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카 세계의 진주들] 닛산 실비아 이야기
상태바
[스포츠카 세계의 진주들] 닛산 실비아 이야기
  • 박병하
  • 승인 2017.06.12 11: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80~90년대, 세계의 자동차 시장은 스페셜티카(Specialty Car)의 전성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표적인 예시로, 현대자동차의 스쿠프와 동사의 티뷰론, 투스카니 등을 들 수 있다. 스페셜티카는 값비싼 진짜배기 스포츠카들에 비해 낮은 성능을 지니고 있지만 스포츠 쿠페의 매력적인 외모와 남다른 주행감각을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접근할 수 있어,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낭만을 좇던 전 세계의 수많은 젊은이들을 매료시켰다.



이 당시에는 바다 건너 일본도 스페셜티카의 전성시대였다. 버블의 풍요와 함께 찾아온 스페셜티카의 황금기는 수 많은 차들을 낳았다. 물론 오늘날에는 이 당시에 등장했던 스페셜티카의 대부분이 사라지고 몇몇 차종만이 명맥을 잇고 있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와 함께 사라져간 스페셜티카 중 몇몇은 `대중의 스포츠카`로 통하며 오늘날에도 자동차 애호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차들 중 하나가, 본지에서 소개할 닛산의 `실비아`다.



초대 닛산 실비아는 1964년 도쿄 모터쇼에서 `닷슨 쿠페 1500(Datsun Coupe 1500)`이라는 이름으로 일반에 처음 공개되었다. `실비아 CSP311`이라고도 불리는 이 모델은 본래 닛산의 스포츠카였던 페어레이디(Fairlady)의 컨버터블 모델을 기반으로 하는 차였다. 외관 디자인은 본드카로 활약했던 일본차, `토요타 2000GT`를 디자인한 `알브레히트 괴르츠(Albrecht Goertz)`가 맡았다. 초대 닛산 실비아는 페어레이디의 섀시에 괴르츠 디자인의 차체를 장착하여 만들어진 특별판 `수제차`로서 만들어졌다. 1965년에 초도 생산을 시작, 1968년까지 생산된다.


이 수제 실비아는 일본 최초의 풀 싱크로나이저를 갖춘 4단 수동변속기를 지니고 있었고 날카로운 선이 돋보이는 스타일링이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매력적인 외모와는 달리, 승차감이 나쁜데다 수작업으로 생산하는 통에 생산성도 낮았다. 가격 또한 비싸서 스카이라인이나 페어레이디에 근접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스카이라인 세단과 페어레이디에 밀려, 상업적으로는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총 생산량은 554대에 불과해, 당시에도 희귀한 차였고 지금도 고향인 일본을 비롯한 세계의 클래식카 시장에서 높은 가격이 형성되어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스페셜티카로서의 닛산 실비아는 1972년부터 생산된 2세대 모델(섀시 코드 S10)부터라고 볼 수 있다. 소형차인 닛산 써니(B210)의 플랫폼을 활용하여 제작되었으며, 초대 모델과는 사실 상 이름만 이어 받았을 뿐, 기반 설계부터 완전히 다른 차종이었다. 1976년부터는 연료 공급 체계에 인젝션 방식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77년부터 간단한 페이스리프트와 함께 5마일 범퍼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해외 시장에서는 엔진 사양에 따라 `닷슨 200SX`, 혹은 `닷슨 180SX` 등으로 불렸다. 그러나 내수 시장에서는 지나치게 개성이 강한 스타일링이 발목을 잡아, 경쟁자인 토요타 셀리카보다는 부진한 실적을 보였다.




79년부터 생산을 개시한 섀시 코드 S110의 3세대 모델은 너무 독특해서 인기를 얻지 못했던 2세대와 달리, 대중성을 의식한 새로운 디자인을 채용하였다. 4등식 헤드램프를 비롯하여, 기본형인 노치드 쿠페 이외에도 3도어 패스트백 모델을 마련하였는데, 일본에서는 이를 `하드 톱` 모델로 불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S110 실비아는 매월 4천대를 웃도는 판매량을 자랑하는 인기 모델로 부상하여, 토요타 셀리카, 혼다 인테그라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스페셜티카로 본격적인 발돋움을 시작한다. 또한, WRC 등, 닛산의 모터스포츠 참가를 위한 기반이 되는 모델로도 활용되었다. 해외 시장에서는 닛산 `가젤(Gazelle)`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으며 북미 시장에서는 기존 2세대가 사용하던 200SX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특이하게도, 멕시코에서는 `닷슨 사쿠라(Datsun Sakura)`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다.



