1.3바의 트윈 스크롤 터보 엔진을 얹고, 최고출력 211마력, 0→시속 100㎞ 가속 6.2초, 최고속도 시속 237㎞를 낸다.


미니의 진화는 ‘현재진행형’이다. 휠베이스를 늘려 뒷좌석과 짐 공간을 늘린 미니 클럽맨을 더한 데 이어, 최저지상고를 높인 미니 컨트리맨까지 선보였다. 지붕을 낮춘 미니 쿠페와 그나마의 지붕도 거둬낸 미니 로드스터도 내놨다. 원조 미니를 완성한 알렉 이시고니스와 존 쿠퍼는 일찍이 세상을 떴다. 하지만 그 이름과 철학은 미니라는 틀에 담겨 반세기 넘도록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 마이바흐  
메르세데스-벤츠는 지난 2002년, 60년 만에 초고급 브랜드 마이바흐를 부활시켰다. 브랜드 이름은 벤츠의 창업자 중 하나인 고틀리프 다임러의 밑에서 일하던 엔지니어 빌헬름 마이바흐(1846~1929)의 이름에서 따왔다. 다임러가 죽은 뒤 마이바흐는 회사 경영진과 잦은 마찰을 일으키다 1907년 회사를 떠나 체펠린 비행선의 엔진을 설계, 제작했다.


두 개의 M이 겹쳐진 로고는 당시 그가 세운 회사의 이름 ‘Maybach Manufaktur’에서 비롯된 것. 마이바흐는 아들 카를(Karl)과 함께 1919년부터 고급차 개발에 뛰어들어 2년 뒤 12기통 엔진을 얹은 첫 차를 내놨다. 마이바흐는 독일의 최고급차로 명성을 떨치며 1930년대를 주름잡았다. 1941년까지 1,800여 대가 생산되며 부호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역대 마이바흐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손꼽히는 모델은 그가 설계했던 비행선의 이름을 딴 체펠린(Zeppelin) DS8. 길이 5.5m로 당시 독일차 가운데 가장 길었다. 지난 2007년 일본에서 열린 도쿄 콩쿠르 델레강스에서는 독일 벤츠 박물관이 소장한, 섀시넘버 1387의 1932년형 체펠린 DS8이 마이바흐 62S와 나란히 전시돼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체펠린 DS8은 도어가 네 개 달린 6~7인승 초호화 카브리올레. 덩치는 길이를 빼곤 마이바흐 62S를 압도한다. 휠베이스만 3,735㎜다. 엔진은 체펠린 비행선의 심장을 기본으로 손질한 V12 7천922cc. 3천200rpm에서 200마력을 냈다. 최고속도는 시속 170㎞. 리지드 스프링과 유압식 쇼크업소버를 달아 오늘날 고급차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승차감을 뽐낸다.


마이바흐는 메르세데스-벤츠가 BMW의 롤스로이스, 폭스바겐의 벤틀리·부가티와 맞겨루기 위해 내세운 비장의 카드, 회심의 역작. 1997년 도쿄 모터쇼에서 컨셉트카를 선보인 후 41대의 테스트카와 238개의 엔진을 만든 끝에 2002년 6월, 퀸엘리자베스 2호로 대서양을 횡단하고 헬리콥터로 월스트리트 한 복판에 마이바흐를 내려놓는 ‘깜짝쇼’를 거쳐 데뷔했다.


마이바흐는 57과 휠베이스를 437㎜ 늘린 62의 두 가지 보디로 나온다. 공기저항계수(Cd)는 0.31. 바이 제논 방식 헤드램프와 세로줄이 촘촘하게 박힌 라디에이터 그릴, LED 528개를 박아 넣은 테일램프가 시선을 압도한다. 도어, 루프, 보닛 등은 알루미늄으로 만들었지만 워낙 덩치가 크다보니 무게는 마이바흐 57조차 2.5톤을 훌쩍 넘는다.



엔진은 벤츠 S 600의 V12 트윈터보를 손질해 얹었다. 마이바흐 57과 62엔 V12 5.5ℓ550마력, ‘스페셜’을 뜻하는 ‘S’가 붙은 고성능 버전 57S와 62S엔 V12 6.0ℓ612마력을 얹는다. 성능은 57S가 가장 뛰어난데, 0→시속 100㎞ 가속을 5초에 마치며 최고속도는 시속 250㎞에 제한된다. 변속기는 엄청난 토크를 감안해 내구성이 검증된 자동 5단을 달았다.


