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이름, 다른 분야]르노 편

2020-05-06     모토야

1899년에 세워진 르노 자동차(Renault S.A., 이하 르노)는 오늘날 PSA그룹과 함께 프랑스의 양대 자동차 제조사로 통한다. 르노는 현재 일본의 닛산자동차와 미쓰비시자동차와 함께 르노-닛산-미쓰비시 얼라이언스를 구성하는 중심이 되는 기업으로, 오늘날 전세계를 상대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르노의 자동차는 탄탄한 제품력을 가진 소형 승용차들이 유명하며, 최근에는 다양한 종류의 크로스오버형 차량과 전기차 라인업이 주목 받고 있다.

그런데 르노는 한 때 프랑스에서 내로라 하는 방위산업체 중 하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걸작으로 꼽히는 무기체계로는 'FT-17'이 손꼽힌다. 창업주인 르노 삼형제 중 맏이이자, 당시 르노의 사장이었던 루이 르노가 개발한 이 전차는 현대적인 전차의 기본 체계와 개념을 정립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무기체계로 평가받고 있다. 이제는 과거가 되었지만 제 1/2차 세계대전기 당시 프랑스 육군의 전차 전력을 책임지고 있었던 르노의 100년 전 이야기를 들여다 본다.

르노, 현대적인 전차의 기준을 세우다
현대전의 '전차(戰車, Tank)'는 '지상전의 왕자'라는 이명과 같이, 지상군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전력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적인 전차의 개념은 지금으루부터 1백년이 갓 넘은 제 1차 세계대전 말기에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이 당시의 전장은 이른 바 '참호전'이라는 단어로 요약되는,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져 극단적인 소모전 양상을 이루고 있었다. 1차 대전을 상징하는 '참호', '철조망', 그리고 '기관총'의 세 가지 요소가 제대로 갖춰진 참호는 당시의 보병 및 포병 전력으로는 이론 상 돌파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최초의 전차는 '기관총'탄의 비를 뚫고 '철조망'이라는 이름의 장벽을 넘어 '참호'라는 이름의 요새를 돌파하기 위한 결전병기로 만들어졌다. 역사 상 사장 처음으로 등장한 영국의 마크 시리즈 전차들이다. 영국에서 만들어진 이 전차들은 바다에 떠 있는 '전함(Battleship)'을 뭍으로 끄집어 올려 낸 형태에 더 가까웠다.

반면 프랑스는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거의 전국토가 전쟁터로 변하면서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었다. 물론, 프랑스 역시, 영국에서 만들어진 전차의 개념을 참고하여, 1년도 채 되지 않아 재빨리 전차의 개발에 착수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프랑스 최초의 전차들은 슈네데르 CA1(Char Schneider CA1)과 생 샤몽 전차(Saint-Chamond char)였다. 하지만 이들 전차는 전선에서의 필요에 의해 급조된 탓에, 무한궤도가 장착된 농업용 트랙터 위에 장갑화된 차체를 얹은 것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상당수의 전차가 참호에 박혀 돈좌되거나 무한궤도가 끊어져 기동불능이 되는 경우는 예사였고, 장갑이 승무원을 제대로 보호해주지도 못하는 등, 온갖 문제가 속출했다.

이 당시 프랑스의 전차 개발에 몸담고 있었던 장 밥티스트 외젠 에스티엔느(Jean Baptiste Eugène Estienne, 이하 에스티엔느) 대령은 슈네데르 CA1과 생 샤몽 전차의 시행착오를 분석, 새로운 형태의 전차를 구상했다. 에스티엔느 대령은 프랑스 전차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로, 르노 FT-17의 개발을 주도했다. 그가 구상한 새로운 형태의 전차는 작고 가벼우면서 생산이 용이하고 운용도 편리해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했다. 그리고 이를 1916년, 자동차 제조사였던 르노에게 제안했다.

하지만 르노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전차라는 무기체계는 아직 개념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았던 시기였다. 게다가 르노는 자동차 제조사로, 전차를 제조해 본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쉽게 나설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에스티엔느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루이 르노를 설득했다. 그리하여 결국 동년 8월에 루이 르노가 이를 수락하면서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었다. 루이 르노가 에스티엔느에게 제안한 전차의 형태는 완성형 FT-17과 거의 같았다.

1917년 처음 등장한 르노 FT-17은 이전에 등장한 프랑스 전차와는 형태도, 성격도 전혀 달랐다. 일단 몸집부터 전혀 달랐다. 기존에 프랑스군이 사용했던 슈네데르 CA1이나 생 샤몽 전차의 절반 수준에 불과한 몸집을 가진 경(輕)전차의 컨셉트에 가까웠다. 하지만 르노 FT-17이 다른 것은 크기 뿐만이 아니었다.