섀시 코드 S12에 해당하는 4세대 실비아는 80년대 유행했던 리트럭터블 헤드램프(혹은 팝업식 헤드램프)를 채용한 디자인이 특징적이다. 또한, 일본차 최초로 유리 재질의 썬루프를 탑재한 모델이기도 하다. S110과 같이, 2도어 노치드 쿠페와 3도어 패스트백 쿠페 모델로 판매되었다.



만화 `이니셜D`를 보고 자란 세대들에게 익숙한 실비아는 단연 5세대 모델(섀시 코드 S13)부터라고 할 수 있다. 작중 주인공인 후지와라 타쿠미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주유소의 직장 선배인 이케타니 코이치로가 타는 차로 등장한 모델이 S13 실비아인데, 주인의 부족한 실력 탓에 작중에서 크고 작은 손상을 빈번하게 겪는다. 그 외에도 작중 등장하는 수많은 단역들의 차로 등장하는 S13은 주인공이나 주요 배역들에게 여기 저기서 깨지는 엑스트라나 리액션 담당이다. 작품 전반적으로 대우가 좋지 못한 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에서 S13 실비아는 역대 실비아 모델들 중에서 상업적으로 가장 흥행한 모델이다. 실비아의 전성기는 이 때부터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유의 스포티한 디자인이 인기 요인으로 작용했는데, 이 때문에 닛산은 `아트 포스 실비아(Art Force Silvia)`라는 문구로 광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치 이를 입증하기라도 하듯, 출시 이후 일본 굿 디자인 어워드 대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그 외에도 한정 사양으로 닛산의 특장차 전문 자회사, `오텍 재팬(Autech Japan)`이 개발에 참여한 컨버터블 모델도 존재했다.



S13 실비아는 비록 본격적인 스포츠 쿠페의 성능에는 못 미치지만 일상용 승용차의 가격에 구할 수 있는 `접근성`과 우수한 `디자인`이라는, 스페셜티카의 근본적 가치를 충실하게 따른 차였다. 여기에 당시 기준으로 다양한 편의사양을 마련하여 상품성까지 높았다. 이 덕분에 주요 고객인 청년층에게 크게 호응을 얻으며 총 30여만대가 팔려 나갔다. 이는 당시 손꼽히는 인기 차종이었던 혼다 프렐류드를 뛰어 넘은 것이다. 이니셜D에 등장하는 수많은 단역들이 실비아를 타고 다니는 것도, 그만큼 실비아가 상업적 흥행에 성공했음을 반영한 부분으로 해석할 수 있다.


S13 실비아는 초기에는 1.8리터 배기량의 직렬 4기통 CA18 엔진을 사용하다가 91년도의 부분변경 이후부터 직렬 4기통 2.0리터 SR20 엔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SR20엔진은 르노삼성자동차의 초대 SM5, 그 중에서도 직렬 4기통 엔진 사양인 SM520에 탑재되었던 그 엔진이기도 하다. 첫 출시부터 터보 버전과 자연흡기 버전을 따로 두었으며, SR20 엔진을 사용하는 후기형에서는 자연흡기 140마력, 터보 205마력의 성능을 냈다.


이제는 실비아의 이명(異名)이 되다시피 한 `드리프트 머신`으로서의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때도 이 S13부터다. 이 당시의 실비아는 기본적으로 휠베이스가 길고 전방의 중량이 약간 무거웠다. 이 덕분에 기본적으로 드리프트 주행에 알맞은 디멘젼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스페셜티카의 특성 상, 순정 상태에서는 일반적인 승용차 수준의 적당한 성능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적당주의스러운 성향은 다양한 방향으로 튜닝이 가능한 `자유도`로 작용했다. 이러한 특징과 함께, SR20 엔진이 지닌 높은 포텐셜 등이 적절하게 어우러지면서 소유자가 입맛대로 조정할 수 있는 폭이 넓었다. 이 덕분에 실비아는 다양한 방면으로 튜닝이 이루어졌고, 그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설정이 바로 차 자체의 특성을 활용한, 드리프트를 중시한 설정이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지금도 일본의 드리프트 경기인 `D1 그랑프리` 등지에서 여전히 빠지지 않는 단골손님이다.



