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바루 레거시 2.5 시승기

2012-04-18     김기범

레 거시는 스바루의 간판 모델이다. 지난해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스바루였다. 시승차는 레거시 2.5. 수평대향 4기통 2.5리터 172마력 엔진과 무단변속기를 얹고 네 바퀴를 굴린다. 파워는 다소 빠듯한 편. 하지만 낮은 무게중심과 정교한 AWD에 힘입어, 빼어난 균형감각을 뽐냈다. 레거시의 가치는 이렇듯, 탄탄한 기본기와 치우침 없는 상품성에서 빛난다.




폭 스바겐 원조 비틀과 포르쉐 356의 공통점은? 첫째, 포르쉐 가문의 작품이라는 점. 둘째, 수평대향 엔진을 얹었다는 점이다. 그럼 수평대향 엔진도 포르쉐의 아이디어일까? 아니다. 1896년 카를 벤츠가 처음으로 특허 냈다. 구조는 독특하다. 크랭크샤프트가 엔진의 가운데 자리한다. 피스톤은 서로 반대편을 바라본다. 그리고 양쪽 바깥으로 쭉쭉 뻗어나간다.

현재 수평대향 엔진을 고집하는 양산차 메이커는 포르쉐와 스바루뿐이다. 포르쉐는 911과 카이맨, 박스터 등 스포츠카 라인업에 얹는다. 스바루는 OEM으로 생산하는 일부 모델을 빼곤 전 모델에 얹는다. 두 브랜드가 엔진을 얹는 방식엔 차이가 있다. 포르쉐는 엔진을 뒤쪽에, 스바루는 앞쪽에 얹는다. 포르쉐엔 6기통만 있다. 반면 스바루엔 4기통도 있다.

지구 반대편의 두 자동차 업체가 수평대향 엔진에 ‘필이 꽂힌’ 이유는 같다. 구조적 장점 때문이다. 크랭크샤프트는 드라이브샤프트와 나란히 놓인다. 일반 엔진은 여기에서 피스톤이 위쪽으로 뻗는다. 반면 수평대향은 피스톤이 딱 이 높이에서 양쪽으로 누웠다. 그만큼 무게중심이 낮다. 기특하게도, 양쪽의 피스톤이 교차되면서 서로의 관성력까지 상쇄시킨다. 

나아가 엔진의 길이가 짧다. 따라서 무게중심을 앞 차축 쪽으로 최대한 당길 수 있다. 또한, 엔진이 좌우 대칭을 이룬다. 물론 단점도 있다. 윤활이 까다롭다. 엔진의 너비가 넓다. 따라서 전용 플랫폼을 써야 한다. 포르쉐는 이해가 간다. 비단 공간 활용을 위한 소형차의 컨셉트로 시작했다 굳은 전통일지언정, 스포츠카와 이해관계가 얼추 맞아 떨어졌다.

스바루 역시 소형차에 처음 얹었다. 그러나 이후 다른 엔진으로 갈아탈 기회가 얼마든 있었다. 그러나 스바루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스포츠카가 아닌데도, 수평대향 엔진에 깊이 심취했다. 여기서 둘의 공통점이 하나 더 드러난다. 기술지상주의다. 다른 건 몰라도 기술에 있어선 타협을 모른다. 남보다 더 잘할 수 있어서다. 자부심이 굉장하다. 

두 브랜드의 성향은 언뜻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위상엔 사뭇 차이난다. 포르쉐는 스포츠카의 대명사. 눈 튀어나올 성능과 가격을 동시에 거머쥔 드림카를 찍어낸다. 반면 스바루는 대중차 메이커. 성능과 가격 모두 상식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포르쉐가 고만고만한 규모로 반세기 이상 생존해 온 사실은 납득할 만하다. 워낙 특화됐으니까. 그럼 스바루는?

아마도 이 호기심을 풀 열쇠는 스바루의 제품에 숨어 있을 것이다. 아울러 해답을 가장 빨리 찾기 위해서는, 스바루에서 가장 많이 팔린 제품을 살피는 게 맞을 거다. 마침 스바루 레거시 2.5가 시승차로 마련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레거시는 스바루의 간판 모델. 지난해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스바루이기도 하다. 궁금증을 풀 절호의 찬스가 온 셈이다.

레거시는 ‘전설’이란 뜻이다. 1989년 데뷔했다. 이후 네 차례의 풀 모델 체인지를 거쳤다. 지금의 모델은 지난해 나온 5세대. 1~4세대 레거시는 미국와 일본에서 300만 대 이상 팔려 나갔다. 아웃백 또한 레거시의 가지치기 모델로 출발했다. 레거시 그랜드 왜건과 레거시 랭카스터를 거쳐, 아웃백으로 독립했다. 레거시와 아웃백은 안팎의 여러 부품을 공유한다.  

‘강력한 존재감’. 스바루가 밝힌 이번 레거시 디자인의 테마다. 수긍이 간다. 빵빵하게 부푼 펜더와 두툼한 사이드 스커트가 예사롭지 않다. 눈매도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다. 점잖 빼는 세단에선 찾을 수 없는, 묘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빼어난 외모까진 아니지만, 비교적 잘 생긴 축에 속한다. 비율도 안정적이다. 다부지고 당당한 자태에서 자신감이 배어난다. 