르노 FT-17은 현대 전차의 기준을 세운, 혁명적인 설계가 다수 도입되었다. 르노 FT-17의 가장 큰 혁신은 크게 '회전식 포탑'과 '내부구조'를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360도로 회전하는 르노 FT-17의 회전식 포탑은 100년도 넘게 지난 오늘날에도 전차 설계의 표준으로 통하고 있는 개념이다. 물론 회전식 포탑은 FT-17의 등장 이전부터 전함급에 해당하는 군함이나 경장갑차량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던 개념이었다.

하지만 르노 FT-17의 포탑은 달랐다. 포탑에 무장을 집중시키고 관측용 '큐폴라(Cupola)'를 결합한, 현대적인 전차포탑 구조를 처음으로 적용한 것이다. 큐폴라는 전차장이 내부에서 주변을 관찰할 수 있도록 포탑 상부에 마련한 관측기구로, 360도 회전 가능한 포탑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전장의 상황에 보다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또한 무장을 포탑에 집중시킨 구조를 통해 전투 효율이 크게 개선되었다. 이러한 방식의 전차포탑은 현대에도 표준으로 통하고 있는 방식이다. 차체 전면, 혹은 측면에 주포를 탑재하고 차체 이곳저곳에 부무장을 장착한 당대의 전차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선진적인 설계였다. 무장으로는 형태에 따라 37mm 단포신 야포 1문(수컷), 혹은 8m 호치키스(Hotchkiss) 기관총 2정(암컷)이 탑재되었다.

르노 FT-17은 내부구조면에서도 혁신적인 전차였다. 특히 '전투실'과 '엔진실'을 분리한 것은 당대 전차들 중 최초였다. 반면, 영국의 마크 시리즈 전차를 비롯한 기존의 프랑스군 전차들은 엔진실과 전투실의 구분이 없어, 전투실 내에 엔진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마크 시리즈 전차의 경우에는 시동 후 30분 만에 차내 온도가 섭씨 50도까지 치솟았다. 또한 엔진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소음은 전차의 가동 내내 승무원들을 괴롭혔다. 게다가 당시 기술의 한계로 인해 엔진에서 고온의 윤활유와 유독한 배기가스가 끊임 없이 새어나와 승무원들 입장에서는 지옥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르노 FT-17은 차체의 전방에 전투실을, 엔진실은 차체의 후방에 배치한 구조를 사용했다. 그리고 전투실과 엔진실 사이는 격벽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또한 엔진실은 차체 전방에서 공기를 빨아들여 뒤쪽에 배치된 엔진을 식힐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따라서 승무원의 전투 환경이 크게 개선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전방에 전투실을 배치하고 후방에 엔진실을 배치한 르노 FT-17의 내부구조는 이후 수많은 전차들이 채택하는 기본 개념이 되었다. 르노 FT-17의 설계는 오늘날에도 표준으로 통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시대를 앞선 설계사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자동차 제조사였던 루이 르노는 전차의 조종법을 자동차의 운전법과 비슷하게 설계했다. 르노 FT-17의 조종계통은 좌우 방향조절 레버 2개와 변속기 레버,  클러치/가속/브레이크 페달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덕분에 영국의 마크 시리즈 전차의 경우에는 조종에만 무려 3명이 달라 붙어야 했지만 FT-17은 단 1명의 조종수가 조종을 전담할 수 있었다. 또한 포탑의 경우, 전차장이 포수와 장전수를 겸하도록 설계하여 단 2명의 인원으로 운용할 수 있었다. 또한 작은 체적과 가벼운 중량으로 전장까지 수송하는 것이 용이하여 다른 대형 전차들에 비해 전선 구석구석까지 빠르게, 적절한 숫자가 전개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차체의 후방에 꼬리(Tail)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 역시 FT-17의 독특한 부분이다. 이 꼬리는 참호를 건널 때 일종의 지지대 역할을 해주었다. 이는 길이 4m 내외의 조그만 몸집을 가진 FT-17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뿐만 아니라 포탄의 착탄으로 인해 생긴 깊숙한 구덩이 같은 곳에 빠져 돈좌되는 일 역시 크게 줄여주었다.

