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했던 차] 현대차의 엘렌트라

2017-09-04     김상혁

한 나라의 자동차 시장의 성장은 많은 변화를 불러 온다. 자동차 시장의 초창기에는 단순하고 저렴하며 유지보수가 용이한 저가형 자동차들이 주류를 이룬다. 그리고 자동차 시장의 규모가 성장하게 되면 소비자들은 단순한 이동수단을 넘은, 다른 가치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이러한 가치에는 디자인이나 공간, 연비, 혹은 자동차의 성능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자동차 시장이 성능과 같은 가치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때는 1990년대. 88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이래 국가경제가 전례 없는 호황을 달리고 있던 시기다.

현대자동차의 준중형 세단, 엘란트라가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낸 1990년 10월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자동차 보급률이 높아지면서 단순한 이동수단을 넘은 가치에 대한 열망이 자라나기 시작한 시절이었다. 현대자동차는 엘란트라 개발에 약 4년여간의 시간과 약 4,100억 원을 개발비로 투입했다. 엘란트라는 프로젝트명 ‘J’로 개발되면서 차종 간 플랫폼 공유를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기본 골격은 상위 차종인 그랜저와 쏘나타의 것을 각각 차용했다. 이 과정에서 전륜맥퍼슨 스트럿, 후륜 토션빔 서스펜션을 가져왔다.

엔진은 90마력의 성능을 가진 1.5L 엔진과 126마력의 성능을 가진 1.6 엔진을 얹었다. 당시 기준으로 걸출한 성능을 냈던 엘란트라의 엔진은 성능에 목 마른 소비자의 입맛을 당기기에 충분했다. 이후 135마력의 성능을 지닌 1.8L 미쓰비시 오리온 엔진을 추가하며 당대 최고 성능의 준중형 차량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시장에서 엘란트라와 대결을 벌인 상대는 대우자동차의 에스페로와 기아 자동차의 캐피탈. 캐피탈은 엘란트라보다 1년 먼저 등장했고, 에스페로는 엘란트라보다 한 달 먼저 등장했다. 세 차종은 시장 진입 초기에는 대등하게 경쟁을 벌였으나, 1992년부터는 뛰어난 상품성을 지녔던 엘란트라가 준중형 시장을 거의 장악하게 된다.

엘란트라는 1990년대 국내 소비자의 갈망을 정확하게 짚어낸 차이기도 하다. 1990년대 자동차 산업은 국가 경제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전환점을 맞은 시기였다. 소비자들이 자동차에 요구하는 것이 다양해짐에 따라 그에 맞는 자동차를 개발 및 판매해야 했던 것이다.


1990년대 초반은 스포츠카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고 동시에 여유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했다. 엘란트라의 차체 사이즈는 4,375 X 1,675 X 1,395mm로, 오늘날 기준으로 본다면 작은 편이었다. 하지만 체적에 비해 넓은 실내공간을 확보했고 접을 수 있는 뒷좌석 등을 도입하여 공간 활용에서 큰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고출력 엔진과 모터스포츠 활동을 앞세워 고성능 세단 이미지를 부각시키며 소비자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지난 1991년~1993년 호주 랠리 비개조 차량에 부분에서 1위를 차지하며 내구성과 성능도 인정받았다. 이는 현재 i30N으로 까지 이어지고 있는 현대자동차 모터스포츠 역사의 첫 발을 디딘 자동차의 의미도 크다.

엘란트라는 아우토반에서의 엘란트라 VS 포르쉐 911 광고로 당시는 물론 현재에도 자동차 광고의 무리수 BEST로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호주 랠리 당시 엘란트라가 포르쉐 911을 제치고 1위를 거머쥔 데서 비롯됐다는 후문이 있다. 엘란트라는 현대자동차로서는 고성능에 대해 상당히 자신감을 내비쳤던 모델이라 할 수 있다. 비록 당시에도 지금도 “포르쉐 측이 1단으로만 달려서 그렇다”라는 비아냥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엘란트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을 살았지만 발자취 만큼은 길고 넓다. 1990년에 출시된 이래 1995년 단종될때까지 약 58만대의 판매실적을 올렸다. 또한 해외에서도 두문자 E를 뺀 ‘란트라(Lantra)’ 라는 이름으로 판매되며 약 36만대의 판매고를 올렸다. 엘란트라는 훗날 대한민국 준중형차 시장의 왕좌를 차지하게 되는 아반떼에게 바톤을 넘기고 역사 속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엘란트라의 이름은 아반떼의 해외수출명 ‘엘란트라’로 여전히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