인 테리어는 수수하다. 겉모습처럼 기교를 최대한 아꼈다. 액세서리를 배제하고 기본 아이템만 간결하게 갖췄다. ‘디테일에 강한 일본차’, 이런 선입견을 심드렁하게 허문다. 오디오 자리에 내비게이션을 심으면서, 스위치 개수가 유독 적어 보인다. 기상천외한 신기술은 언감생심. 국산차의 꽃단장에 익숙한 소비자라면 이쯤에서 실망하고 돌아설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감성품질이 기막힌 것도 아니다. 형편없진 않지만, ‘옥에 티’가 꽤 눈에 밟힌다. 일부 패널의 이음매는 엉성하게 물렸다. 손길 자주 닿는 곳의 플라스틱마저, 냉동 탑차에서 얼린 것 마냥 딱딱하다. 레거시가 익숙할 북미 쪽의 평가는 의외였다. “그나마 좋아졌다”며 어찌나 반가워들 하던지. 내가 괜한 까탈을 부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출발이다.

레거시 2.5는 수평대향 4기통 2.5리터 엔진을 품었다. 자연흡기에 SOHC 방식이다. 실린더 블록과 헤드를 알루미늄으로 짰다. 나아가 스바루의 가변밸브시스템인 i-AVLS로 효율을 높였다. 저회전 땐 흡기 밸브 두 개 중 하나는 깊고 느리게, 나머진 얕고 빠르게 열린다. 고회전 땐 유압장치가 작동해 두 개의 밸브가 모두 깊고 빠르게 열려 원활한 호흡을 이끈다.

엔진의 최고출력은 172마력, 최대토크는 23.5kg·m. 여기에 무단변속기(CVT)를 물렸다. 굴림방식은 스바루의 주요 모델이 그렇듯 AWD. 그런데 같은 엔진에 자동 4단 변속기를 조합한 포레스터 2.5와 또 다른 구조다. 스바루는 변속기에 따라 AWD 시스템이 달라진다. 물론 공통분모는 있다. 어떤 변속기든, 구동력을 나눌 트랜스퍼까지 그 안에 품었다는 점이다.

가속엔 CVT의 특성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변속의 단절감이 없다. 엔진회전수는 초반에 팍 뜬 뒤 서서히 잦아든다. 속도와 엔진회전수는 비례하지 않는다. 낯선 감각이다. 대신 가속이 물 흐르듯 매끄럽다. 연료도 적게 태운다. 4기통이란 사실이 드리운 선입견과 달리, 가속은 제법 힘차다. 도로 위의 흐름을 부드럽게 따르고 가끔씩 앞장서 이끌기에 충분하다. 

스 바루는 ‘제로백’ 등의 성능제원을 밝히지 않는다. 스바루뿐 아니라 인피니티 등 일본 메이커의 공통점. 북미의 자동차 전문지에서 테스트한 결과에 따르면, 레거시 2.5는 0→시속 97km(시속 60마일) 가속을 9.4초에 마쳤다. 현대 쏘나타 2.4 GDI와 닛산 알티마 2.5는 8초대. 레거시가 AWD인 점을 감안하면, 딱히 빠지지 않는 가속성능이다. 

그렇다. 레거시는 AWD다. 국내에서 판매 중인 비슷한 급의 어떤 모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장점이다. 레거시를 꼭 꼬부랑길에서 몰아봐야 하는 이유다. 교외의 유명한 산자락을 찾을 필요까지 없다. 가속페달을 밟으면서 스티어링 휠 꺾을 상황은 세고 셌다. 우회전, 좌회전을 제외하더라도, 도로에 합류하거나 빠져나올 때마다 우린 ‘코너링’을 경험한다.

레거시의 장점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레거시는 욕심내어 속도를 높인들 노면에 착 가라앉은 느낌을 유지한다. 스티어링의 직결감도 뛰어나다. 2.5나 3.6이나, 이 같은 장점엔 차별이 없다. 하지만 레거시의 우월함은, 신경 써서 살피지 않으면 의식조차 하기 어렵다. 그 과정과 느낌이 너무 자연스러워서다. 같은 구간을 다른 차로 달려봐야 단박에 알 수 있다.




민 첩한 몸놀림의 비결은 밸런스다. 수평대향 엔진과 대칭형 AWD 시스템 등 스바루가 자랑하는 핵심 기술은, 모두 밸런스의 개념에 귀속된다. 포레스트가 그랬듯 엔진과 변속기, 트랜스퍼가 차의 한 복판을 지나간다. 좌우가 데칼코마니로 찍은 것처럼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 샤프트의 길이까지 같다. 따라서 동력은 최소한의 부품을 거쳐 최단거리로 전달된다.

스바루의 기술 가운데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 드물다. 엔진 정도다. 보닛을 열면 스바루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엔진룸 위쪽이 휑하다. 흡기 매니폴드가 엉켜있을 뿐 정작 엔진의 몸뚱이는 저 아래 밑바닥에 자리한다. 보이진 않지만, 변속기와 트랜스퍼도 딱 그 높이다. 수평대향 엔진의 장점은 포르쉐보다 오히려 스바루에서 더 피부에 와 닿는다.  

한편, 코너에서 강할지언정 레거시의 서스펜션은 부드러웠다. 때때로 버거울 만큼 누적된 롤링을, 균형감각과 AWD 시스템으로 버티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랠리 바닥을 휩쓴 스바루에게 서스펜션 굳히기쯤은 식은 죽 먹기. 승차감을 위해 과욕을 자제한 셈이다. 스바루의 테마, 밸런스는 이처럼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상품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가령 트렁크는 어코드보다 넓고, 뒷좌석은 캠리보다 넉넉하다. 연비가 뛰어나고, 눈길·빗길에 위축되지 않는다. 나아가 굽잇길 운전이 기다려진다. AWD가 기본인 걸 감안하면, 가격도 괜찮다. 레거시가 치장에 서투른 건 사실이다. 그러나 성능과 경제성이 뛰어나고 쓰임새가 좋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미국인에게 레거시가 사랑받은 건,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레거시는, 전설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충분했다.

글 김기범|사진 스바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