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바겐 시로코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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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스바겐 시로코 R
  • 모토야편집부
  • 승인 2013.06.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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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스바겐 시로코는 골프와 뼈대 및 파워트레인을 나눴다. 그러나 외모는 확연히 다르다. 시승차는 2.0 TDI. 직렬 4기통 2.0ℓ 디젤 터보 직분사 엔진과 자동 6단 DSG를 얹고 앞바퀴를 굴린다. 무게중심이 낮고 하체가 단단해 골프보다 한층 자극적인 운전재미를 뽐낸다.


폭스바겐은 고생을 자청했다. 남들처럼 알파벳과 숫자 짝지으면 쉬울 텐데, 차종마다 일일이 고유의 이름을 붙인다. 투아렉은 아프리카의 부족, 이오스는 새벽의 여신, 페이톤은 태양의 신이 타고 다니는 마차에서 따온 이름이다. 어쩌면 ‘딱정벌레차’ 한 차종으로 단출하게 시작한 역사에서 비롯된 콤플렉스일는지 모른다. 당시엔 차 이름이 곧 회사이름이었다. 

차 이름에 대한 폭스바겐의 집착은 유별나다. 심지어 한 차종에 이름을 몇 개씩 바꿔 붙이기도 한다. 골프가 대표적이다. 판매시장에 따라 래빗(미국), 카리브(멕시코), 골(브라질) 등으로 팔렸다. 그런데 폭스바겐의 작명에도 나름 취향이 있다. 유독 바람 이름을 즐겨 쓴다. 골프는 멕시코만에 부는 바람을 의미한다. 파사트는 무역풍, 제타는 제트기류를 뜻한다. 



바람 이름을 쓴 폭스바겐 차가 또 있다. 시로코다. 아프리카에서 남유럽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의미한다. 이태리어다. 아프리카의 후끈한 열기로 바싹 달아오른 바람은, 지중해의 몰타와 시칠리아를 너울너울 넘어 이태리 반도로 불어 닥친다. 시로코를 처음 시승한 곳 역시 이태리의 수도 로마였다. 몇 달이 지나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시로코를 다시 만났다.

시로코는 폭스바겐에서 가장 ‘화끈한’ 차종이다. 단지 출력이 높고 0→시속 100㎞ 가속시간이 짧아서만은 아니다. ‘재미’로 뾰족이 수렴된 성격 때문이다. 시로코는 목적의식이 뚜렷한 차다. 미끈한 몸매를 위해 승하차 편의성이나 짐 공간에 얽매이지 않은 쿠페다. 또한, 어떤 폭스바겐보다 관절이 단단히 응어리진 차다. 보다 빠릿빠릿한 몸놀림을 위해서다. 


시로코는 여러모로 골프와 인연이 깊다. 무엇보다 격의 없는 동년배 사이다. 1974년 나란히 데뷔했다. 폭스바겐이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던 시기였다. 폭스바겐의 시작을 이끈 ‘딱정벌레차’는 후광만큼 그늘 또한 짙게 드리웠다. 판매가 하향곡선을 그리던 비틀 이후를 준비해야 했다. 공랭식 엔진을 꽁무니에 얹고 뒷바퀴 굴리는 RR 구조에서도 벗어나야했다. 

골프는 폭스바겐 역사에 중대한 전환점이 되는 차종이었다. 뒷바퀴에서 앞바퀴 굴림, 공랭식에서 수랭식으로 기존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꿨다. 디자인도 전연 딴판이었다. 그런데 골프 한 차종에 의지할 수는 없었다. 폭스바겐은 스포티한 성격의 쿠페도 함께 내놓기로 결심했다. 외주생산으로 팔던 카만 기아 쿠페의 뒤를 이을 후속이기도 했다. 바로 시로코였다. 


