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했던 차] 기아 브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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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했던 차] 기아 브리사
  • 윤현수
  • 승인 2017.08.24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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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을 올린 지 19일 만에 천만 명이 울고 웃었다. 8월 2일 개봉한 `택시운전사`는 80년에 일어난 광주의 자랑스럽고 가슴 아픈 역사를 다룬, 올 여름 가장 뜨거운 영화다.

극의 주인공들을 태운 채 광주로 발걸음을 향한 초록빛의 택시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련해 보이는 눈동자에 클래식한 멋을 품은 그 자동차는 기아자동차의 현재를 있게 해준 소형차, `브리사`였다.

브리사는 기아차 역사와 더불어 대한민국 자동차 역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자동차다. 당시, 패기 하나로 걸어온 기아차에게 있어 모자란 기술력을 전수해줄 `멘토`가 필요했다. 멘티가 된 기아자동차의 선택은 일본 브랜드였다. 마쯔다(당시 동양공업)와 손을 잡은 기아차는 엔진 기술을 비롯한 소중한 알토란들을 통해 브랜드 최초의 승용차를 제작하기로 했다.


1973년, 기아자동차는 마쯔다 기술력을 근간으로 한 최초의 국산 휘발유 엔진을 빚어냈고, 이듬해에는 `파밀리아`라는 마쯔다제 소형 세단 차체를 기반으로 `브리사`를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포니와 같이 완전한 독자모델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기아차의 손길이 담긴 심장을 장착함과 동시에 당시 대두되던 `국산화`에 힘을 기울인 것이 최대 특징이었다. 기아차는 정부의 자동차 부품 국산화 정책에 힘입어 브리사의 국산화율을 90%까지 끌어올리며 저력을 보였다.

여담으로, 브리사가 세상에 등장하기 이전, `마스터 픽업`이라는 이름의 소형 픽업트럭이 시장에 나왔었다. 브랜드 최초의 승용차인 브리사의 원만한 탄생을 위해 기아차가 시험 삼아 제작한 모델이었다. 브리사에 담긴 1리터 엔진이 일찍이 활용되기도 했다.

기아차는 파밀리아 특유의 깔끔한 바디 스타일을 자신들의 재해석을 통해 미려하게 다듬었다. 초기형인 S-1000은 전장이 3.9미터도 안 되는 컴팩트한 크기를 자랑했고, 몸무게도 800kg 가량에 불과해 자아내는 몸놀림이 산들바람에 진배없었다.


아울려 가볍고 작으니 연비도 좋아 당시 세 차례나 일었던 오일쇼크에 국민들은 브리사에 시선을 모았다. 브리사보다 덩치가 컸던 당시 자동차 시장의 터줏대감인 코티나와 시보레1700과 같은 차량들은 상대적으로 외면 받을 수 밖에 없었다.

1975년, 브리사는 한 해 1만명 국민들의 품에 안겨 승용차 부문 점유율 60%에 달하는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했다. 특히 부품조립 생산에 그쳤던 여타 제조사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에 비해 기아차의 생산방식은 `자동차 신토불이`의 시작을 알린 셈이었다,


포르투갈어로 `산들바람`을 뜻하는 브리사(Brisa)는 그 의미와 같이 `가볍게 부는` 바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대한민국 도로에 불어온 브리사는 그저 산들바람에 지나지 않았다. 풍경을 뒤바꿔버린 `돌풍`이었다.

그런데 브리사의 파죽지세도 오래가진 못했다. 현대차가 정주영 회장의 뚝심을 바탕으로 최초의 독자 모델 `포니`를 내놓은 것이었다. 자동차 디자인 거장의 손길을 받아 제작된 세련된 스타일링 덕에 브리사는 결국 꼬리를 살랑대는 조랑말에게 승용차 시장의 왕좌를 내주고 말았다.


기아차는 이에 쉽게 굴복하지 않으려 브리사를 다듬는 데에 주력했다. 포니에 대응하는 1.3리터 엔진을 얹고 크기도 늘이며 개선을 거친 브리사2를 내놓았고, 1978년 출시된 K303이라 명명한 후기형 모델에는 왜건 가지치기 모델도 포함하여 탄탄한 라인업 구성에 힘을 기울였다.

주도권을 빼앗기긴 했어도 브리사는 포니와 함께 국민 소형차로 포지셔닝하는 데에 성공했다. 특히 K303의 경우 파밀리아가 신형 모델로 탈바꿈하며 차체 구조 변경과 더불어 여러 신기술이 적용된 것이 특징이었다. 기아차는 새로이 더해진 가스식 댐퍼와 더불어 하이드로백 타입의 디스크 브레이크 등을 통해 제동력과 승차감을 강조했다.


그러나 브리사의 최후는 비참했다. 1981년, 전두환 정부가 자동차 시장의 경쟁 체제를 억지로 개편하며 기아자동차의 승용차 생산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라는 정책을 통해 기아차는 상용차 제작 및 생산만 가능하게 되어 결국 7년의 세월 만에 산들바람이 멈췄다.

자유시장 경제 논리에 따라 치열한 경쟁을 펼치던 자동차 제조사들은 때 아닌 날벼락을 맞게 되었고, 기아차는 그 희생양 중 하나였다. 결국 정부의 손이 불쑥 들어와 엉망진창이 된 시장에 1987년, 합리화 조치 해제가 이뤄지며 기아차는 칼을 갈고 닦아 프라이드를 내놓았다. 브리사는 그렇게 13년만에 프라이드에게 소형차 타이틀을 건네주고 편히 잠들 수 있었다.

한국 자동차 역사를 화려하게 수놓은 브리사는 포니와 함께 드라마나 영화 속의 7~80년대 대한민국 도로를 실감나게 재현해주는 오브제로서 꾸준히 활약해오고 있다. 그 작은 몸집으로 수많은 서민들을 품고 열심히 달린 브리사는 그 시대를 살았던 국민들의 가슴에 여전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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