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딜락 에스컬레이드 시승기

2012-08-03     김기범

주위를 압도하는 덩치와 지칠 줄 모르는 파워. 처음엔 우월감에 도취돼 괜스레 거들먹거렸다. 마땅한 적수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선 되레 너그러워졌다. 캐딜락 에스컬레이드와 몸을 포갠 이틀 동안, 난 소인국을 성큼성큼 휘젓는 걸리버였다. 거대한 허울을 뒤집어쓴 나. 누가 봐도 낯설었겠지만, 누구보다 낯설어 견딜 수 없었던 건 바로 나 자신이었다.



‘콩으로 메주를 쒔다’는 얘기만큼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에스컬레이드는 거대하다. 덩치만 ‘풀 사이즈’가 아니라, 차의 각 요소 또한 예외 없이 ‘풀 사이즈’. 어른 머리통만한 사이드 미러에 말문이 턱 막혀 온다. 지금껏 살면서 체득한 축적의 개념이 뿌리부터 흔들거린다. 주위 모든 것이 작고 어쭙잖아 보이는 ‘착시 현상’에 빠져드는 건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길이야 허리 춤 지긋이 늘려 ‘L’자 붙인 세단을 넘어서기야 하겠냐만, 높이가 어지간한 SUV의 등판을 내려다볼 정도다. 너비는 2m에 가깝다. 웅크리고 선 모습만 봐도 가슴이 옥죄어오는데, 하물며 맹렬히 포효하며 꽁무니 뒤에 바짝 붙은 에스컬레이드의 존재감과 위압감은 어떨까. 우연찮게 한 번이면 모를까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을 ‘공포체험’일 것이다.



(좌측부터) 1세대 에스컬레이드, 2세대 에스컬레이드


캐딜락 에스컬레이드는 1998년 데뷔했다. 브랜드 백화점, GM에게 SUV 한 대 뚝딱 만들기는 일도 아니었다. 경영진의 승인이 떨어진지 불과 10개월 만에 텍사스의 알링턴 공장에서 에스컬레이드가 굴러 나오기 시작했다. 캐딜락 최초의 SUV가 태어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첫술에 배부를까. 기본이 된 GMC 유콘 데날리의 잔영이 이곳저곳에 묻어났다. 한 차례 숨을 고른 캐딜락은 2002년 2세대 에스컬레이드를 내놓는다. ‘에지(Edge)’를 주제 삼은 캐딜락의 새 디자인 테마를 처음 녹여 넣어 GMC의 ‘이란성 쌍둥이’와 뚜렷한 경계선을 그었다. 인테리어는 현란해졌다. 인포테인먼트 장비도 튼실해졌다. 2세대에 이르러 에스컬레이드는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부의 상징’ ‘신분 상승의 징표’로 자리매김했다.



2007년 에스컬레이드는 3세대로 다시 한 번 거듭났다. 뼈대는 GM의 풀 사이즈 픽업·SUV 플랫폼인 GMT920. 프레임 위에 보디를 얹은 구조다. 2세대 때보다 차체 강성은 35%, 비틀림 강성은 49% 늘었다. 엔진은 V8 6.2ℓ OHV의 ‘볼텍(Vortec) 6200’. 1955년 처음으로 양산에 들어간 GM의 스몰 블록 V8 엔진의 4세대 째에 해당된다. 2세대 에스컬레이드의 V8 6.0ℓ 엔진과 같은 부분은 10%에 불과하다. 알루미늄 실린더 헤드엔 콜벳 Z06의 심장, V8 7.0ℓ LS7의 노하우가 녹아들었다. 나아가 흡배기 양쪽엔 가변 밸브 타이밍 시스템, ‘VVT’(Variable Valve Timing)를 얹어 엔진회전수에 따라 ‘들숨’과 ‘날숨’의 빈도를 두 단계로 주물러 막강한 토크를 줄기차게 뽑아낸다.



