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규어 XKR 시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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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규어 XKR 시승기
  • 김기범
  • 승인 2012.08.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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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역시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여심´(女心) 사로잡는 데 재규어만한 차가 없다는 심증은 이제 확신으로 굳어간다. 재규어 XKR과 함께 한 며칠 동안, 거리에서 마주친 여인들의 시선은 ´얼음!´ 구호라도 들은 것처럼 ´꽁꽁´ 얼어붙었다. 과장 좀 섞어, 재규어에 붙박인 그들의 동공은 초고속 카메라로 찍은 개화(開花) 장면처럼 서서히 확장됐다.



여성의 유별난 반응을 강조했지만, XK 시리즈는 남성이 봐도 머릿속이 아득해질 만큼 멋진 차다. XKR의 뇌쇄적 자태는 조명 아래에서 극대화된다. 빛의 올가미에 걸린 격자무늬 이빨이 선연한 광채를 번뜩인다. 콧잔등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진 빛줄기는 차체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간다. 느릿느릿 걷다 시원스레 달음질치고, 부드럽게 솟다가 별안간 꺼져든다. XKR은 설령 경차 엔진을 얹었더라도 사고 싶고 안달이 날 만큼, 디자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먹어주는´ 스포츠카다. 재규어의 명차, E-타입의 잔영이 어른대는 앞모습도 압권이지만, 뒷모습에 비할 바는 못 된다. 단단히 뭉친 허벅지 근육과 풍만한 힙이 어우러진 뒤태는 가격이 두 배를 훌쩍 넘는 이태리제 수퍼카 못지않게 섹시하고 박력 넘친다.



도어를 당겨 XKR의 미끈한 옆구리를 가르면, 눈이 아릿할 정도로 화사한 인테리어가 펼쳐진다. 마음 속 깊숙이 침잠해 있던 과시욕과 허영심이 기지개를 켠다. 대시보드와 센터페시아엔 촘촘한 바느질로 꿰맨 가죽을 바지런히 펴 발랐다. 송풍구와 스티어링 휠의 스포크, 오디오 테두리엔 은은한 광택의 금속 패널을 정교하게 끼워 넣어 포인트를 줬다.



재규어는 디자인의 중요성에 일찌감치 눈을 뜬 브랜드였다. 창업자인 윌리엄 라이온스 경은 모터사이클 마니아였다. 삐뚜름하게 보면 딱 부잣집 한량이었다. 그는 모터사이클에 붙일 사이드카 하나를 만들어도 디자인을 챙길 줄 아는 멋쟁이였다. 그의 성향은 제품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재규어의 D나 E타입은 오늘날까지 자동차 디자인의 명불허전으로 손꼽힌다. 한편, XK는 재규어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하는 이름이다. 오토바이용 사이드카를 만들던 재규어가 1948년 처음 내놓은 본격 스포츠카가 XK120이었다. 재규어는 스포츠카로 시작을 일군 만큼 자동차 경주에도 열심이었다. 1950년대 프랑스의 르망 24시간 내구레이스는 재규어의 텃밭이었다. 1951~1957년까지 두 해 빼곤 우승컵을 싹쓸이했다. 재규어는 시상식마다 유니온잭을 나부끼며 프랑스인의 자존심에 피멍을 들였다.

재규어 XK는 스포츠카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 ´이단아´이기도 했다. 당시 경주차와 스포츠카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았다. 따라서 무릇 스포츠카라면 달리는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불편함은 기꺼이 감수해야하는 차로 인식됐다. 하지만 XK120은 달랐다. 성능이 뛰어나면서 실내가 조용했다. 움직임이 민첩하되 승차감은 매끄러웠다. 또한, 여성도 쉽게 다룰 수 있을 만큼 스티어링이 부드러웠다. XK120은 ´그랜드 투어러(GT)´의 개념을 정립시킨 주인공. 편안하게 장거리 주행에 나설 수 있는 차를 뜻한다. 가격도 합리적이었다. 당시 시속 200㎞를 내는 차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XK는 1961년 편안함을 강조한 E-타입에게 바통을 넘기면서 한동안 명맥이 끊겼다. 재규어는 1997년 XK를 다시 부활시켰다. 2005년 XK는 2세대로 풀 모델 체인지 됐고, 2009년 안팎 화장을 다듬고 심장을 강화시켜 지금에 이르렀다. XK 시리즈엔 자석이 붙지 않는다. 뼈대와 차체를 알루미늄으로 짰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쟁모델보다 훨씬 가볍다.



엔진은 510마력을 뿜는다. XK의 V8 5.0L에 수퍼차저를 붙인 결과다. 정체구간에선 XK와 별 차이 없다. 하지만 가혹한 채찍질을 날리면 흉포함을 드러낸다. 엔진회전수를 용솟음치듯 띄워 막강한 토크를 토악질하듯 내뱉는다. 이쯤이면 충분하다 싶은 순간을 사정없이 지나쳐 뻗어간다. XKR의 제원 성능은 0→시속 100㎞ 가속 4.8초, 최고속도 시속 250㎞다. 사뭇 비장한 외모와 달리 서스펜션은 부드럽다. 그래서 준비 없이 의욕만 앞선 운전자에겐 적당히 까탈도 부린다. 따라서 XKR의 잠재 성능을 100%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끈기를 갖고 차근차근 다가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처럼 편안함과 짜릿함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GT 고유의 성격은, 엇비슷한 성능의 ´화끈이´와 차별화된 재규어 XKR만의 매력이다.



스트레스 없이 안락한 크루징과 아드레날린 펑펑 샘솟는 스포츠 주행의 경계를 거리낌 없이 넘나들 수 있는 차는 흔치 않다. 깔끔하면서도 심심하지 않고, 섹시하면서도 천박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뽐내는 차는 더더욱 흔치 않다. 재규어 XKR은 그 모호하고도 숭고한 경지에 보란 듯이 올라섰다. 원조 XK가 그랬던 것처럼.


글 김기범│사진 재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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