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했던차]신진자동차 크라운

2019-10-11     박병하

제조업에서 행해지는 ‘라이센스 생산’은 제조물의 종류를 불문하고 전 세계의 산업계에서 행해지고 있다. 라이센스를 주는 선발업체는 해당 지역에 직접 진출하는 데 따른 부담을 줄일 수 있고, 라이센스를 받아 생산하는 후발업체는 선발업체가 적게는 십 수년, 많게는 수십년에 걸쳐서 얻은 성과를 빠르게 배우고 흡수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한다. 우리나라의 자동차 산업계도 이러한 방식을 통해 기술을 습득하여 빠른 속도로 발전해 왔다.

전후 빠른 수복을 이루며 눈부신 경제 성장을 하고 있었던 대한민국은 아시아 시장으로의 진출을 원했던 다국적 기업들이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외국계 기업들과의 제휴로 인해, 대한민국 자동차 시장에는 피아트 124와 같은 소형 승용차부터 신진 크라운 등의 중~대형 세단들까지 출시될 수 있었다. 특히 신진자동차가 생산한 크라운은 현대자동차가 생산했던 포드 20M과 함께 당대 최고의 고급 세단 중 하나로 통했다.

신진 크라운은 신진자동차가 1967년부터 생산한 차로, ‘토요타 크라운(Crown)’을 라이센스 생산한 것이다. 원본이 되는 토요타 크라운은 토요타에게 있어서 그 의미가 각별한 차다. 직조기 제작사를 벗어나, 본격적인 자동차 제조사로서의 토요타를 있게 해 준 전통의 고급 세단 모델이다.

당시 기울어가던 새나라 자동차의 인천 공장을 인수하며 사세를 크게 늘린 신진자동차는 토요타와의 기술 제휴를 통해 다양한 차종을 생산하고 있었다. 신진자동차는 20% 수준의 국산화율로 토요타의 소형차 퍼블리카(Publica)와 그보다 더 큰 세단형 승용차인 코로나(Corona), 고급세단 크라운 등의 승용차는 물론, 버스와 중대형 트럭 등의 상용차까지 생산하고 있었다.

토요타와의 기술 제휴를 통해 종합 자동차 제조사로 거듭나며 당대의 대한민국 자동차 시장을 휘어 잡고 있었다. 그리고 크라운은 신진자동차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차종이라 할 수 있었다. 신진자동차에서 생산되었던 크라운은 당시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가장 크고 고급스러운 승용차로 통했다. 신진 크라운은 토요타 크라운의 2세대 모델부터 4세대 모델에 걸쳐 생산되었으며, 당대 국내에서 부와 신분의 상징으로도 통했다. 

2세대 크라운을 통해 고급차 시장까지 집어 삼킨 신진자동차는 1968년,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1967년에 자동차 제조업에 뛰어 든 신생업체였던 현대자동차가 당대 최대의 판로를 누리고 있었던 미국의 포드 자동차와 기술제휴 관계를 맺으면서 포드의 고급 세단, ‘20M’을 선보인 것이다. 고급 승용차 시장에 진출한 지 1년 밖에 되지 않은 신진자동차로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 되었다.

그리하여 신진자동차는 신모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토요타 측에 타전하여 3세대 크라운의 도입을 서둘렀다. ‘뉴 크라운’이라는 이름으로 선보인 3세대 크라운은 정숙하면서도 강력한 직렬 6기통 가솔린 엔진과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디자인을 무기로 당시 고급 세단 시장에 혜성처럼 나타난 현대자동차의 포드 20M을 밀어내는 실적을 올리며 인기를 누렸다. 뉴 크라운은 역대 신진 크라운 중 가장 많이 생산된 자동차로, 신진자동차의 전성기와 함께 부와 신분의 상징으로도 통했다.

뉴 크라운이 놀라운 성과를 거둠에 따라, 신진자동차는 당대 최신 차종인 4세대 크라운마저 ‘크라운 S’라는 이름으로 라이센스 생산하기 시작했다. 1971년 등장한 4세대 크라운은 같은 해 7월부터 신진자동차의 공장에서 생산되었다. 4세대 크라운은 일본 내에서는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한 차종이었다. 혁신적인 디자인은 기존의 보수적인 소비자의 입맛에 맞지 않았고, 설계 상의 결함으로 인한 엔진룸 과열 등의 문제 때문에 일본 내에서는 실패작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미 밀려난 포드 20M 외에는 이렇다 할 적수가 없었으므로, 뉴 크라운과 함께 고급차 시장을 장악하였다.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초 대한민국의 고급 승용차 시장을 장악한 신진 크라운. 하지만 70년대 중반에 들어 그 주체인 신진자동차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당시 협력관계에 있었던 토요타자동차가 일방적으로 제휴관계를 청산하고 국내 시장에서 손을 뗀 것이다. 이는 당시 중국 시장 진출을 노리고 있었던 토요타의 내부 사정에서 비롯되었다. 

1974년, 저우언라이(周恩来) 당시 중국 총리에 의해 최종 승인된 ‘주4원칙(周4原則)’은 대한민국 및 중화민국과 거래하는 기업의 중국 진출을 거부하는 내용의 외교정책, 내지는 '협박'이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한국전쟁 때 적으로 싸웠던 중국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으며, 중화민국과 수교하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이 외교원칙은 경제원조에 힘입어 한국에 진출하려는 일본산업계는 물론, 한국의 경제도 크게 흔들었다.

거대한 규모와 가능성을 가진 중국 시장을 놓칠 수 없었던 토요타는 결국 신진자동차와의 제휴관계를 끊었다. 따라서 신진자동차는 더 이상 토요타의 차를 생산할 수 없게 되었다. 한 순간에 모델 라인업이 통째로 증발해버린 신진자동차는 더 이상 자동차를 생산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한 때 자동차 왕국을 이루고 있었던 신진자동차는 경영악화로 산업은행의 관리 하에 들어가 새한자동차, 거화자동차 등으로 갈리게 된다. 그리고 1978년, 새한자동차는 대우그룹으로, 거화자동차는 동아그룹으로 넘어갔다가 후일 쌍용그룹에 합병되며 훗날 대우자동차와 쌍용자동차로 거듭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