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했던차]국내최초 독자개발 중형트럭, 현대 바이슨

2020-08-26     모토야

현재까지 대한민국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자동차 제조사들은 공통적으로, 다른 제조사의 차를 라이센스 생산한 경력들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현대자동차 역시 마찬가지다. 현대자동차는 사업 초기인 1960년대 후반부터 미국 포드자동차(이하 포드)의 20M이나 코티나(Cortina), 1980년대에는 그라나다까지 생산했고, 1980년대부터는 일본 미쓰비시자동차와의 기술제휴를 통해 그랜저, 에쿠스 등을 공동으로 개발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현대자동차는 국내의 다른 제조사들에 비해 '독자생존'의 길을 가장 빠르게 걷기 시작한 자동차 제조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결과적으로 옳았다. 당대 국내 자동차 시장을 평정하다시피 했던 신진자동차는 자사 라인업을 몽땅 토요타의 양산차들로 채웠다가 토요타가 일방적으로 철수하면서 하루 아침에 주저 앉아버렸고, 미국 카이저 사의 민수용 지프를 라이센스 생산하고 있었던 신진지프는 상표권 문제로 인해 곤혹을 치러야만 했다.

 

현대자동차와 포드와의 제휴관계는 당시에도 그다지 원만하지는 못했다고 전해진다. 포드자동차는 현대자동차의 경영에 끊임없이 간섭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사업 초기의 라이센스 생산 체제 하에서는 기술 제공사인 포드의 요구에 그저 수동적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변화하는 시장의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어려웠다. 현대자동차가 국내 자동차 업계에서 빠르게 독자개발 체제로 전환을 시도한 것은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1970년을 전후하여 독자생존의 길을 선택한 현대자동차는 대한민국 최초의 독자개발 승용차 포니(Pony)를 시작으로, 현대자동차는 독자개발 모델을 하나 둘씩 늘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독자모델 개발 시도는 승용차 뿐만 아니라 상용차에도 이루어졌다. 오늘날 현대 포터의 조상인 'HD1000'이 그 사례 중 하나다. 1977년 등장한 이 차는 국내에서 캡오버형(1박스형) 상용차의 대명사로 통하는 기아자동차 봉고보다 3년이나 빨리 등장한 데다, 처음부터 독자 모델로 개발된 상용차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대자동차는 이 시기에 HD1000 보다 한 체급 더 큰 3~5톤급의 화물차 또한 독자 모델로 개발하여 HD1000과 함께 내놓은 바 있다. 현대자동차의 첫 3~5톤급 중형트럭 '바이슨(Bison)'이 그 주인공이다.

현대자동차는 1970년대 당시, 포드의 7.5톤~8톤급 화물 트럭과 덤프트럭을 생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현대자동차는 중소형급 상용차 라인업이 전무했다. 당시 시장에는 이미 다양한 중소형급 상용차 모델들이 출시되어 있었다. 소형급은 기아산업(現 기아자동차)이 일본 마쓰다로부터 라이센스를 받아 생산하고 있었던 T시리즈 삼륜차가 꽉 잡고 있었고, 지엠코리아(現 한국지엠) 등이 내놓고 있었던 엘프(Elf)와 기아산업의 타이탄(Titan, 1.25~2.5톤급), 복사(Boxer, 4~5톤급) 등이 포진해 있었다. 중소형 상용차 시장의 성장세를 감지한 현대자동차는 시장의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독자개발 모델을 1970년대 후반에 소형 상용차 HD1000 시리즈와 중형급 화물차 바이슨을 함께 내놓았다.

현대 바이슨은 오늘날 마이티와 메가트럭 사이에 해당하는 3~5톤급 화물차로 만들어졌다. 이 차는 외관 상으로는 당시 포드의 상용차를 참고한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프레임과 차축, 엔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모두 현대자동차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적용했다. 프레임과 차축은 포드자동차 D시리즈의 것을 가져왔고, 엔진은 영국의 엔진 제조사 퍼킨스(Perkins Engines)의 3.8리터(3,860cc) 디젤 엔진을 라이센스 생산해 장착했다. 이 엔진은 직렬 4기통 레이아웃을 가지며, 80마력의 최고출력과 25.1kg.m의 최대토크를 발휘했다.

1977년 현대자동차는 '현대 3톤 트럭'이라는 이름으로 출시하였다. 당시 현대자동차는 상용차 부문에서만큼은 '신생 제조사'의 위치에 있었고, 필연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을 띄게 되는 상용차 시장에서 선발주자들과 경쟁하기 위해 현직 운전기사들의 목소리를 TV 광고와 지면 광고에 싣는 등, 홍보에도 새로운 시도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실용적인 측면을 중시하는 상용차라고 할 지라도, 당시 제품명은 상당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이 때문에 현대자동차는 3톤 트럭의 출시 후 2년이 지난 1979년, 신문을 통해 차명을 공모했고, 이 때 바이슨이라는 이름이 지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새 이름을 얻은 지 불과 3년 만인 1982년, 현대 바이슨은 단종을 맞게 된다. 1980년, 신군부 정권의 국보위가 내린 ‘자동차공업 통합조치’ 때문이다. 자동차공업 통합조치는 명목 상, 자동차산업에 대한 국가 주도의 ‘구조조정’안으로, 60~70년대를 전후한 자동차 업계의 과잉투자와 가동률 저하를 바로잡겠다는 명분으로 내린 것이었다. 이 조치는 두 번의 조정을 거쳐 1982년에 시행되었으며, 1989년에 최종 해제되었다.

이 조치의 요점은 현대자동차와 새한자동차(지엠코리아, 現 한국지엠)는 승용차만 생산한다는 것과 기아자동차는 5톤 미만 소형 상용차만 생산하도록 하는 것이다. 현대자동차의 입장에서는 힘들게 개발한 상용차 라인을 전부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현대자동차는 소형 상용차 HD1000 시리즈를 1980년에 단종시킬 수 밖에 없었으며, 바이슨 역시 1982년, 태어난 지 5년만에 단종을 맞게 되었다.

현대 바이슨은 동시기에 출시한 HD1000 시리즈와 함께, '자동차의 국산화'라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첫 독자개발 승용차인 포니를 넘어, 상용차에서도 국산화의 첫 단추를 꿴 역사를 썼기 때문이다. 동시기에 개발되었던 HD1000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독자개발의 최초 단계였던 만큼 차량의 디자인이나 완성도가 떨어졌고 핵심 부품은 여전히 외국 기술에 의존해야 했지만 이 경험은 오늘날의 현대상용차의 초석을 다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