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스포츠카의 발자취를 돌아 보다

2018-06-21     박병하

스포츠카는 자동차 문화에 있어 상징적인 존재다. 스포츠카는 이동 및운송수단으로서 가져야 할 실용적 측면을 배제한 대신,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수려한 외모와 함께 강력한동력 성능과 기동 성능, 그리고 감각적인 요소들을 극대화함으로써 ‘운전’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해 만들어지는 차’라고 정의할 수 있다. 또한, 스포츠카는플래그십급 럭셔리 세단과 함께, 제조사가 가진 기술력이 총동원되어 만들어지기 때문에 해당 제조사의 기술력을상징하기도 한다.

그동안 대한민국의 자동차 업계는 실용적이고 상품가치가 높은 자동차들에 집중해 왔다. 하지만 보다 색다른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 스포츠카 분야를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상당수의 차종이 여러가지 이유로 상업적인 측면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 이름은 여전히 대한민국의자동차 역사에 남아 있다. 1990년 최초의 스페셜티카(SpecialtyCar), 스쿠프의 등장 이후로부터 현재까지 대한민국 자동차 역사에 이름을 남긴 스포츠카들을 돌아본다.

스페셜티카로 시작한 최초의 국산 쿠페 - 현대자동차 스쿠프(1990~1996)

1990년 등장한 스쿠프는 당대 젊은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으로서 오늘날까지회자되고 있는 모델이다. 현대자동차가 국내 자동차 업계 최초로 선보인 2도어 쿠페 모델인 스쿠프는 소형차 엑셀(Excel)의 플랫폼을 바탕으로개발되었다. 에어로 다이나믹을 강조한 외관 디자인과 국산차 업계 최초로 시도한 2도어 쿠페형 차체는 낭만을 좇던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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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스쿠프는 정통 스포츠카가 아닌, 스포츠카의 모습을 흉내낸 정도에불과한 스페셜티카에 해당하는 차종이다. 그렇지만 결과론적인 측면에서 후대에 등장할 정통파 스포츠카들의등장에 단초를 마련해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큰 모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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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쿠프는 국산차 최초의 가솔린 터보 엔진을 적용한 모델이기도 하다. 91년에등장한 독자개발 알파 엔진에 터보차저를 적용한 스쿠프 터보는 0-100km/h 가속 시간 약 9.18초에 최고속도 200km/h라는  걸출한 성능을 발휘하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스쿠프는스페셜티카의 근본적인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당대 국산차 중에서는 손꼽히는 성능 중심의 차 중 하나였다. 가벼운차체에서 오는 경쾌한 몸놀림과 터보 엔진의 힘을 가진 스쿠프는 대한민국의 모터스포츠 역사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국내 최초 정통 경량 2인승 로드스터 - 쌍용자동차 칼리스타(1992~1994)

스쿠프 다음으로 대한민국 스포츠카의 역사를 쓴 제조사는 구 신진지프 시절부터 민수용 지프 기반의 차를 만들어온 쌍용자동차였다. 1992년, 쌍용자동차가 야심차게 내놓은‘칼리스타’는 경량 스포츠카의 천국, 영국의 혈통을 간직한 정통 2인승 로드스터였다. 쌍용자동차가 이 고풍스런 외형의 경량 로드스터를 내놓은 데에는 1987년, 쌍용자동차가 영국의 자동차 제조사 팬더 웨스트윈드(PantherWestwinds, 이하 팬더)를 인수한 데 따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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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더 칼리스타는 옛 SS100 재규어 등의 고전 영국 스포츠카에서모티브를 가져온 외관과 더불어 극단적인 경량화 설계사상, 그리고 철저하게 단순한 기계구조 등으로 무장했다. 비록 엔진 출력은 부족한 편이었으나, 극단적인 경량화에서 오는 중량대 출력비의 우위를 이용한 가속 및 기동 성능을 중시하는 전형적인 정통 영국식 로드스터 그 자체였다. 하지만당시 기준으로 중형 세단 3~4대분에 준하는 3천만원 이상의가격, 당시로서는 너무나도 생소했던 수제 스포츠카의 한계, 그리고당시의 사치품 배격 풍조로 인해 칼리스타는 생산 개시 2년만인 1994년에생산이 중단되고 말았다.

