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을 돌아보다] 전설에서 신화가 된 사나이, 아일톤 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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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을 돌아보다] 전설에서 신화가 된 사나이, 아일톤 세나
  • 김상혁
  • 승인 2018.02.09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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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을 넘어간 인류의 자동차 역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노력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이는 기술적인 부문에서, 어떤 이는 경영의 측면에서, 또 어떤 이는 심미적인 부문에서 혁신을 제시하고 이를 성취해 냄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또한 모터스포츠에서의 전설적인 활약으로 이름을 날렸던 이들도 있다. 본 연재는 자동차의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들에 대하여 돌아 보고자 한다. 이번 인물은 F1 역사에 영원히 기억될 이름, 전설에서 신화가 된 사나이 ‘아일톤 세나’에 대한 이야기다.

브라질 출신의 F1 드라이버 아일톤 세나는 F1 팬들에게 특별한 드라이버다. 그가 특별한 이유는 수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감동을 안겨 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여 년이 흘렀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기억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한 이야기는 지금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제 F1 팬뿐 아니라 자동차 마니아들에게는 일반 상식으로 자리한 아일톤 세나의 이야기 중 빼 놓아선 안 될 몇 가지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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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시작

아일톤 세나는 자동차에 쉽게 접근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 대부분의 드라이버들이 그러하듯 아일톤 세나도 카트를 통해 레이스를 시작했다. 그의 누이인 비비안느 세나는 아일톤 세나에게 생일 선물로 카트를​ 주었다. 카트를 선물 받은 아일톤 세나는 카트에 빠져들어 매일같이 카트를 몰아댔다. 그의 어머니인 네이드 세나는 아일톤 세나가 어린 시절 학교에서 수업을 집중해서 열심히 들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집에 돌아와 카트를 더 타기 위해서"라고 했을 정도로 아일톤 세나는 카트에 빠져 있었다.

그렇게 매일 카트를 몰고 실력을 키우던 세나는 13살에 정식으로 카트 레이싱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미 카트 그랑프리, 카팅 월드 챔피언십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며 전설의 기점을 만들었다. 하지만 레이서가 되기를 원했던 아일톤 세나는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야 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자신의 뒤를 이어 사업가가 되어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포뮬러 포드 2000 레이스팀이 아일톤 세나에게 계약을 제안했고 아일톤 세나는 이 제안을 수락하여 브라질을 떠나 영국으로 날아왔다. 본격적인 레이서의 길로 들어선 세나는 곧바로 두각을 나타내며 1983년 F3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1984년 톨맨과 계약하며 F1 무대에 입성했다. 그렇게 전설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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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모나코, 레인 마스터

아일톤 세나는 ‘천재’라는 수식어 외에도 ‘레인 마스터’, ‘미스터 모나코’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아일톤 세나를 대변하는 세 가지 수식어가 탄생된 것은 1984년 6월 3일 모나코 몬테카를로 그랑프리 경기에서다. 추월이 까다롭고 위험하기로 유명한 모나코 서킷, 더구나 비까지 내려 시야 확보가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코스 이탈 위험성까지 존재한 악조건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일톤 세나는 모두에게 자신을 각인시켰다. 시작은 13위로 출발했지만 앞선 레이서들을 하나, 둘 추월해나가며 8위에 위치하며 미스터 모나코의 면모를 드러냈다.

당시 아일톤 세나 앞에는 만프레드 윈켈로, 로스버그, 니키 라우다. 나이젤 만셀, 알랭 프로스트 등이 질주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아일톤 세나는 망설임 없이 치고 나가며 선두권과 간격을 좁혔다. 그러던 중 2위로 달리던 나이젤 만셀이 빗길에 미끄러졌고 그 사이 아일톤 세나는 케케 로스버그를 추월, 3위에 올라섰다. 이제 그의 앞에 남은 선수는 전설적인 드라이버 알랭 프로스트와 니키 라우다, 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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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를 엿보던 아일톤 세나는 위험 지역에서 과감한 주행을 펼치면서 니키 라우다를 제친다. 당시 중계를 하던 해설자 제임스 헌트를 비롯해 관중들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무모할 정도의 터프한 주행에 감탄하면서 기대감을 품게 만들었다. 그 기대감은 1위를 달리고 있는 알랭 프로스트를 추월할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F1을 뜨겁게 달굴 천재 탄생에 대한 기대감이었다.