르노 FT-17의 또 다른 무기 중 하나는 바로 '생산성'이다. 작은 크기에, 효율적인 설계를 통해 무게도 줄이면서 생산성까지 극대화시켜, 자동차 공업력 기반으로도 빠르게 양산할 수 있었다. 또한 사력을 다해 전차부대에 대한 지원을 이끌어낸 에스티엔느 대령의 노력과 당대에는 애국자로 불리웠었던 루이 르노의 협조로 생산 단가도 최대한 낮춰서 기존의 전차 대비 월등히 많은 수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르노 FT-17이 본격적으로 전선에 등장한 것은 제 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1918년 무렵이었다. FT-17은 에스티엔느 대령이 고안한 경량급 전차의 대량 운용을 통해 적을 빠르게 수세로 몰아 넣는 공세적 작전에 매우 알맞은 무기였다. 이 덕분에 FT-17은 제 1차 세계대전 말기에 프랑스군에 대량 채용, 가볍고 빠른 전차의 대량운용을 통해 참호전으로 고착화된 서부 전선을 기동전 양상으로 바꾸는 데 앞장섰다. 조국인 프랑스를 비롯한 연합군측에 확실한 승기를, 독일을 비롯한 동맹군측에게는 관짝의 못으로 작용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을 연합군의 확실한 승리로 이끈 FT-17은 세계 각국의 전차 설계 및 운용 교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르노 FT-17은 전쟁이 끝난 후, 세계 각지에 뻗어 나갔다. 가장 많은 수량을 사용한 미국의 경우, 1차 대전 동안 서부전선에서 프랑스와 함께 연합군의 일원으로 함께 싸우며 FT-17을 도입해 사용했다. 그리고 미국이 최초로 대량생산한 전차 역시 르노 FT-17의 면허생산품인 M1917 경전차였다. 즉, 르노 FT-17은 곧 미육군이 사용한 최초의 전차이기도 한 것이다.

르노 FT-17은 미국 뿐만 아니라 제정 러시아에서도 일부가 도입되어 사용되었으며, 1918년도에는 폴란드군에 다수가 공여되어 주력 전차로 사용되었다. 1919년도에는 일본에 장갑개량형인 NC-27을 포함해 13대 가량이 수출되어 각각 '르노갑형전차(FT-17 기반)', '르노을형전차(NC-27 기반)'라는 이름으로 운용되었다. 심지어 일본과 싸우고 있었던 중국 국민당군에도 소수가 수출되어 사용되었다. 제정 러시아가 사용한 르노 FT-17은 적백내전 당시 적군(소련군)에 노획되어 복제품까지 만들어졌으며, 이탈리아 피아트에서도 FT-17의 카피판에 해당하는 피아트 3000을 생산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르노 FT-17과 그 계통의 전차들은 수많은 국가들에 도입 및 운용되었다. 그리고 워낙 많은 숫자가 만들어졌기에, 전차 자체의 패러다임이 변화해 버린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르노 FT-17은 전선 곳곳에서 나타났다. 전 세계에 뻗어나간 르노 FT-17은 현대적인 전차의 기준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전차 전술을 개발하는데 있어서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차대전의 영웅에서 2차대전의 역적으로
현재의 르노자동차는 방위 사업 분야에서 손을 뗀 지 오래다. 이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루이 르노의 행적과 연관이 있다.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이 매우 빠른 속도로 전개되면서 르노의 자동차 공장이 소재했던 지역이 모두 나치 독일의 손에 넘어갔는데,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루이 르노는 전쟁이 빠르게 끝날 것으로 내다봤고, 이 때문에 직원들의 고용 유지를 위해 나치 독일군이 사용하게 될 수송용 트럭을 생산했다.

이는 다른 프랑스의 자동차 제조사인 푸조나 시트로엥과 크게 대조된다. 푸조의 경우에는 나치 독일에 대항하기 위해 태업은 기본에, 고의로 대량의 불량품을 납품해 피해를 입혔다. 심지어는 자사 공장을 파괴하려는 영국군의 작전에도 적극 협력, 실제로 자사의 공장을 폭파시키기까지 했다. 시트로엥의 경우, 독일 기술자와 절대 직접적으로 접촉하지 않는 것은 물론, 그나마 받은 일감도 생산 일정을 고의로 늘려 공급을 지연시키는 등의 사보타주를 적극적으로 행했다. 또한 두 회사 모두 연합군에 적극적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등, 어떻게든 점령군인 나치 독일군에 피해를 주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루이 르노의 예상과는 달리, 전쟁은 몇 년을 끌었고, 그의 행동은 자신을 겨누는 칼이 되어 돌아 왔다. 수송용 차량을 생산하는 르노자동차의 공장이 연합군의 표적이 된 것이다. 이 때문에 르노자동차의 공장은 몇 차례나 폭격을 얻어 맞아야 했다. 게다가 종전 후 샤를 드 골이 이끄는 프랑스 정부가 나치 독일에 부역한 죄를 물어 루이 르노는 옥살이를 해야 했고, 결국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그가 세운 르노자동차는 국유화되기에 이른다. 

르노 방위산업 부문의 오늘
르노자동차의 방위사업 부문은 국유화되는 과정에서 분리되었다. 이는 르노자동차를 자동차 전문 제조사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프랑스 정부의 정책에 기반한 것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르노의 승용 부문와 상용 부문이 서로 분리되어, 승용 부문은 르노자동차로, 상용 부문은 르노트럭(Renault Trucks)으로 개편되었다. 르노의 방위산업 분야는 르노트럭으로 이관되어 르노 트럭 디펜스(Renault Trucks Defense)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2018년, 르노트럭디펜스와 아크마트(Acmat), 파나르(Pahnard) 등의 3개사가 아르쿠스(ARQUUS)라는 이름의 회사로 합병되어 오늘날 프랑스군의 각종 기동장비를 공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