국산 스페셜티카 2세대 - 현대자동차 티뷰론(1996~2001)

티뷰론은 스쿠프의 뒤를 이어 나타난 현대자동차의 2세대 스페셜티카다. 95년 출시한 초대 아반떼(J2)의 플랫폼을 개량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1991년 선보인 HCD-1 컨셉트 카를 바탕으로 한 육감적이고볼륨감 넘치는 외관 디자인은 당시 국산차 업계에 신선한 충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그러면서도 일반적인승용차에 비해 가격도 크게 비싸지 않았기 때문에 젊은 소비자들의 호응도 변함 없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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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뷰론은 선대인 스쿠프와 마찬가지로 스페셜티카로서 개발되었지만 하드웨어의 보강에도 힘썼다. 포르쉐와 공동개발한 전륜 맥퍼슨 스트럿 서스펜션을 채용하여 운동성능을 보강했다. 아울러 스쿠프에 비해 한 체급 커진 차체에 맞춰, 새로운 심장까지품었다. 이 엔진이 현대차의 진정한 첫 독자개발 엔진으로 불리는 베타 엔진이다. 티뷰론에 실린 베타 엔진은 1.8리터 사양과 2.0리터 사양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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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뷰론은 스쿠프가 그래왔듯이, 국내 모터스포츠 양산차 경기의 출전차량으로 독보적인 역할을 해냈다. 부분변경 모델인 터뷸런스를 포함해 국내의 각종 모터스포츠 경기에서맹활약을 펼쳤다. 그 뿐만 아니라, 현대자동차는 티뷰론을통해 WRC(World Rally Championship)에도 출전을 이루었다. 티뷰론은 부분변경 모델인 터뷸런스를 포함해 5년간 생산되었으며, 2001년 등장한 투스카니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기아의 도전정신이 빛을 발한 순간 - 기아자동차 엘란(1996~1999)

엘란은 익히 알려져 있듯이, 본래는 영국의 로터스(Lotus)사에서 개발된 경량 2인승 스포츠카다. 로터스는 극단적인 경량화 설계의 퓨어 스포츠카를 만들어 온 자동차 제작사이자,영국의 유서 깊은 모터스포츠 종가이기도 하다. 또한, 자회사인로터스 엔지니어링을 통해, 다른 자동차 제조사의 설계 위탁 및 자문 등의 활동도 병행하였으며, 이 역시 로터스의 주요 사업 중 하나였다. 기아자동차가 엘란을 자사에편입하게 된 경위는 크레도스의 설계 용역을 진행하면서 연을 맺게 된 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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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자동차는 1995년에 엘란의 권리를 넘겨 받았지만 엘란에 실을 엔진과 변속기가 없어, 엘란을내놓을 수 없었다. 이는 GM, 정확히는 이스즈의 파워트레인을쓰고 있었던 오리지널 엘란의 라이센스 문제로 인한 것이었다. 이에 기아는 마침 독자개발을 완료한 1.8리터 T8D 엔진을 엘란 전용으로 튜닝한 ‘T8D 하이-스프린트’ 엔진을싣고 세피아의 수동 5단 변속기를 물려 1996년에 시장에본격 출시했다.

엘란의심장인 T8D 하이스프린트 엔진은 국내 완성차 업계에서 전례 없는 고회전형 유닛이었다. 1.8리터의 배기량으로 151마력의 최고출력과 19.0kg.m에 달하는 최대토크는 경량 스포츠카인 엘란의 성격과도 잘 어울렸다. 하지만 칼리스타가 그러하였듯이, 생산성 문제와 더불어 수제 스포츠카에대한 생소함, 그리고 지나치게 비싼 가격이 걸림돌이 되어, 1999년단종을 맞았다.

현대차 스페셜티카 계보의 대미를 장식하다- 현대자동차 투스카니(2001)

투스카니는 스쿠프와 티뷰론에 이어, 현대자동차가 선보인 대한민국의 3대째 토종 쿠페 모델이다. 티뷰론 터뷸런스를 대체하는 모델로 시장에등장했다. 투스카니는 스쿠프와 티뷰론으로 이어지는 현대자동차 스페셜티카 계보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모델이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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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스카니는 외관 디자인부터 티뷰론 및 터뷸런스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로 빚어졌다.근육질의 육감적인 바디를 지녔던 티뷰론에 비해 직선을 매우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한층 절제된 스타일이 특징이었다. 하지만 디테일을 통해, 티뷰론과는 다른 방식으로 스포츠 쿠페의 역동적이미지를 표현했다. 엔진은 티뷰론에게서 물려 받은 직렬 4기통 2.0리터 베타 엔진과 투스카니를 위해 개발된 2.7리터 배기량의 V형 6기통 델타 엔진의 두 가지 심장을 지녔다. 특히 2.7 델타 엔진을 탑재한 모델은 ‘엘리사(Elisa)’라는 별칭이 붙었는데 나중에는 이 별칭을 아예2.7리터 버전 투스카니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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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스카니는 한민국의 자동차 애프터마켓 업계의 꽃이자, 모터스포츠 무대의주역이었다. 당시의 대한민국 자동차 애프터마켓에는 투스카니를 위한 부품들로 가득했다. 자잘한 꾸미기용 아이템부터 시작해서 성능향상에 이르기까지, 나만의투스카니를 완성할 수 있는 다양한 부품들을 구할 수 있었다. 스페셜티카 본연의 가치인 ‘대중의 스포츠카’라는 미덕에 충실했던 투스카니는 스쿠프, 티뷰론과 함께 대한민국 모터스포츠 무대를 이끌었던 핵심 차종 중 하나로 맹활약했다.

