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아름다움, 안락함의 삼위일체 - 그랜드 투어러 이야기

2018-03-27     박병하

이탈리아어로 그란투리스모(Gran Turismo), 영어로 그랜드 투어러(Grand Tourer) 내지는약어로 ‘GT’라 불리는 차들이 있다. GT란 ‘장거리를 안락하고 고속으로 운행할 수 있으면서도 넉넉한 공간과 고급 편의장비를 갖춘 고성능 자동차’로 요약할 수 있다. 근래에는 GT라는단어의 의미가 조금 달라졌다. 조금이라도 고성능이거나 스포티한 요소를 부각시키고자 하는 차종에 붙이는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GT는오늘날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것과는 다른 측면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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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의 연원은 17세기 말의 영국 귀족 계층의 교육 문화인‘그랜드 투어(Grand Tour)’에서 비롯되었다. 17세기 말엽, 유럽 각국의 종교갈등 완화와 더불어 전세계적으로진행된 광범위한 식민지 확장 등으로 인해 세계의 부가 본격적으로 유럽에 몰리기 시작했다. 특히 이 당시영국은 인도와 더불어 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등, 세계 각국에서 식민지를 운영하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고 있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식민지를 통해 유입된 부는영국의 상류층에 몰리기 시작했다.

이 당시부터 영국의 귀족 및 신사 계급의 상류층에서는자신의 자제들에게 상류층 사이에서 통용되는 예법과 교양을 교육시키기 위한 장기 여행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여행에서 빠지지 않는 장소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였다. 프랑스로 향하는 이유는 당시 유럽의 상류층과 외교무대에서의 필수 소양인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한 목적이 가장 컸다. 이 당시 프랑스어의 위상은 현대의영어에 상응하는 국제 공용어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유럽의 귀족들은 자기가 속한 나라의 말은할 줄 몰라도 프랑스어는 구사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유럽 각국의 지식인들 역시 수많은 저서를 프랑스어로남길 정도였다.

이탈리아에는 지금까지도 로마의 문화유산과 함께 르네상스를통해 성립된 고전 문화의 유산이 남아있다. 이들 문화는 유럽 문화의 뿌리라고도 할 수 있으며, 현재도 유럽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영국과 독일, 스칸디나비아 등지의 상류층에서 이를 직접 경험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게 작용했다. 또한 문화적으로 앞선 이탈리아의 각종 예술품들을 사들이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이 여행은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필수 코스로 두고, 그 외에 스위스나 독일, 네덜란드 등 유럽의 주요국가들을 한 번씩 거치기도 했다. 그야말로전 유럽을 일주하는 ‘장대한 여정’이었던 셈이다.

자동차가 통용되지 않았던 그 시절, 이와 같은 장거리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특별한 마차가 필요했다. 이여행에서는 귀족의 자제들을 관리하고 가르치기 위한 가정 교사들이 동행 해야 했으며 타고 있는 귀족의 위신을 세워줘야 하기 때문에 충분히 호화롭게만들어져야 했다. 또한 워낙 장기적인 여행이었기 때문에 많은 짐을 실을 수 있으면서도 튼튼해야 했다. 이러한 장거리 여행을 위해 만들어진 귀족들의 최고급 마차들이 바로 오늘날 GT의연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랜드 투어를 뼈대로 하는 여행 문화는 자동차의 시대에접어들어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유럽 자동차 역사의 초기에 자동차는 여전히 유산계급의 전유물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장거리 여행을 위한 자동차들이 만들어졌다. 이렇게해서 만들어진 개념이 바로 오늘날의 GT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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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는 태생부터 평범한 사람과 평범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차가 아니었다. 본래의 목적이 온 유럽을 일주하는 여정에도 끄떡 없는 차였으니 말이다. 넉넉한공간과 우수한 승차감은 기본에 장거리 운행에도 끄떡 없는 강력한 동력성능 또한 요구되었다. 타는 이의격조를 높여주는 아름다운 외관과 고급스러운 내장재 또한 GT의 필수 덕목 중 하나였다. 따라서 전통적인 GT는 여러모로 까다로운 조건을 요구하기에 주로고급 자동차 제조사에서 만들어진다.