S13 실비아에게는 같은 플랫폼에서 만들어진 `180SX(원에이티SX)`라는 형제차가 있다. 해외 시장에서는 2.4리터 KA24 엔진을 장착하고 `240SX`라는 이름으로 수출되기도 했다. 이 차는 S13 실비아와 부품 호환성이 높은 차종이었으며, 차량 전반의 설정 역시 실비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리트럭터블 헤드램프와 패스트백 스타일의 루프를 지닌 실비아라고 봐도 좋은 차였다.


이 차를 언급하는 이유는 실비아와의 놀라운 부품 호환성에 있다. 당시 180SX는 동시기의 리트럭터블 헤드램프를 탑재한 당대의 모든 차량들 중에서 차체 전면의 수리비가 차 값에 비해 매우 비싼 것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이 때문에 180SX를 운행하다가 사고 등으로 전면이 손상된 경우, 오히려 S13 실비아의 전면을 통째로 떼어다가 교환하는 것이 수리비가 더 저렴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본의 아니게 S13 실비아의 얼굴을 뒤집어 쓰게 된 180SX들이 생겨났다. 이렇게 된 180SX들은 튜닝 샵이나 튜닝 잡지 등에서 일종의 은어로, 실비아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실`과 원에이티(180SX)의 `에이티`를 따서 `실에이티(シルエイティ, Sileighty)`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그 역도 당연히 성립하므로 180SX의 전면을 떼어다가 실비아의 차체에 접합한 원비아(원에이티 실비아)라는 사례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 조합은 일본 내수 시장에서는 선호되지 않았고, 오히려 미국 시장에서 더 성행했다.



6세대 모델에 해당하는 S14는 1993년부터 생산되기 시작했다. S14 실비아는 선대에 해당하는 S13의 플랫폼을 유지하면서도 차체가 커진 점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디자인 역시 크게 변화했으며, 파워트레인의 성능 역시 향상되었다.



그렇지만 S14 실비아는 S13 시절만큼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 이유는 비약적으로 커진 차체 크기에 있었다. 배기량 하나만을 기준으로 하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일본은 배기량에 더하여 차체 크기까지 과세 기준으로 삼는다. 이 때문에 같은 배기량이라도, 차체 크기가 커져버리면 더 큰 차에게 부과되는 세금을 물어야 했기에, 기존 소비자들이 거부감을 갖게 된 것이다. 이 차체 크기 문제는 96년에 있었던 페이스리프트에서도 해결을 보지 못했다. 닛산은 S14 실비아에 향상된 성능의 파워트레인과 운전석 에어백을 전 차종 기본 적용하는 등, 상품성 향상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페이스리프트 모델이 단종되는 그 날까지 이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고, 버블이 꺼져가던 시기였던 사정도 겹쳐서 단종을 맞는 99년도까지 판매는 부진했다. 비록 상업적으로는 부진했으나, S14 실비아는 S13 시절의 기본 바탕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 여전히 드리프트에 강한 차종으로 통했다.



실비아의 가계도를 통틀어 마지막에 해당하는 7세대의 S15 실비아는 선대 모델이 단종된 1999년에 태어났다. 플랫폼은 여전히 S13의 것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S14의 가장 큰 불만 요소였던 차체 크기를 크게 줄이고 주행 성능 전반의 향상을 이루며 S13이 누렸던 인기를 점진적으로 회복해 갔다. SR20엔진은 최고출력이 160마력으로 향상되었고 SR20 터보 엔진은 최고출력을 250마력까지 끌어 올렸다. 지금도 S15 실비아는 일본의 D1 그랑프리를 비롯한 각종 모터스포츠를 여전히 현역으로 달리고 있다.



S15 실비아는 일본 최초의 리트럭터블 하드 톱 컨버터블이기도 하다. 1999년 도쿄 모터쇼에 출품한 오텍 재팬과 타카타 산업과의 공동개발로 제작된 실비아의 하드 톱 컨버터블 버전은 2000년도부터 판매를 개시했다. 이 외에도 스타일-A, V패키지 등, 다수의 특별사양 모델들을 출시해가며 상품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버블 이후, 스포츠카 사업의 전반적인 침체와 더불어, 2000년부터 발효된 자동차 배출 가스 규제를 만족시키지 못하며, 닛산 스카이라인 GT-R(BNR34)와 함께 단종되고 말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