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노-닛산 카를로스 곤 기자간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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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노-닛산 카를로스 곤 기자간담회
  • 김기범
  • 승인 2012.07.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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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일, 르노-닛산의 카를로스 곤 회장이 한국을 찾았다. 지난달 27일 카를로스 타바레스 그룹 최고 운영자가 방한한 지 한 달도 지나기 전이다. 그룹 내 서열 1~2위의 최고위층이 잇달아 한국을 찾은 이유는 르노삼성 때문. 국내 시장점유율이 심각하게 떨어지고 있어서다. 올 상반기 르노삼성의 판매는 수출을 포함 8만3천62대. 전년보다 32.8% 추락했다. 




(사진 왼쪽부터) 질 노만 르노자동차 아시아-태평양 지역 총괄 부사장, 
프랑수아 프로보 르노삼성자동차 사장, 카를로스 곤 르노닛산 얼라이언스 회장 


설상가상으로 판매는 하강곡선을 그리는 중이다. 따라서 최근 증권가에선 꾸준히 르노삼성 매각설이 불거져 나왔다. 르노삼성도 원인 분석에 나섰다. 하지만 결론은 묘연했다. 정작 소비자 만족도엔 큰 변화가 없는 까닭이다. 따라서 단기적 처방은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난달 타바레스 부회장은 “내년 소형 크로스오버 SUV를 국내에 선보이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르노삼성은 르노 그룹 내에서 준중형 이상 고급차와 SUV 개발의 핵심 역할을 지속적으로 맡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르노 그룹은 지난 10년간 1조7천억 원을 투자해 사업을 이어왔다. 르노삼성은 60개국에 10만여 대의 차를 수출하는 주요 거점”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불신의 늪은 깊었다. 부회장의 방한은 오히려 위기설에 불씨를 지폈다.


급기야 카를로스 곤이 직접 찾아왔다. 이날 발표내용은 행사 직전까지 철저한 보안이 유지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김이 팍 새버렸다. 니혼게이자이(일본경제) 신문이 엠바고를 깨고 미리 보도했기 때문. 따라서 기자회견 하루 전날 내용이 알려졌다. “2014년부터 부산의 르노삼성 공장에서 닛산 로그를 연간 8만 대 생산해 북미에 수출하겠다”는 게 핵심이었다.



르노삼성 부산공장의 생산능력은 30만 대. 최소 공정시간을 감안해 최대치로 가동했을 경우 생산대수다. 그러나 올해 생산대수는 17만 대 수준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원래 신형 로그는 미국의 닛산 공장을 확장해 생산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3만 대를 더 만들 수 있는 부산 공장을 활용하겠다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르노 그룹은 1700억 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이날 “결국 신규 공장증설 비용을 줄이기 위해 부산 공장을 이용하는 것뿐 아니냐”는 질문이 나왔다. 곤 회장은 즉각 부인했다. 그는 “부산 공장의 경쟁력을 높게 사기 때문에 생산기지로 결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그는 “르노삼성의 회생을 위한 구체적인 전략을 마련했다”고 강조했다. 또한, “마케팅과 영업전략, 가격을 다듬어 가겠다”고 덧붙였다.


매각설도 “소문은 소문일 뿐”이라고 일축하고, “매각할 회사에 이렇게 투자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르노삼성차의 부진 원인에 대해 “꾸준한 성장에 대해 내부적으로 만족했다. 이 때문에 경쟁력에 뒤쳐진 것 같다”고 진단했다. 현대기아차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엔 “CEO로 재직하며 단 한 번도 경쟁사 이야기를 언급한 적 없다”며 답변을 피했다.



르노삼성차는 내년 SM3 전기차와 소형 크로스오버 SUV를 투입한다. 기존 생산 차종의 부품 국산화율도 내년까지 80%까지 높인다. 또한, 최근 3.2%까지 떨어진 시장점유율을 10%대로 회복시킬 계획이다. 닛산 신형 로그는 부산 공장에서 2014년부터 2020년까지 총 48만 대를 생산한다. 곤 회장은 “그룹 차원에서 르노삼성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카를로스 곤은 누구?

1978년, 방년 24세의 젊은이가 미쉐린에 입사했다. 당시 미쉐린은 브라질에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참이었다. 젊은이는 연구개발 부서로 배치됐다. 그러나 그는 현장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편한 자리를 마다하고 제조부서로 옮긴다. 입사 8년 만인 1985년, 그는 31세의 어린 나이에 브라질 미쉐린의 CEO에 올랐다. 그 젊은이가 바로 카를로스 곤이었다.


그는 1천%가 넘는 살인적인 인플레이에 시달리고 있던 브라질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 4년 후엔 북미 미쉐린 사장 자리를 꿰어 찼다. 먼 프랑스에서 그의 활약을 유심히 지켜보던 이가 있었다. 바로 르노의 루이 슈바이처 회장이었다. 슈바이처는 적자로 시름하던 르노를 살릴 인재로 곤을 점찍었다. 1996년 12월, 곤은 르노의 수석부사장으로 스카우트됐다.