전통적인 GT는큰 차체에서 오는 넉넉한 실내 공간 및 트렁크 공간, 그리고 고속 크루징이 가능하면서도 안락한 승차감을제공해야 한다. 전형적인 GT는 길이 4미터 중~후반대의 대형의 2~3도어쿠페형 차체를 지닌다. 대부분의 퓨어 스포츠카들이 길이 4미터내외의 짧은 차체를 지니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큰 차체는 2명의성인을 위한 넉넉한 실내 공간 및 짐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인 GT형 쿠페들은 2+2 좌석 구성과 더불어 트렁크에 골프백 1개 정도는 수납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울러큰 차체는 장거리를 고속 항주하는 데 유리하고 승차감을 향상시키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이 외에도 GT는퓨어 스포츠카와는 달리, 호화롭게 꾸며진 내장재와 세단 뺨치는 각종 편의장비들이 탑재된다. 또한 1천km 이상의장거리를 운행하면서도 항시 최상의 성능을 내기 위해 크고 강력한 엔진을 탑재한다. 이를 통해 정통에가까운 GT는 200km/h 가량의 고속으로 항속 주행이가능하도록 만들어진다. 그러면서도 운전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안락한 승차감과 주행 안정성을 유지해야한다. 또한 과거부터 정통 GT는 암묵적으로 후륜구동의 사용이일반적이었다. 동력 성능 면에서는 퓨어 스포츠카와 비슷하지만, 조종성이나승차감, 편의성 면에서는 방향이 전혀 다른 차라고 할 수 있다. 보다쉽게 이야기하자면, 최고급 세단의 안락함과 편의성, 그리고스포츠카급의 동력성능을 함께 지니고 있는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GT의개념은 상당히 모호해졌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 들어 자동차 시장의 경향이 고성능 자동차에도 일정한 수준이상의 쾌적함과 편의성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GT의 전통적인 모습과는 전혀 관계 없는 형태의 자동차임에도 불구하고 고성능을 표방하기 위해 GT라는 이름만 가져다 쓰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GT의 개념은 더욱 모호해져만가고 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형태의 GT는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다. 이러한 전통적인 GT에 가까운 차들은 주로 영국이나 독일, 이탈리아 등지의 고급 자동차제조사들이 꾸준히 만들어 오고 있다. 다음에 소개되는 차종들은 현재 국내 출시된 차종들 가운데 가장전통적인 GT에 가까운 차들이다.

메르세데스-AMG S 63 4MATIC 쿠페

메르세데스-벤츠S클래스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메르세데스-AMG S63 4MATIC 쿠페는장거리를 빠르고 안락하게 이동할 수 있는 GT카의 본질적 의미에 가장 충실한 차 중 하나다. S 클래스의 우아함과 AMG의 공격성을 겸비한 외관 디자인은 한눈에 특별함을 감지할 수 있으며, 세계 최고의 럭셔리 세단의 것을 그대로 가져온 호화로운 인테리어는타는 이의 위신을 세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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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AMG의5.5리터 바이-터보(Bi-turbo)엔진은 585마력/5,000rpm의 막강한 최고출력과 91.7kg.m/2,250~3,750rpm에 달하는 화끈한 최대토크로 공차중량만 2톤을 넘는 S클래스 쿠페를 정지 상태에서 단 3.9초만에 100km/h의 속도로 내몰 수 있다. 또한 AMG의 서스펜션과 드라이버 패키지 등을 더하여 보다 극적인조종 성능과 경험을 제공한다. VAT 포함 차량 기본 가격은 2억 900만원.

롤스로이스 레이스

롤스로이스 레이스(Wraith)는동사의 럭셔리 세단, 고스트(Ghost)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2도어 쿠페 모델이다. 고스트가 그러하듯이, 레이스 역시 롤스로이스 가의 일원임을 나타내는 호화로운 외관과 실내, 그리고다양한 편의장비를 품고 있으며, 맞춤 정장을 고르는 듯한 비스포크(Bespoke)프로그램으로 오로지 나만을 위한 차를 주문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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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레이스는 단순히 럭셔리 세단 고스트를 쿠페형모델로 전환한 것이 전부가 아니다. 레이스에는 고스트가 품지 못한624마력의 최고출력을 자랑하는 6.6리터 V12 트윈터보엔진을 심장으로 사용한다. 이는 역대 롤스로이스에 탑재된 엔진 중 가장 강력한 것으로, 이 엔진을 탑재한 레이스는 단 4.4초만에 정지 상태에서 100km/h까지 가속할 수 있다. 서스펜션과 조종 계통 역시 보다스포티한 주행에 중점을 두고 재설계되어 롤스로이스에서 가장 강력하고 스포티한 조종성과 주행 경험을 제공한다. VAT포함 차량 기본 가격은 4억원으로, 주문 내용에따라 가격은 더 올라갈 수 있다.

