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을 돌아보다]세르지오 스칼리에티 편

2017-11-28     박병하

100년을 넘어간 인류의 자동차 역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노력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이는 기술적인 부문에서, 어떤 이는 경영의 측면에서, 또 어떤 이는 심미적인 부문에서 혁신을 제시하고 이를 성취해 냄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또한 모터 스포츠에서의 전설적인 활약으로 이름을 날렸던 이들도 있다. 본연재는 자동차의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들에 대하여 돌아 보고자 한다. 그 첫 번째 이야기는 페라리의수많은 명차들을 손수 빚어낸 장인, ‘세르지오 스칼리에티’에대한 이야기다.

세르지오 스칼리에티(SergioScaglietti, 1920~2011)는 이탈리아의 디자이너이자 기업가로, 1950~70년대를장식한 페라리의 명차들을 빚어낸 카로체리아 스칼리에티(Carrozzeria Scaglietti)를 세우고활동했다. 1920년 이탈리아 모데나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동차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그는 이미 8살에 점토와 철사를 이용하여 경주용 자동차의 형상을만들었다. 그리고 13살의 나이에 카로체리아(Carrozzeria)의 견습공으로 취직하면서 본격적으로 자동차와 연을 맺었다.

카로체리아(혹은코치빌더)란 자동차의 차체 및 각종 의장품을 제작하여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곳을 말한다. 자동차 역사의 초창기, 자동차 제조사란 곧 자동차의 ‘섀시’만 제작하는 곳이었다. 따라서자동차를 구매하려는 사람은 먼저 자동차 제조사에 파워트레인과 섀시의 제작 및 조립을 의뢰하고, 그것이완성되면 이를 별도의 공방에 가져가 차체를 비롯한 각종 의장품을 제작 및 설치해야 비로소 완성된 자동차를 가질 수 있었다. 여기서 이르는 공방이 바로 카로체리아다.

스칼리에티가 엔초 페라리를 만난 것은 카로체리아 취업후 6년이 지난 1939년이었다. 스쿠데리아 페라이의 레이서가 자신의 알파 로메오 경주차(이 당시스쿠데리아 페라리는 아마추어 레이서들에게 알파 로메오의 경주차를 지원해 주던 단체였다)를 들이 받아사고를 내서 차체가 대파되어 근처의 공장에 수리를 의뢰했다. 그런데 이 수리를 맡은 사람이 바로 스칼리에티였던것이다.

스칼리에티는 사고가 난 경주차를 수리하면서 휀더 등의부위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개조를 했다. 그리고 이것이 두 천재가 만나게 되는 단초가 되었다. 엔초 페라리는 그의 개조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고 하며, 그의 손으로개조된 알파 로메오 경주차는 공기역학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이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사업가로서 본격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된것은 1950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47년도에 자신의이름으로 창업한 엔초 페라리는 순수하게 레이싱 팀으로 ‘페라리 S.p.A’를이끌고자 하였으나,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때부터 페라리는 경주에 나갈 돈을 벌기 위해 일반 도로용 로드카를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창립한 지얼마 안 된 신생 기업인 이들에게는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한편, 스칼리에티는 1951년부터 자신의 이름을 내건 카로체리아를 창업하였고, 그 역시 안정적인 공급처가 필요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페라리는 이전부터 눈 여겨 보고 있었던 스칼리에티와 손을 잡게 되었다.

스칼리에티가 처음으로 빚어낸 페라리는 ‘500 몬디알(Mondial)’이었다. 이 때부터 스칼리에티는 페라리의 신차 개발에 섀시 단계부터 협업을 하기 시작했으며, 마라넬로의 페라리 공장과 함께 움직였다.

이후 스칼리에티는50~70년대에 태어난 페라리들 중 가장 성공적으로 평가 받는 걸작들을 디자인했다. 그의대표작으로는 250 테스타로사(Testarossa), 250 GT 캘리포니아, 250 GTO, 750/850 몬자(Monza)가 있으며, 고급 GT형 스포츠카인 365 GTB데이토나의 개발에도 관여했다.

그가 남긴 작품들은 만들어 진 지 반 세기를 넘은지금도 여전히 바래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스칼리에티가 빚은 차체는 하나같이 관능적인 아름다움과공기역학의 고려를 양립한 모습이 깊은 인상을 남긴다. 더군다나 그의 손을 거친 페라리들은 어느 하나똑같은 형태와 규격으로 만들어진 것이 없는, 그야말로 원-오프에가까운 차들이기 때문에 그 가치는 더욱 특별하다.

밀레 밀리아(MileMiglia)에 출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250 테스타로사는 과감하게 파낸 전면 휀더와 육감적인형상, 그리고 그를 이루는 유려한 곡선들이 경주용으로 만들어진 차에 우아함을 부여한다. 250 GT 캘리포니아는 그야말로 컨버터블형 GT의 이상향이라고불러도 좋을 정도로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뽐낸다.

특히 스칼리에티의 손길로 빚어진 경주차, 페라리 250 GTO의 외관은 `예술`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무엇보다도, 이 아름다운 차체는 전부 스칼리에티와 그의 장인들이 일일이 망치로 두드려서 빚어낸 형상이다. 현재 남아 있는 250 GTO들은 외장 부품이 서로 호환되지 않는경우가 많다.

페라리는 자사의 수많은 명작을 빚어낸 그의 공로를기리기 위해 2004년 발표한 V12 대형 GT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그 차의 이름이 바로 ‘612 스칼리에티’다. 612 스칼리에티는575M 마라넬로에 얹힌 5.7리터 V12 엔진에 넉넉하게 구성된 2+2 형 좌석 배치, 페라리 최초의 차체 자세 제어장치 및 트랙션 컨트롤을 채용하는 등, 599의등장 이전까지 페라리 로드카의 기함으로 통했다.

그리고 2011년,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페라리의 걸작들을 빚어낸 그의 뛰어난재능은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 고인의 사망 당시, 페라리의회장 루카 디 몬테제몰로는 다음과 같이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오늘은 페라리로서는 실로 슬픈 날이다. 우리는 친구이자동반자이면서, 페라리와 영원히 이어진 이름을 가진 사람을 잃고 말았다.세르지오 스칼리에티는 예술가의 유산을 남겼으며 그의 남다른 재능이 우리 역사 상 가장 아름다운 모델들을 만들어 냈다. 나를 포함하여 직선적으로 솔직하며 자신의 일을 완벽히 해내는 그를 알게 된 사람들은 사람들은 행운이다. 우리는 모두 그를 그리워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