무서운 기세로 달리던 아일톤 세나는 알랭 프로스트를 압박하며 한 바퀴당 약 3초 정도의 시간을 단축시켜 나갔다. 하지만 알랭 프로스트는 빗길 운전이 위험하다고 판단해 주최 측에 대회 중단을 요청했다. 주최 측에서는 알랭 프로스트의 의견을 받아들여 알랭 프로스트가 1위를, 세나는 2위인 채로 경기를 마감하게 된다. 그리고 결승선에서 프로스트를 속도를 줄이며 들어온 반면 아일톤 세나는 알랭 프로스트를 지나치며 빠르게 질주하며 결승선을 통과했다. 마치 실질적인 우승은 자신이라며 항변하듯 손을 흔들고 세리머니까지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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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최종 순위는 2위였지만 미래 세계 챔피언의 화려한 등장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또한 1984년 모나코 그랑프리 이후 1987년 모나코 우승 등 역대 최다 모나코 그랑프리 우승자로 자리매김했고 1985년 포르투갈 그랑프리, 벨기에 그랑프리 등 비가 내리면 저력을 발휘하며 ‘레인 마스터’ 칭호까지 얻었다.

브라질의 영웅

흔히 축구에서 브라질 선수를 ‘브라질리언’으로 부르곤 한다. 독특한 리듬과 유쾌한 몸짓, 경이로운 반사 신경에 대한 찬사를 담은 표현이다. 아일톤 세나 역시 브라질 특유의 삼바 DNA와 경이로움을 가진 드라이버였다. 아일톤 세나는 경기 중 상당히 과감하게 상대를 추월하곤 했다. 설령 충돌이 발생할지도 모를 상황에서조차 물러섬이 없었고 그런 모습에 팬들은 더욱 환호했다.

평소에는 얌전하고 천진난만한 미소로 친근감을 내비치는 것과 상반됐기 때문에 그의 모험심은 더 빛나 보였다. 여기에 아일톤 세나만의 코너 공략 모습은 놀랍다 못해 경이로웠다. 코너 진입 혹은 탈출에서 아일톤 세나의 머신은 뒷부분이 춤을 추곤 했다. 브라질 전통 춤 ‘삼바’처럼 엉덩이를 흔들며 코너를 빠져나갈 때면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던 관중들도 열광했다. 아일톤 세나의 코너 공략은 팬들에게 또 다른 카니발 축제였고 아일톤 세나에게는 트랙 위의 그립을 본능적으로 잡아내는 전매특허 기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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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에서 아일톤 세나의 위상도 남달랐다. 당시 브라질은 극심한 빈부격차와 치안 등 불안정한 시기였고 희망을 필요로 했다. 세계적인 스포츠 경기인 F1에서 승승장구하는 아일톤 세나는 그런 브라질의 영웅이었고 희망을 비추는 존재였다. 아일톤 세나 역시 조국의 열악한 상황을 항상 안타까워했으며 매번 브라질 국기를 흔들며 국민들을 위로했다. 그러던 중 1991년 아일톤 세나는 브라질 국민들에게 크나큰 희망을 안길 기회를 얻는다. 바로 1991년 3월 21일 상파울루 인터고라스에서 열린 브라질 그랑프리다.

시작 전부터 경기장은 아일톤 세나를 외치는 함성으로 가득 찼고 출발도 순조로웠다. 시종일관 선두를 지키며 달렸고 한창 레이스가 진행되던 54바퀴째는 하늘에서 비까지 내렸다. . 비가 내리자 아일톤 세나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찌르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레인 마스터 출현을 암시하는 듯했다. 손쉽게 우승을 취할 것만 같았던 최상의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얄궂게도 변속기에 이상이 생겼고 6단으로만 레이스를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결승점까지 남은 바퀴는 7바퀴. 

그토록 갈망했던 조국에서의 우승을 놓칠 수 없었던 아일톤 세나는 온 힘을 다해 남은 7바퀴를 이어갔다.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고 레이스를 이어간 끝에 아일톤 세나는 첫 번째로 결승선을 통과하게 된다. 아일톤 세나는 결승선을 통과하며 울부짖는 듯한 괴성을 지르며 기쁨을 만끽했고 브라질 국기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는 머신에서 걸어 나오지못한 채 기절하고 만다.

정신을 차리고 난 후에도 어깨와 목 등이 근육 경련으로 인해 고통을 안겼다. 스티어링 휠을 부여잡고 있던 손 조차 도움을 받아 떼어냈다. 시상대에 올라서 힘차게 브라질 국기를 흔들고 싶었겠지만 경련이 극심한 탓에 간신히 국기를 치켜드는 것이 고작이었고 우승 트로피도 한 팔로 겨우 들어 올렸다. 이후 소감을 묻는 자리에서 아일톤 세나는 팬들의 성원이 뜨거워 꼭 우승을 하고 싶었다 밝히고 우리가 함께 해냈다며 기쁨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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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국민들과 기쁨을 나누면서도 아일톤 세나는 개인이나 병원 등 끊임없는 기부활동을 진행했다. 특히 어린이들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들은 그를 더욱 위대하게 만들었고 그가 세상을 떠날 때 브라질은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그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그가 건네준 희망에 최상을 예우를 보였다.