애스턴 마틴 DB11

본드카로 유명한 애스턴 마틴은 스포츠카 제조사로 알려져있지만 이들의 진짜 주특기는 바로 GT다. 그 중에서도 DB+숫자 조합의 명명체계를 가진 GT 모델들은 애스턴 마틴의 생명줄로작용하여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잇고 있다. DB는 험난했던 애스턴 마틴의 역사에 길이 남은 유능한 경영자, 데이빗 브라운(David Brown)의 이니셜을 따 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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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스턴 마틴 DB 계열의모델들 중 가장 최근에 출시된 모델은 바로 DB11이다. DB11은전작인 DB9을 잇는 새로운 GT 모델로, 애스턴 마틴의 새로운 디자인 기조로 완성된 역동적이고 미래지향적이면서도 전통과 맥을 함께 하는 디자인으로 시선을끈다. 애스턴 마틴 특유의 인테리어는 더욱 호화롭고 정교해졌다. 여기에애스턴 마틴이 그동안 사용해 왔던 포드 듀라텍 엔진 기반의 6.0리터V12 엔진을 버리고 5.2리터 배기량의 새로운 V12 터보엔진을 탑재한 차다. 이 엔진은 608마력의 최고출력을 발휘하여DB11이 0-100km/h 가속을 3.9초 만에 끝낼 수 있도록 한다. VAT 포함 차량 기본 가격은2억 9천만원으로 알려져 있다.

마세라티 그란투리스모

이름부터 그랜드 투어러 자체인 마세라티의 그란투리스모는 2004년 등장한 마세라티 쿠페의 계보를 잇는 GT로, 2007년에 처음 등장하여 지금까지 판매되고 있는 차종이다. 최근출시 10년만에 페이스리프트를 거친 모델이 국내에도 판매되고 있다. 현재의마세라티 그란투리스모는 알피에리 컨셉트로부터 시작된 마세라티의 최신 디자인 언어가 반영하여 전면부화 후면부 디자인을 소폭 변경하고 스포트와 MC로 모델을 세분화하여 상품성을 개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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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전히 변함 없는 요소이면서도 그란투리스모최대의 매력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엔진. 페라리에게서 수여받은 4.7리터의 V8 엔진은 현재 유럽 자동차 업계에서 얼마 남지 않은자연흡배기 대배기량 엔진이며, 마세라티만의 매혹적인 배기음과 강력한 성능을 자랑한다. VAT 포함 차량 기본 가격은 2억 1,900~2억 3,400만원이다.

페라리 812 슈퍼패스트

페라리는 우리에게 슈퍼카 제조사로 더 유명하지만, 창사 이래 줄곧 GT를 만들어 온,GT 장인 중 하나다. F40를 비롯한 페라리의 슈퍼카는 10년마다 한 번씩 한정적으로 만들어지는 기념 모델이지만, 페라리가항시 내걸어 놓은 간판은 V12 엔진을 실은 플래그십 2인승GT들이었다. 그 플래그십 2인승 GT의 최신 모델이 바로 812슈퍼패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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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리 812 슈퍼패스트는현존하는 페라리 라인업 내에서 가장 빠르고 강력한 차다. 극단적으로 긴 프론트 노즈와 공기역학적 특성을이용하기 위한 특유의 외관 디자인과 더불어 새로운 휴먼 머신 인터페이스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실내 디자인으로 운전에 한층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조성한다. 엔진은 전작인 F12 베를리네타의 것에서 75%의 부품을 갈아 치운 신규 6.5리터 자연흡배기 V12 엔진으로, 800마력/8,000rpm에달하는 괴물같은 힘을 낸다. 8,000rpm을 넘나드는 고회전 자연흡배기 엔진의 번개같은 리스폰스는덤이다. 국내 출시 차종이지만 국내 판매 가격은 알려져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