앞 더블 위시본, 뒤 멀티링크 방식의 서스펜션엔 에어매틱 DC(Airmatic Dual Control) 시스템을 어울려 최고의 승차감을 완성했다. 0.05초마다 차체의 움직임을 체크해 댐퍼의 공기압을 6~10바로 변화시키거나 차체를 15㎜까지 낮춘다.


한편, 마이바흐는 내년 생산을 중단할 것으로 알려졌다. 판매부진 때문이다. 마이바흐의 빈자리는 내년 선보일 신형 S-클래스의 리무진 버전이 대체할 예정이다.


◆ 롤스로이스 팬텀 
1901년 전구용 필라멘트 회사를 운영하던 프레드릭 로이스가 프랑스의 데카 2기통 차를 사들였다. 차의 형편없는 성능에 열 받은 그는 2기통 1.8L 10마력 엔진을 얹은 3대의 차를 직접 만들었다. 그의 차가 조용하고, 회전이 매끄럽다는 소문이 당시 자동차 딜러를 운영하며 레이서로 활약하던 귀족 찰스 스튜어트 롤스의 귀에 들어갔다.


롤스는 로이스에게 자동차 회사를 만들자고 제의한다. 롤스로이스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롤스로이스의 첫 번째 판매용 모델은 1906년 선보였다. 같은 해 롤스로이스는 런던 모터쇼에 직렬 6기통 6.2L 48마력 엔진을 얹은 실버고스트도 내놓는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을 본뜬 웅장한 라디에이터 그릴과 마스코트의 전통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1925년엔 실버고스트의 후속으로 팬텀을 내놓는다. 팬텀은 푸시로드 OHV 방식의 신형 직렬 6기통 7,668㏄ 엔진을 얹었다. 영국의 더비 공장과 미국 메사추세스주 스프링필드의 두 나라 공장에서 생산됐는데, 영국 쪽 팬텀이 더 길었다. 팬텀 시리즈는 Ⅵ까지 진화되며 1991년까지 당대 최고급 세단의 왕좌를 지켰다.


1998년, 2%의 지분을 가지고 있던 BMW가 롤스로이스 인수에 관심을 나타내자 폭스바겐 그룹이 7억1,300만 달러를 제시하면서 불꽃 튀는 맞대결이 시작됐다. 결국 롤스로이스의 크루 공장과 벤틀리는 폭스바겐이, 롤스로이스 브랜드는 BMW가 차지했다. BMW는 영국 굿우드에 새 공장을 세우고 팬텀(코드명 RR01) 개발에 들어갔다. 



예정보다 사흘 늦은 2003년 1월 3일, 굿우드 공장에서 팬텀이 부활했다. BMW의 롤스로이스 개발팀은 전 세계를 돌았다. 롤스로이스 오너와 기자, 딜러, 기술자를 만나 브랜드의 철학과 가치를 배웠다. 신형 팬텀의 디자인은 이안 카메론의 솜씨. 영국 런던 하이드 파크 인근의 스튜디어에서 팬텀Ⅱ, 실버 새도, 실버 클라우드 등을 참고해 완성했다.  


뒤 도어는 역방향으로 열린다. 또한, 실내에서 C필러에 달린 스위치를 누르면 자동으로 닫힌다. 아울러 개방감을 높이고, 타고 내리기 쉽게 하기 위해 B필러를 없앴다. 2인용 독립식 뒷좌석을 갖춘 마이바흐와 달리 팬텀의 뒷좌석엔 3명까지 앉을 수 있다. 휠베이스를 늘려 뒷좌석 공간을 넓힌 팬텀 EWB를 비롯해 쿠페와 컨버터블까지 나왔다.



팬텀의 엔진은 직분사 방식 V12. 롤스로이스의 전통을 부각시키기 위해 배기량을 1970년에 개발된 롤스로이스제 V8 OHV 엔진과 같은 6.75L로 키웠다. 5,350rpm에서 최고 출력 453마력, 3,500rpm에서 최대토크 73.4㎏·m을 낸다. 변속기는 ZF제 자동 6단. 성능은 0→시속 100㎞ 가속을 5.9초에 마치고, 최고속도는 시속 240㎞에서 제한된다.


서스펜션은 앞 더블 위시본, 뒤 멀티링크 구조에 에어 스프링을 어울려 마이바흐와 비슷하다. 그러나 마이바흐보다 다섯 배나 빠른 0.01초마다 차체의 움직임을 체크한다. 스티어링은 리서큘레이팅 볼 방식의 마이바흐와 달리 최근 유행하는 랙 앤드 피니언 방식을 쓴다. 앞뒤 무게배분은 BMW의 고집에 따라 5:5로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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