배기량을 키우고 ‘VVT’를 달면서 최고출력은 345에서 403마력, 최대토크는 52.4에서 57.6㎏·m로 늘었다. 여기에 이전의 4단에서 6단으로 성큼 진화한 자동 변속기, ‘하이드라매틱’(Hydra-Matic) 6L80을 붙였다. 강력한 엔진과 영리한 변속기가 만났으니 연비도 좋아질 수밖에. 공인연비는 5.9㎞/ℓ. 2세대 때는 5.6㎞/ℓ였다. 실주행 연비는 4.6㎞/ℓ정도다. 서스펜션은 앞쪽을 더블 위시본에서 스트럿, 뒤쪽은 같은 멀티링크지만 독립식 ‘I-라이드’(I-Ride) 구성으로 변화를 줬다. 아울러 ‘전자제어식 로드 센싱 시스템’을 갖춰 댐핑 압력을 조절해 최적의 승차감을 이끈다. 차체의 불필요한 움직임도 억제할 수 있게 됐다. 굴림방식은 풀타임 AWD. 앞뒤 38:62를 기본으로 상황에 따라 분주히 구동력을 주고받는다.



원가절감의 부담이 덜한 ‘호화 SUV’인 만큼, 안팎을 뒤덮은 ‘과잉’(過剩)의 수위는 한껏 높였다. 휘황찬란한 광채를 머금은 22인치 휠이 단적인 예다. 디자인을 다듬어 부피감을 강조하면서 덩치는 이제 우람한 수준을 넘어 버겁게 느껴진다. 스케일이 워낙 커서, 가까이선 전체적인 조형미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 어떻게 운전해야 할지 걱정이 덜컥 앞선다. 도어를 열면, 사이드스텝이 스르륵 펼쳐진다. 계단을 오르는 기분이다. 운전석은 시점이 높고 시야가 넓다. 망루가 따로 없다. 32인치 TV로 보던 풍경을 60인치로 감상하는 기분이다. 편의장비는 깨알 같이 박힌 스위치 개수가 대변한다. 센터페시아의 모니터는 위성 DMB와 내비게이션을 띄운다. 2열의 독립식 시트는 팔걸이까지 갖춰 ‘연예인밴’이 부럽지 않다.



키를 비틀어 숨통을 트면, 나지막한 V8의 포효가 가슴을 휘젓는다.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보닛이 차선을 가득 물었다. 그것도 모자라 초대형 사이드 미러가 양쪽으로 길게 팔을 뻗었다. 선입견과 달리 운전은 까다롭지 않다. 금세 덩치를 잊은 채 승용차 몰듯 휘휘 몰게 된다. 푸근한 시트에 비스듬히 앉아, 주위를 내려다보며 달리는 쾌감이 압권이다. 스티어링 시스템을 2세대 때의 ‘리서큘레이팅 볼’에서 ‘랙 앤드 피니언’ 방식으로 바꾸면서 유격이 눈에 띄게 줄었다. 생각 없이 운전대를 흔들면, 육중한 몸집을 부지런히 뒤채며 섬세한 운전을 채근한다. 핸들링 또한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다. 수퍼 헤비급 덩치와 무게를 까맣게 잊게 된다. 매끄럽고 리드미컬하게 코너를 헤집는다. 승차감도 훌륭하다.



가속 성능은 ‘짜릿’ 그 자체. 드로틀을 활짝 열면, 찰나 휠 스핀까지 일으키며 맹렬히 튀어 나간다. 에스컬레이드의 제원 가속 성능은 0→시속 96㎞(60마일) 6.8초. 호쾌한 가속은 시속 180㎞에서 매몰차게 끊긴다. 6단 3500rpm밖에 되지 않지만, 연료가 차단돼 더 달릴 수 없다. 캐딜락 에스컬레이드는 과시하고 싶고, 우월하고 싶은 ‘원초적 본능’에 날개를 달아주는 ‘기폭제’ 같은 존재다. 지구온난화·자원고갈을 앞당기는 ‘촉진제’일는지 모른다. 크기·성능·연비 어떤 잣대를 들이댄들 ‘과잉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선망의 시선을 거둘 수 없다. ‘웰빙’을 부르짖으면서도 고칼로리 음식의 유혹에서 헤어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글 김기범│사진 캐딜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