시로코의 아버지뻘인 카만 기아는 혼혈이었다. 국적과 정체성이 뒤섞였다. 폭스바겐 비틀의 플랫폼, 이태리 카로체리아 기아의 디자인, 독일의 코치빌더 카만의 손맛 등 우성인자만 추렸다. 포르쉐 356이나 911과 더불어, 카만 기아는 비틀에 뿌리를 둔 또 하나의 스포츠카였다. 카만 기아는 1955~1974년까지 타입 14와 34를 합쳐 50만 대 가까이 생산되었다. 

시로코와 카만 기아 사이엔 유전적 연결고리가 없었다. 비틀의 그림자를 지워야했던 까닭이다. 시로코와 골프는 앞 엔진, 앞바퀴굴림 구성의 A1 플랫폼을 나눠썼다. 디자인은 이태리의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맡았다. 둘의 역할은 과거처럼 뚜렷이 나뉘었다. 골프는 현실과 이성을 만족시켰다. 시로코는 환상과 감성을 자극했다. 시로코 역시 카만이 생산을 맡았다. 

둘 중 시로코가 선발대였다. 골프보다 반년 앞서 선보였다. 대량생산할 골프에서 혹여 불거질 문제를 미리 잡아내기 위해서였다. 1세대 시로코는 충격 그 자체였다. 비틀로 뇌리 깊숙이 박힌 폭스바겐의 이미지를 보란 듯이 뒤엎었다. 둥글둥글했던 몸매는 반듯반듯 접었다. 가름했던 얼굴은 네모지게 다듬고 수직으로 곧추세웠다. 기계적인 냄새가 물씬했다. 


시로코는 골프와 전혀 달랐다. 같은 뼈대를 숨겼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골프는 겸손하고 아담했다. 반면 시로코는 당당하고 자신감 넘쳤다. 시로코의 엔진은 직렬 4기통 자연흡기 가솔린으로, 1.1~1.7ℓ까지 5종류로 나뉘었다. 변속기는 4단 수동으로 시작해 훗날 5단 수동과 3단 자동을 더했다. 1세대 시로코는 1982년까지 50만4천153대 생산되었다.  

1981년, 시로코는 2세대로 거듭났다. 뼈대는 고스란히 썼다. 그러나 많은 부분을 손질했다. 네눈박이 눈매는 여전했다. 하지만 동그란 테두리를 네모 낳게 다듬어 두 개씩 묶었다. 휠베이스는 그대로 두되 차체 길이와 너비를 늘리고 지붕을 납작하게 다졌다. 엔진 역시 직렬 4기통을 유지했지만 배기량을 1.3~1.8ℓ로 키웠다. 최고출력은 139마력까지 치솟았다. 


2세대 시로코는 1992년까지 29만1천497대 생산되었다. 실질적 수명은 1988년 끝났다. 코라도가 바통을 이어받았기 때문. 외모나 성격 모두 시로코의 후속이었다. 하지만 신분상승을 위해 새 이름을 붙였다. 코라도가 1995년 단종되면서, 폭스바겐 ‘섹시 쿠페’의 명맥은 잠시 끊겼다. 그리고 2008년, 34년 만에 시로코가 화려하게 부활했다.  

폭스바겐의 상징적·실질적 수장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원가절감을 위해 뼈대와 부품을 나눠 써야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이 때문에 차종간 차별이 무뎌져도 안 된다고 믿었다. 그는 감성에 주목했다. 골프처럼 손 뻗어 닿을 가격이되 욕망을 한껏 자극하는 스포츠카. 골프와 메커니즘 대부분을 나눴지만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차. 그게 시로코였다. 



비틀과 카만 기아, 1세대 골프와 시로코 시절 눈을 의심케 만들었던 마법은 여전히 유효했다. 공통분모를 지녔지만, 신형 시로코는 ‘자타공인 모범생’ 골프와 전연 딴판이다. 가파르게 기운 A필러와 1.8m 길이의 지붕이 더없이 날렵하고, 가늘게 뜬 눈매는 비장하며, 거우듬하게 부푼 힙은 뇌쇄적이다. 매력적이어서 미워할 수 없는 한량 분위기다. 