카를로스 곤은 하청업체의 제조비용이 전체 비용의 50%에 달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1천200개의 하청업체를 150개로 줄여 버렸다. 한 업체 당 납품규모는 자연스레 늘어났다. 대신 납품가를 처절하게 깎았다. 그 결과 르노는 차 한 대 당 77만 원에 가까운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그가 서슬 퍼런 칼자루를 뽑아든 지 단 2년 만에 르노는 흑자로 돌아섰다.


1997년엔 3천 명을 해고하면서 벨기에 공장을 닫았다.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됐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3년 동안 9천 명을 추가로 해고했다. 카를로스 곤이 ‘코스트 킬러’ ‘코스트 커터’ 등의 달갑지 않은 별명을 얻은 이유다. 그는 또한 개발기간을 60개월에서 40개월로, 개발 후 양산까지 걸리는 시간을 6개월에서 3개월로 단축시켰다.


르노의 슈바이처 회장은 한 가족으로 거듭난 닛산을 살릴 주인공으로 카를로스 곤을 지목했다. 1999년 6월 25일 열린 주주총회에서 카를로스 곤은 닛산의 대표이사 최고집행책임자인 COO로 선임됐다. 아울러 르노의 관리직 17명이 9월 1일 닛산에 입성했다. 곤은 르노와 닛산을 지역별 대신 기능별로 통합한 ‘세계 본사’의 개념을 제시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는 꼭 필요한 인재는 과감히 스카우트했다. 이스즈의 시로 나카무라가 닛산으로 옮겨온 것도 이즈음이었다. 나카무라는 “디자인에도 경영의 개념이 필요하다”는 곤의 생각에 공감해 짐을 꾸렸다고 밝힌 바 있다. 본사 홍보부장도 JP 모건 출신의 여성으로 바꿨다. 일본기업에선 흔치 않은 경우였다. 그러나 능력을 중시하는 곤에겐 너무나 당연한 결정이었다.


동시에 닛산의 많은 고위직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스러져 갔다. 주요 국가별로 나뉘어 있던 자금조달 경로도 닛산 본사로 단일화했다. 각 자회사의 부채는 그룹 내부자금으로 대체해 이자부담을 줄였다. 자연스레 돈 줄을 쥐고 있던 은행의 발언권도 약화됐다. 관료주의·연공서열·종신고용·노사유착 등 닛산의 뼛속 깊이 스몄던 병폐는 점차 발붙일 곳을 잃어갔다.


아울러 젊은 사원 위주로 9개의 팀을 만들어 ‘닛산 리바이벌 플랜’의 아이디어를 공모했다. ‘구매’ ‘재무비용’ 등 기능별로 나뉜 이 팀은 ‘반짝 모임’에 그치지 않고, ‘사내기능횡단팀’(CFT, Cross Funtional Team)으로 정식 발족됐다. ‘누구도 두려워 않고, 중도에 굴하지 않으며 줄기차게,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고’. 결연한 각오가 서린 CFT의 기본정신이었다.


개혁의 강도는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닛산 리바이벌 플랜’이 궤도에 오르면서 닛산자동차는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아울러 수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일본기업에선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이 엄연한 현실로 펼쳐졌다. 그러나 나날이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이자만 바라보며 체념에 빠져있던 과거와는 분명히 다른 상황이었다.


2000년 닛산자동차 전체비용의 8%에 달하던 구매비용을 2002년 6.5%로 줄었다. 2001년 3월 무라야마 공장과 닛산차체의 교토공장, 아이치 기계항의 공장이 폐쇄됐다. 이듬해엔 구리하마 공장과 큐슈 엔진 공장마저 판금 등 최소한의 기능을 위한 인원만 남겨둔 채 문을 닫았다. 50%를 간신히 넘겼던 공장 가동률을 2006년 84%까지 끌어올린 비결이었다.


인력도 과감히 줄였다. 전 세계적으로 닛산자동차는 제조 4천 명, 일본 국내 판매회사 6천500명, 판매·일반 관리 6천 명을 줄였고, 사업 매각으로 5천 명이 이동했다. 부품공급업체는 1천145개에서 801로 30% 가까이 줄였다. 비용구조가 투명해지면서 책임도 명확해졌다. 사정이 어렵다고 계열사 사이에 손을 벌리는 ‘인지상정’(人之常情)격의 행위도 사라졌다.


플랫폼 통합도 가속화됐다. 곤이 부임했을 때 닛산의 46개 모델 가운데 수익을 내는 건 단 세 모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보유 주식과 계열사도 정리했다. 2000년엔 스바루를 거느린 후지중공업 지분을 GM에 매각했다. 최근 토요타가 GM의 후지중공업 지분을 사들이면서 실질적으로 스바루를 거느리게 됐다. 닛산은 앞서 직기관련 사업부도 토요타에 넘겼다.


카를로스 곤은 ‘닛산 리바이벌 플랜’을 발표한 지 단 19개월 만에 좌초 위기에 빠졌던 닛산을 흑자 기업으로 돌려놨다. 1999년 자동차 메이커별 시가총액 순위에서 10위와 11위를 기록했던 닛산과 르노는 2006년 각각 4위, 7위로 단숨에 도약했다. 지난해 르노-닛산 얼라이언스는 전 세계 200개국에서 800만 대를 차를 팔았다. 판매대수 기준, GM와 폭스바겐에 이은 세계 3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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