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했던차]현대자동차 그레이스

2019-07-02     박병하

기아자동차 카니발의 등장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자동차 시장에서 미니밴의 역할을 맡고 있었던 차들은 대부분 1박스형승합차였다. 봉고의 대성공 이래 국내에 자리 잡은 1박스형승합차들은 생계부터 여행, 레저를 모두 책임질 수 있는 다재다능함으로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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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1박스형승합차와 유개화물차(밴)를 한 단어로 일컫는 말이 있다. 바로 ‘봉고차’다. ‘봉고차’라는 말은 ‘찦차’와 같이, 고유명사에서 비롯되어 보통명사로 쓰이는 말의 예시 중 하나다. 봉고차는 1980년대 초 기아자동차(이하 기아차, 당시 기아산업)에서만들어진 봉고(Bongo)에서 유래되었다. 하지만 기아 봉고의직계 후손들이라 할 수 잇는 베스타(Besta)와 프레지오(Pregio)는현대자동차에서 절치부심 끝에 내놓은 역작 앞에 맥을 추리지 못하고, 선대의 위업을 잇지 못했다. 뒤늦게 태어나 봉고의 후손들을 뛰어난 제품력과 상품성으로 압도한 이 차의 이름은 바로 ‘그레이스’다.

자동차 산업의 암흑기에 태어나다

현대 그레이스의 조상은 현대자동차가 1977년 출시한 ‘HD1000 미니버스’였다. HD1000 미니버스는 당시 슬슬 늘어나기 시작한 중/소형 상용차 수요를 잡기 위해 기획된 모델이었다. 현대자동차가 밝힌바에 따르면, 이 차량은 포드 트랜짓(Tranjit)의 하부설계를기반으로 현대자동차에서 거의 독자개발한 수준으로 만들어진 모델로, 미니버스 외에 밴 모델과 트럭모델이모두 존재했다. 이들 중 트럭 모델은 ‘포터’의 1세대 모델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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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대자동차의 HD1000은 생산을 개시한 지 3년도 채 되지 않아 단종을 맞게 되었다. 이는 전두환 정권의 악명 높은 ‘자동차공업 통합조치’에 따른 것이었다. 자동차공업 통합조치는 신군부 정권의 국보위가 내린조치로, 1980년 8월20일 발표한 ‘중화학 분야 투자조정 조치’의일환으로 발표되었다. 명목 상으로는 국가가 나서서 국내의 자동차 산업에 대한 일종의 ‘구조조정’을 가한다는 것이었다.

이 조치는 두 번의 조정을 거쳐 1982년에 시행되었으며, 1989년에 최종 해제되었다. 전두환 정권의 자동차공업 통합조치는 국내 자동차 제조사 간의 시장 경쟁 구도를 무너뜨리고 국내 자동차 산업의질적 수준을 크게 후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여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사의 ‘암흑기’를 초래했다. 이 조치의 내용이란,현대차에 승용차를 전담시키고 기아차에 5톤 미만 소형 상용차를 전담시키며 이륜차는 대림산업에게전담시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5톤 이상 버스 및 상용차는업체 간 자유경쟁에 맡긴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현대자동차는 출시 한 지 얼마 되지 않은소형 상용차를 그 자리에서 단종시켜야만 했고, 기아자동차는 이 때까지 생산하고 있었던 모든 승용차 라인업을잃어버리는 심각한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물론, 현대자동차는수익성이 높은 승용차 사업을 계속 영위해 나갈 수 있었지만, 양사 모두 종합 자동차 기업으로 거듭나려하고 있었던 도상에서 이러한 조치로 인해 성장의 동력이 크게 저해되었다.

