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을 돌아 보다]리 아이아코카

2019-07-03     박병하

FCA(Fiat ChryslerAutomobiles)가 오늘(3일), 공식 채널을 통해 리 아이아코카(Lee Iacocca) 前 크라이슬러 회장의 부고를 알렸다. 리 아이아코카 전회장은 포드자동차와 크라이슬러를 오가며 많은 명차들을 개발했으며, 뛰어난 상품성을 가진 자동차들을 지속적으로출시하며 부진의 늪에 빠진 크라이슬러를 재건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로 평가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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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아이아코카 전 회장은 제 2차세계대전이 끝난 1946년 포드자동차에 입사해 착실하게 커리어를쌓아 나갔다. 그는 본래 기술자로서 일을 하기 시작했지만 판매 및 홍보 등의 분야에서 뛰어난 수완을발휘했다. 또한 그가 주도가 되어 개발했던 머스탱(Mustang)과에스코트(Escort), 그리고 링컨 컨티넨탈 마크III(LincolnContinental Mk.III) 등의 신차들은 지금도 포드의 명차로 불리고 있으며, 포드의실적을 쌓아 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머큐리 브랜드의 부활도 아이아코카 회장이 일궈 낸 성과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그는 혼다의 소형차용 파워트레인을 도입해 신형의 소형차를 개발하자는 주장을 하다가포드 2세와 갈등을 빚었고, 이 과정에서 그는 1978년, 포드에서 물러나 크라이슬러로 옮겨가게 된다.

아이아코카가 옮겨 간 당시의 크라이슬러는 그야말로‘부도 직전’의 위기상황을 맞고 있었다. 그는 방만한 경영으로 무너져가고 있었던 크라이슬러 그룹을 재건하기 위해 회사의 전면적인 쇄신에 나섰다.  먼저35명에 달하는 부사장급의 임원 중 33명을 퇴출시키고 포드 출신 인사를 포함해 새로운임원진을 꾸리는 한 편, “연봉 1달러만 받겠다”는 초특급 선언과 더불어 1980년 한 해 동안 1만 5천여명 이상의 정규직을 해고하는 등, 초고강도의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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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 1달러연봉 선언은 그가 벌인 2차례의 임금삭감 협상에서 크라이슬러의 노동조합을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일련의 과정을 거쳐, 크라이슬러는 당시 기준으로 무려 5억 달러에 달하는 비용절감을 일궈 냈다. 아울러 그는 크라이슬러가개발하고 있었던 차종들 중, 그의 기준에서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되었던 계획들을 중지시키고 극도로 ‘현실적’이고 상업성이 보장된 신모델 개발에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엎어진 프로젝트들 중 하나에는 바로 크라이슬러의‘터빈카(Turbine Car)’도 있었다. 이 차는 1930년대 후반에 시작된 크라이슬러 터빈 엔진 프로그램에서부터출발하여 20년이 넘게 개발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상용화를눈 앞에 둔 시점이었다. 하지만 1979년에 2차 석유파동이 일어난 것과 배출가스 기준 등을 충족하지 못하는 문제를 안고 있었기에, 그의 판단이 정확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81년부터 K-바디 플랫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신형의 중형세단라인업과 미니밴을 잇달아 히트시키며 크라이슬러를 회생시켰다.

그가 취임한 지 몇 해 지나지 않은 1982년에는 15억 달러에 달했던 부채를 일거에 상환하는 한 편, 무려 7억달러의 순익을 내는 신화를 일궈 냈다. 또한 총 5%를 삭감했던 임금도 본래의 수준으로 돌려 놓았고, 해고한 직원 상당수를 복직시키는 등의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그의 주도 하에, 크라이슬러는 AMC와 지프, 그리고 람보르기니까지 인수하는 등, 회사의 규모를 키워, GM, 포드와 함께 미국의 ‘빅3’로발돋움하는 데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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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크라이슬러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이 있다면 바로‘미니밴’일 것이다. 오늘날현대적인 미니밴의 효시가 된 ‘닷지 캐러밴’이 바로 그의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미니밴은 그가 포드자동차에 재직하고 있었을 70년대당시에 구상한 맥시밴(Maxivan) 프로젝트에서 고안되었다. 그러나헨리 포드 2세는 이 프로젝트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아이아코카는이를 크라이슬러에서 이뤄 냈다. 1984년 정식으로 출시된 닷지 캐러밴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가며, 크라이슬러 부흥의 신호탄이 되었으며, 크라이슬러가 미국 자동차 업계의빅3로 거듭나는데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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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이슬러의 재건과 성장을 이끈 리더, 리 아이아코카는 1992년, 크라이슬러그룹 회장직을 사임했다. 은퇴한 그는 이탈리아식 레스토랑을 운영하다가 아내가 당뇨병으로 인해 사망한이후, 당뇨병 치료 재단을 설립해 활동해 왔다. 그리고 2005년, 아이아코카 전 회장은 크라이슬러의 홍보대사로 발탁되기도한다. 하지만 2009년,크라이슬러의 파산 소식을 전해 들은 아이아코카 전 회장은 크라이슬러의 몰락에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그는 요식업과 대중문화 등의 방면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었으며,현지 시각으로 7월 2일, 향년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