세기의 라이벌

아일톤 세나를 이야기하는데 있어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있다면 그건 바로 알랭 프로스트다. 4번의 월드 챔피언을 차지한 전설적인 드라이버이면서 아일톤 세나와 끊임없는 경쟁구도를 이어갔던 인물이다. 

다시 1984년으로 돌아가 모나코 그랑프리 경기 중단으로 2위를 차지한 아일톤 세나는 “F1은 정치이며 돈이다. 무명의 신인은 이런 일을 이겨내야 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이때부터 알랭 프로스트와 아일톤 세나는 묘한 기류의 경쟁 관계가 형성된다. 당시 알랭 프로스트는 맥라렌 소속이었고 아일톤 세나는 톨맨 소속이었다. 이듬해 아일톤 세나는 로터스로 팀을 옮겼으나 얼마 안 가 맥라렌으로 이적하며 알랭 프로스트와 한솥밥을 먹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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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존재할 수 없고 한 울타리 안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살 수는 없는 법. 둘의 경쟁 구도는 치열해지게 된다. 1988년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아일톤 세나는 ‘미스터 모나코’답게 선두를 유지하며 우승 문턱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지나치게 속도를 높인 탓에 코스를 이탈하고 리타이어 하며 알랭 프로스트에게 우승을 건네준다. 알랭 프로스트는 이를 두고 “나를 이기려 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모욕을 주려 했다.”면서 불쾌함을 드러냈다. 결승선 통과보다 두 머신의 간격을 벌리는데 초점을 뒀다는 점이 모욕적이라는 것이었고 둘 사이 감정의 골은 깊어져만 갔다. 

둘의 경쟁은 심화됐지만 맥라렌 팀 입장에서 보면 시즌 내내 우승 트로피를 싹쓸이하는 기염을 토해내는 경쟁이었다. 알랭 프로스트와 아일톤 세나가 경쟁하면서 번갈아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고 마침내 1988년 10월 30일 일본 그랑프리에서 최종 월드 챔피언이 갈리게 될 운명을 맞이한다. 둘 중 일본 그랑프리 우승을 차지하는 쪽이 월드 챔피언에 오르는 상황이었다. 

아일톤 세나는 초반 스타트가 늦었음에도 경기 도중 비가 내리며 월드 챔피언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었다. 문제는 우승 직후 아일톤 세나가 신을 봤다는 인터뷰로 아일톤 세나는 신의 축복을 받은 드라이버라는 뉘앙스로 받아들여져 회의적인 반응이 형성됐다. 같은 팀에서 경쟁하던 알랭 프로스트는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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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정보도 공유하지 않을 정도로 틀어진 두 선수는 1989년 또 다시 일본 그랑프리를 통해 월드 챔피언을 가리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1988년과 반대로 1989년은 알랭 프로스트가 포인트에서 앞서 있었다. 아일톤 세나는 반드시 일본 그랑프리 우승을 해야만 월드 챔피언을 거머쥘 수 있었다. 

경기는 알랭 프로스트가 선두를 달리고 있었고 아일톤 세나가 뒤를 바짝 쫓고 있는 상황. 아일톤 세나는 감속 구간에서 기회를 잡고 추월을 시도했다. 하지만 둘은 충돌하게 되고 알랭 프로스트는 리타이어를 선택했다. 반면 아일톤 세나는 재정비한 후 주행을 이어갔다. 무서운 기세를 보이며 앞선 차들을 추월해 선두로 결승선을 통과했지만 FIA (Federation Internationale de l'Automobile)는 아일톤 세나를 실격 처리하며 알랭 프로스트가 월드 챔피언에 오르게 된다. 

아일톤 세나는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고 맥라렌도 아일톤 세나의 편을 들며 잘못된 결정이라고 항소했다. 같은 맥라렌 소속인 알랭 프로스트로서는 자존심이 구겨질 만도 한 상황이었다. 논란이 많았지만 어찌 됐든 알랭 프로스트가 월드 챔피언에 올랐다. 

1990년 일본 그랑프리는 또 한번 화제가 됐다. 아일톤 세나와 알랭 프로스트가 다시 한번 월드 챔피언을 놓고 경쟁해야 하는 승부처였기 때문이다. 

