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했던 차] 기아차 프라이드
상태바
[특별했던 차] 기아차 프라이드
  • 윤현수
  • 승인 2017.06.12 11: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엑센트와 함께 한국 소형차 시장을 대표하는 프라이드가 슬그머니 기아차 내수 라인업에서 이름을 지웠다. 그러나 4세대 모델이 하반기 출시를 예정하며 다시금 소형차 시장에 활기를 북돋을 예정이다.

프라이드는 현재 해외 시장에서 리오(RIO)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기아차의 대표 모델이다. 특히 1987년부터 30년 간 이어온 역사와 더불어 유럽 시장에서의 꾸준한 판매 호조로 기아차의 효자 모델로 자리한 기아차의 `자존심` 그 자체다.

1980년대, 시대착오적 성격이 매우 짙었던 당시 정부의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로 인해 입김만 불어도 휘청거리기 일쑤였던 기아차는 원박스카 `봉고`를 통해 명맥을 간신히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정부 역시 이 조치가 이름과는 전혀 맞지 않게 불합리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는지, 1985년에 합리화 조치를 해제하겠다는 예고문을 발표했다. 기아차는 소식을 접한 이후 조용히 신차 개발을 시작하게 된다. 프로젝트명 `Y`로 개발되었던 프라이드는 기아차가 만든 최초의 `월드카`였다.

당시 기아차 개발진들은 정부로부터 감찰단이 오면 개발 중이던 프로젝트 `Y`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소동을 벌였다고 이후 인터뷰를 통해 언급하기도 했다. 정부의 근시안적인 정책으로 인한 웃지 못할 해프닝이었다.

기아자동차는 이 프로젝트 `Y`를 포드, 마쯔다와 합작하여 빚어내었다. 설계는 마쯔다가 맡았고, 기아차가 생산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포드가 판매하는 방식의 월드카였다. 독자개발이 아닌 것에 다소 아쉬울 수 있으나, 당시 한국 자동차 산업 수준을 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또한 합리화 조치로 인해 자금난으로 여력이 턱없이 부족했던 기아차의 입장을 보자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월드카답게 국내 출시 1년 전에 포드 브랜드와 `페스티바`라는 이름을 가지고 해외 시장에 판매되었다. 깔끔한 디자인과 합리적인 구성을 통해 프라이드는 이미 성공을 맛봤다.

그리고 1987년, 공업합리화 조치가 해제됨과 동시에 기아차는 프라이드를 최초로 발표하며 소비자들의 기대감을 한껏 불어넣었다. 깔끔한 스타일링으로 많은 예비 구매자들을 환호하게 한 프라이드는 말 그대로 사그러들었던 기아차의 자존심을 다시금 북돋아준 자동차였다. 특히 프라이드라는 차명은 소비자 응모로 결정된 터라 더욱 의미가 깊다.

공식 출시 이후, 소형차 만들기 실력을 한껏 뽐냈던 마쯔다의 전륜구동 플랫폼을 사용했던 터라, 몸놀림부터 기존의 국산 자동차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이며 호평을 자아냈다.

심장 역시 마쯔다제 엔진을 사용했다. `B3`라 명명된 1.4리터 엔진은 69마력의 파워를 내었고, 5단수동 변속기를 장착하여 3.5미터 남짓한 차체와 마쯔다가 다듬은 하체를 통해 굽이진 도로에서 쾌감을 선사하기도 했다.

한편, 1988년도에 송출되었던 TV 광고에는 프라이드의 장점들을 잘 담아냈었다. 가볍고 작은 차체로 가뿐히 내달리는 면모라던가, 해치백 특유의 실용성과 같은 작은 차의 기쁨을 당시의 감성으로 표현했다. 물론 남성 모델의 다이내믹한 탑승 포즈 덕에 화제가 된 영상이기도 하다.

또한 프라이드 베타가 출시할 당시의 광고 영상에서는 슬라럼 코스를 부드럽게 주파하는 모습을 보이며 꽤나 파격적인 면모를 보였다. 여기에 날렵한 주행성능을 자랑하듯 프라이드를 이리저리 잡아돌리는 모습도 재밌는 광경을 연출했다.

다양한 베리에이션 모델의 출시도 인상적이었다. 짤막한 차체 덕에 적재 공간은 부족한 편이라 길이를 늘인 세단 모델 `프라이드 베타`도 출시했었다. 특히 해치백 모델과는 별개로 기아자동차가 독자적으로 설계한 것이 특징이었다.

여기에 당시 급작스레 유행을 탔던 왜건 시장에 발을 들이기 위해 5도어 왜건 모델을 출시했다. 또한 왜건 모델을 기반으로한 `프라이드 프렌드`도 내놨다. 범퍼를 늘리고 편의장비를 풍부하게 집어넣어 구성한 고급형 모델이었다.

또한 1991년에는 1.1리터 엔진을 장착한 `프라이드 pop`이라는 모델도 있었다. 당시 인기를 끌었던 티코와 마주하기 위해 저배기량 엔진을 탑재하고 편의장비를 덜어내어 가격을 낮춘 경제형 모델이었다. 여기에 승용 밴과 1.3리터 5도어 모델인 `프라이드 영`(Young)을 출시하는 등, 오랜 세월 동안 시장을 지켜왔던 지라 별의별 모델들이 시장에 나왔다.

1987년 첫 출시 이후 프라이드는 2000년까지 13년 간 판매를 지속해왔다. 1992년에는 소형차 시장의 40% 가량을 차지하며 아벨라의 출시 직전까지도 대활약했다.

프라이드가 시장의 인기를 독차지한 이유는 내구성이란 요소도 한몫했다. 마쯔다가 설계한 차체와 엔진은 내구성 측면에서 나무랄 데가 없었고, 이와 같은 내구성은 자연스레 소비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따라서 후속 차량인 아벨라가 1994년 출시되었음에도 프라이드는 2000년까지 판매되었다. 현재와 같이 모델 교체 주기가 짧은 시대에서는 상상도 못할 노익장이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은 거스르지 못했다. 현대차가 부드러운 감각으로 매만진 엑센트를 출시하며 소형차의 판도를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라이드는 모기업의 몰락과 함께 이름을 지웠다.

현대자동차에게 인수합병된 이후 리오가 그 명맥을 이어나갔으나, 2005년에 다시금 `프라이드` 차명을 가져와 부활을 알렸다. 2세대 프라이드는 파격적인 범퍼 스타일링과 깔끔한 디자인으로 형제 모델이자 경쟁작인 현대 베르나보다 시장에서 큰 호응을 받으며 기아차의 자존심을 북돋았다.

이후 3세대 모델이 국내외 시장에 출시되고, 4세대 모델도 해외 시장에 판매되는 등, 기아차의 수출 효자로서 명맥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역사에 있어 `만약`이라는 단어는 무의미하다만, 기아차 역사에서 봉고와 프라이드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현재의 스팅어를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