특히 꼬마차 천국, 이태리에서 시로코의 존재감은 확연히 두드러졌다. 람보르기니, 페라리의 본고장이라지만 정작 수퍼카는 서울보다 드물다. 설령 누가 떠맡긴들 ‘혼돈의 도시’ 로마에선 달갑지 않다. 로마에 어울릴 스포츠카의 상한선이 딱 시로코다. 나만의 생각은 아닌지, 호텔 앞에서 만난 이태리 청년은 “내 드림카”라며 입이 떡 벌어져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폭스바겐은 시로코를 ‘스포티 쿠페’라고 에둘러 부르지 않는다. 당당히 ‘스포츠카’라고 정의한다. 괜한 허풍은 아니다. 외모를 유심히 살피면 깨닫게 된다. 겉모습을 아우른 껍데기가 전혀 새롭다. 안개등이나 사이드 미러를 빼면 나눠 쓰는 부품을 찾기 어렵다. 결코 강조와 왜곡으로 점철된 디자인 꼼수가 아니다. 골프를 말끔히 지운 백짓장에 새로 그린 차다. 


시로코는 타는 순간부터 낯설다. 기다란 도어를 날개 펼치듯 열고 A필러를 피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 수고가 뒤따른다. 운전석에 몸을 포개면 낯익은 풍경이 펼쳐진다. 계기판과 운전대, 공조장치, 센터페시아가 영락없는 골프다. 현실적 가격에 묶기 위한 절충안인 셈이다. 하지만 납작한 지붕과 유리창이 주는 폐쇄감 때문에, 괜스레 서늘한 긴장이 밀려든다. 

뒷좌석은 밖에서 보고 지레짐작했던 것보다 넓다. 어깨와 무릎 공간 모두 장거리 여정이 두렵지 않을 수준이다. 다만, 머리 공간은 빠듯하다. 아래보다 윗변이 좁은 몸매와, 꽁무니를 향해 완만히 기운 지붕 때문이다. 그건 차급과 가격에 상관없이 늘씬한 스타일 살린 쿠페의 숙명이다. 4억5천만 원씩이나 하는 페라리 FF 역시 뒷좌석이 ‘오붓’하긴 마찬가지다. 

서울에서 재회한 시승차는 시로코 2.0 TDI. 파워트레인이 골프 GTD와 고스란히 겹친다. 직렬 4기통 2.0L 디젤 터보 직분사(TDI) 엔진과 자동 6단 듀얼 클러치(DSG) 변속기를 짝지었다. 170마력을 4200rpm, 35.7㎏·m를 1750~2500rpm에서 낸다. 시로코 2.0 TDI는 0→시속 100㎞ 가속을 8.1초에 끊고, 시속 220㎞까지 달린다. 모든 수치는 GTD와 똑같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쿠페인 만큼 뒷문이 없다. 또한, 시로코의 길이와 너비가 각각 50, 35㎜ 길고 넓으며 높이는 85㎜ 낮다. 좌우 바퀴 사이의 거리도 앞은 28, 뒤는 61㎜ 더 넓다. 무게는 시로코가 53㎏ 더 가볍지만 연비는 15.4㎞/L로 GTD의 17.8㎞/L보다 뒤쳐진다. 하지만 시로코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127g/㎞로 152g/㎞인 GTD보다 적다. 묘한 차이다. 


차분하게 숨통을 트는 엔진이나 잔잔히 숨죽인 아이들링은 GTD와 판박이다. 그러나 몸을 제법 압박하는 스포츠 시트와 얄따랗게 펼쳐진 창밖 풍경 때문에 사뭇 비장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피에히가 누누이 강조한 감성적 차별인 셈이다. 정체를 뚫고 도심을 가로질렀다. 톡톡 튀는 컬러와 늘씬한 디자인 때문에 사방에서 호기심 어린 시선이 쏟아졌다. 

골프 GTD처럼, 시로코 역시 체감하는 출력과 가속이 제원을 넘어선다. 더 이상 빠를 필요가 있을까 싶을 만큼, 뜨겁게 응어리진 파워를 인정사정없이 불사른다. 사운드는 그야말로 미스터리다.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4기통 디젤 엔진이 숨찬 비명 대신 구성진 목청으로 가슴을 적신다. 그러나 드라마틱한 사운드는 실내에만 머문다. 머플러는 침묵을 지켰다. 