국내 최초의 진짜배기 FR 스포츠 쿠페 - 현대자동차 제네시스 쿠페(2008~2012)

제네시스 쿠페는 포니와 스텔라가 단종된 이후 줄기차게 전륜구동만 고수해 온 현대차가 제네시스 세단과 함께 야심차게내놓은 국내 최초의 후륜구동 스포츠 쿠페다. 제네시스 쿠페는 스쿠프,티뷰론, 투스카니까지 이어진 스페셜티카와는 전혀 다른, 중형급의진짜배기 후륜구동 스포츠카로서 개발되어 주목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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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시스 쿠페는 현대차 역사 상 최초로 전담 개발팀을 꾸려서 개발된 차종답게,이전까지의 현대자동차와는 혈통부터가 달랐다. 이전까지의 전륜구동 스페셜티카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고성능과 차원이 다른 주행 경험을 구현하기 위해 모든 것을 새롭게 개발해야 했다. 그렇기에, 역대 현대차의 쿠페형 자동차들과 공통되는 점이 전혀 없다고봐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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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에 열린 LA오토쇼에서 제네시스 쿠페 컨셉트로 그 모습을 드러낸 제네시스 쿠페는 2008년부터국새 시장에 판매를 개시했다. 제네시스 쿠페는 정통 후륜구동 스포츠 쿠페를 기다려왔던 수많은 소비자의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초기형은 210마력의 2.0 세타 TCI 엔진과 303마력의3.8 람다 엔진이 실렸다. 후기형에는 트윈스크롤 터보 기술을적용한 275마력의 2.0 세타 TCI 엔진과 GDi 기술의 도입으로 350마력에 달하는 출력을 자랑한 3.8 람다 GDi 엔진을 실어, 국산차 최고 수준의 가속 성능을 자랑했다. 여기에 토르센 LSD와 브램보 브레이크까지 갖추고 있었다. 걸출한 하드웨어로 무장하고 나타난 제네시스 쿠페는 역대 현대차의 쿠페모델들이 그러하였듯이, 모터스포츠의 발전에 또 한 번 지대한 공로를 끼쳤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국내 최초의 수제스포츠카 - 어울림모터스 스피라(2010~2017)

어울림모터스의 스피라는 대한민국 최초의 자체 개발 수제 스포츠카로 태어났다.2001년, 프로토자동차 시절 개발한 프로토타입 ‘PS-II’를시작으로 근 10년에 달하는 기간을 거쳐 2010년부터 계약과함께 소비자에게 인도되기 시작했다. 어울림 스피라는 ‘국내최초의 토종 수제 스포츠카’라는 점이 부각되며 개발 중이었던 2000년대중반부터 국내의 자동차 애호가들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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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최초 수제작 스포츠카인 스피라는 정통 리어 미드십 스포츠카의 전형을 보여주는 외관 디자인과 함께, 모터스포츠에서 쌓은 경험으로 완성한 경량 카본파이버 차체 구조, 그리고사양에 따라 400마력대를 넘나드는 고출력 엔진을 갖췄다. 변속기는6단 수동 변속기를 기본으로 했다.

하지만 스피라는 개발 당시의 뜨거운 관심이 무색하게 출시 이후부터 많은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당시 기준으로도 한 세대 이전의 엔진이었던 현대자동차의 2.7리터델타 V6 엔진을 사용한다는 점, 수동변속기만 제공된다는점, 그리고 ESP 등 안전을 위한 전자장비의 부재 등이주요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또한 실내/외의 상당 수 부품이기존 양산차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으며, 부실한 조립 및 마감 품질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스피라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수제작 소량생산 스포츠카 프로젝트인만큼, 여러방면에서 시행착오를 겪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동안 대량생산 차종만 존재했던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이러한 시도를 감행했다는 점에 그 존재 의의를 들 수 있겠다. 현재 스피라는 생산이 중단된 상태로 알려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