극적인 영화처럼 전 시즌과는 또 반대 상황이었다. 알랭 프로스트가 반드시 우승을 해야 하는 상황.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알랭 프로스트가 맥라렌에서 페라리로 팀을 옮겼다는 것뿐이었다. 기대와 다르게 경기는 싱겁게 끝나고 만다. 첫 번째 바퀴에서 알랭 프로스트와 아일톤 세나는 또 충돌하게 되고 두 선수 모두 리타이어, 아일톤 세나가 월드 챔피언이 됐다. 이후 알랭 프로스트는 페라리 차량에 의문을 제기했다가 해고되며 한 시즌을 쉬어야 했다. 공교롭게도 알랭 프로스트가 자리를 비운 시즌은 아일톤 세나의 성적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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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프로스트가 복귀한 팀은 윌리엄스 르노팀으로 전자장비를 장착한 머신을 앞세워 승승장구했다. 아일톤 세나는 액티브 컨트롤 서스펜션을 장착한 머신을 이길 방법이 없다며 한탄하다가 결국 윌리엄스 르노팀으로 옮기게 된다. 윌리엄스 르노팀은 알랭 프로스트와 계약 당시 알랭 프로스트가 아일톤 세나와는 절대 팀을 맺지 않겠다는 조항이 있었고 알랭 프로스트에게 2년 치 계약금을 넘겨주며 은퇴를 제안했다. 그렇게 알랭 프로스트는 은퇴하게 되고 아일톤 세나는 윌리엄스 르노팀의 최강 머신에 앉게 됐다. 

END 그리고 ING

아일톤 세나는 전자 장비가 장착된 윌리엄스 르노팀으로 옮기며 승리를 갈망했지만 FIA는 전자 장비 사용을 금지하는 결정을 내렸다. 아일톤 세나가 승리를 위해 윌리엄스 르노팀으로 이적한 의미가 퇴색된 것이다. 더구나 전자 장비를 제거한 윌리엄스 르노팀의 머신은 상당히 불안정했다. 스티어링 휠의 밸런스가 엉망진창이었고 반응이 둔했다가 빨라지는 등 제어 자체가 어려웠다. 다시 말해 언더 스티어 현상이 생겼다가 오버 스티어 현상이 생기는 등 종잡을 수 없는 차제 반응으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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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당시 급부상한 베네통 팀의 신예 드라이버 미하엘 슈마허 머신에 전자장비가 사용됐다는 등 정신적으로도 힘든 시간을 보냈다. 불안정한 아일톤 세나가 맞이한 1994년 산 마리노 그랑프리에서 또 다른 신예 드라이버 롤란트 라첸버거가 사고로 인해 삶을 마감한다. 이는 아일톤 세나뿐 아니라 다른 드라이버들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었고 경기를 포기하는 선수들도 나왔다. 

하지만 아일톤 세나는 포기하지 않았고 1994년 5월 1일 산 마리노 그랑프리에 뛰어들었다. 아일톤 세나는 선두를 유지하며 달리고 있었고 미하엘 슈마허는 2위 자리에서 아일톤 세나에게 압박을 가하며 기회를 노렸다. 그러던 중 6바퀴째 탐부렐로 코너에서 아일톤 세나의 머신은 코스를 이탈하며 벽을 들이 받고 만다. 아일톤 세나는 몸이 축 늘어진 채 움직이지 않았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그렇게 34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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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톤 세나는 생을 달리하며 그의 이야기는 끝났지만 그의 존재는 아직도 많은 곳에 남아있다. 1995년 그의 누나 비비안느 세나는 아일톤 세나 재단을 설립해 어린이를 돕고 있으며 라이벌이었던 알랭 프로스트도 이사로 함께 뜻을 이어가고 있다. 윌리엄스 르노팀은 매년 세나 재단 로고를 머신에 새기며 아일톤 세나를 기리고 있으며 맥라렌은 아일톤 세나를 의미하는 ‘세나’ 모델을 내놓은 바 있다. 

아일톤 세나의 사고는 FIA가 안전 규정 문제도 강화하게 만들었다. FIA는 시트 왓킨스에게 의뢰해 안전성을 크게 개선했다. 예컨대 콘크리트로 되어 있던 방호벽은 자갈과 모래, 타이어 등으로 교체돼 드라이버를 보호하게 됐으며 배기량 기준을 낮추고 슬릭 타이어 사용을 금지시켰다. 그로 인해 아일톤 세나 이후 지난2014년까지 단 한 명의 사망사고도 발생하지 않았다. ‘킬링로드’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사망사고를 냈던 F1 경기가 획기적으로 변한 것이다. 드라이버뿐 아니라 팬들에게도 안전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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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톤 세나는 생전에, 그리고 사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전설을 넘어 신화가 된 진정한 히어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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