절치부심 끝에 태어나다

자동차공업 통합조치 이후, 기아자동차는 봉고를 통해 회생에 성공하였고 소형 상용차 시장의 성장을 견인했다. 그리고 자동차공업 통합조치가 해제되자, 현대자동차는 1986년, 절치부심 끝에 준비한 새로운 소형 상용차를 출시했다. 이 차가 바로 그레이스(Grace)다. 차명인 그레이스는 ‘우아한’, ‘품위가있는’ 등을 의미하는 형용사로, 시판 전 일반인 대상의 차명공모를 통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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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그레이스는 독자적으로 개발했던 HD1000과는 달리, 이미 개발이 완료된 차량을 라이센스 생산하는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그 대상은 당시 현대자동차와 밀접하게 협력하고 있었던 일본 미쓰비시자동차의 승합차, 델리카(Delica)의 3세대모델이다. 당시 미쓰비시의 3세대 델리카는 그레이스와 시기적으로동일한 시기에 출시된 최신형 모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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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는 그레이스를 두고 ‘3C의 혁신을 담았다’라고 소개했다.현대자동차가 말하는 3C란, ‘코스믹(Cosmic) 디자인’, ‘싸이클론(Cyclone)엔진’, ‘큐빅(Cubic) 타입 실내공간’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코스믹 디자인은 승용차의 에어로 다이내믹 스타일을접목한 그레이스의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디자인을 말한다. 1세대 그레이스는 당시 시장에서 그 이름의 의미하는바 대로, 투박한 봉고에 비해 한층 전면에 내세웠다. 공기저항을줄인 외관 디자인은 풍절음도 줄여주는 효과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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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클론 엔진이란,당시 현대자동차가 미쓰비시에서 새롭게 도입한 신형 디젤엔진을 말한다. 이 엔진은 훗날 ‘아스트론(Astron)’으로 개칭되는 미쓰비시의 신형 2.5리터급 직렬4기통 디젤엔진으로,그레이스 뿐만 아니라, 형제차에 가까운 포터, 심지어현대정공에서 제작한 갤로퍼에도 사용된다. 또한 이 엔진은 오늘날 포터 II와 그랜드 스타렉스 등이 사용 중인 현대 A엔진의 설계 기반이 된다. 이렇게 오랫동안 사용될 수 있었던 까닭은 타사 엔진 대비 뛰어난 정숙성과 신뢰도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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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뿐만이 아니었다.‘큐빅 타입’ 실내 공간과 ‘달리는 응접실’을 컨셉트로 내세운 그레이스의 실내는 동급에서 가장 여유롭고 고급화된 공간을 제공했다. 고급형 9인승 살롱 모델에는 숫제 회전식 2열 좌석을 적용한 것은 물론, 차내에 사용된 마감재의 질을 높여, 한층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랑했다. 2/3열 좌석에는 리클라이닝기능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당시로서는 넉넉한 실내 조명과 대형 창을 갖춰, 관광버스를 소형화한 듯한 내부를 제공했다.

현대자동차는 이러한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주로 가족용이나 레저 용도에 초점을 맞춰 다소 투박한 구석이 있었던 봉고나 베스타와는 달리, 이동 업무/비지니스 용도에 더 중점을 둔 광고 및 마케팅 전략을취했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은 시장에서 그레이스가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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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등장한 현대 그레이스는 등장하자마자 기아 봉고를 상대해야 했고, 마침 같은 해 태어난 봉고의 직계 후손인 베스타와도 일전을 치러야만 했다. 그레이스는 9인승 살롱과 12인승 승합(미니버스)모델은 물론, 소형 상용차 시장 공략을 위해 3인승/6인승 밴 모델도 내놓았다. 그레이스는혁신적인 디자인과 싸이클론(아스트론) 엔진의 신뢰성, 우수한 공간설계 등을 무기로 시장에서 봉고와 베스타를 빠르게 밀어 내기 시작했다. 특히 그레이스의 12인승 모델은 유치원이나 학원 등지에서의 선호도가매우 높았다. 소수의 인원을 수송하면서도 높은 기동성과 낮은 유지보수비용을 요했던 이들 사업장의 요구에가장 완벽하게 들어 맞는 차가 바로 그레이스였기 때문이다.

또한 싸이클론 엔진의 신뢰도는 경쟁차종이었던 베스카를확실하게 누를 수 잇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베스타는 마쓰다 봉고의 신형 모델로, 로나 엔진을 심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 로나 엔진의 내구성 문제가 내내 발목을 잡았다. 후일 이 로나 엔진은 화재 결함까지 발견되어 베스타는 승합차 시장에서 그레이스 앞에 기를 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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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가 태어난 지 7년이 되는 1993년, 현대그레이스는 대대적인 페이스리프트 작업을 거쳤다. 미쓰비시 델리카의 스타일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던 초기형과는달리, 현대자동차의 독자적인 스타일링 코드를 대폭 적용했다. 특히헤드램프의 경우에는 당시 현대자동차가 생산하고 있었던 스쿠프(후기형)나엑센트 등에서 볼 수 있었던 약간 둥근 형태의 헤드램프를 사용하고 있었다. 테일램프는 반투명 렌즈를적용했다. 93년식 그레이스부터는 아스트론 엔진을 개량한 형태의 디젤 엔진을 사용하기 시작하여 성능과연비가 모두 향상되었다.

또한 이 시기를 기점으로 2.4리터 LPG 엔진도 출시하였으며 15인승 모델도 새롭게 출시하는 등, 상품성을 훨씬 개선했다. 현대 그레이스는 낮은 가격과 단순한 구조, 뛰어난 정비성 등으로 1박스형 승합차 시장을 독식하다시피 했다. 그레이스의 탄탄한 기반은1995년, 막강한 상품성으로 무장한 쌍용 이스타나의 출현이후에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2000년대 초반까지 승합차 시장의 상식으로 통했다. 기아 봉고 이래 국내 1박스형 승합차 시장에서 가장 성공적인 자동차로남은 그레이스는 2003년, 배기가스 규제에 대응하지 못해2003년 단종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