골프를 통해 충분한 검증을 거친 DSG의 성능은 흠 잡을 구석이 없다. 빠르되 절도 있게 기어를 바꿔 한 줌의 힘도 흘리지 않고 바퀴로 전한다. 또한, 가속과 감속, 고회전을 유지해야하는 코너링을 기가 막히게 눈치 채고서 변속의 템포를 쥐고 흔든다. 특히 감속 때 팍팍 기어를 내려 무는 속도와 타이밍은 기존 자동변속기가 넘볼 수 없는 DSG만의 매력이다. 


그런데 골프와 차별화되는 시로코의 ‘성깔’은, 엔진이 아닌 몸놀림에서 비롯된다. 외모에 차별을 둔 진짜 이유 또한 무게중심을 낮추기 위해서였다. 폭스바겐은 말한다. 꽁무니 해치도어의 힌지를 몇 ㎜만 낮춰도 차의 동적특성이 확연히 달라진다고. 그건 골프에도 쿠페가 있는데 굳이 시로코를 개발한 이유이기도 했다. 

서스펜션 구성은 골프와 같다. 앞은 맥퍼슨 스트럿, 뒤는 멀티링크다. 하지만 스프링과 댐퍼, 스테빌라이저의 강성을 키웠다. 뒤 서스펜션은 스티어링 너클 등을 알루미늄 소재로 바꿔 무게를 덜었다. 나아가 골프와 다른 앞뒤 무게배분, 보다 낮은 무게중심, 더욱 넓은 트레드에 맞춰 정교하게 손질했다. 나아가 시로코는 스포츠 서스펜션과 19인치 타이어로 무장했다. 옵션으로 승차감을 쥐락펴락할 ‘다이내믹 섀시 컨트롤(DCC)’도 달 수 있는데, 국내 수입 모델엔 빠졌다.  

시로코도 골프 GTI나 GTD처럼 앞 차축에 전자식 차동제한장치(XDS)를 얹는다. ESP에 포함된 전자식 차동제한장치(EDL)의 기능을 확장한 개념이다. 언더스티어를 잡기 위해 고안되었다. EDL 센서는 좌우 휠의 속도를 감시한다. 둘 사이에 차이가 나면 더 많이 도는 쪽을 브레이크로 다독인다. 한쪽 바퀴만 미끄러운 노면에 걸쳐 있을 때 약발이 탁월하다. 

XDS는 한층 영리하다. 휠 스피드뿐 아니라 스티어링 휠 꺾는 속도와 각도까지 감지한다. 센서들이 언더스티어를 감지하면 코너 안쪽 앞바퀴에 제동을 걸어 자세를 바로잡는다. EDL과 달리 가속에 찬물을 끼얹지 않는 최소한의 제동으로 보다 예리한 궤적을 그릴 수 있게 돕는다. 상황을 예측해 미리 작동하기 때문에 XDS의 존재를 의식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있고 없고의 차이는 확연하다. 코너링이 한층 부드럽고 매끄럽다. 운전 실력이 부쩍 향상된 것 같은 만족감을 준다.


서울 근교의 굽잇길에서 시로코의 진가가 빛났다. 배배꼬인 코너를 휘몰이장단으로 헤집었다. 낯선 코너에서 이따금씩 스티어링 휠 조작이 격해져도 차체는 흔들림 없이 차분했다. 날렵한 생김새에 걸맞게 움직임 역시 민첩했다. 꽁무니도 매끈하게 따라 붙었다. 코너 바깥쪽 뒷바퀴를 아스팔트에 사정없이 짓이기며 코너를 똑 소리 나게 먹어 치웠다. 

시로코 부활과 더불어 폭스바겐은 고성능 차 전략에 가속을 붙이고 있다. 325마력을 내는 시로코 GT24 경주차를 뉘르부르크링 24시간 내구레이스에 투입했다. 시로코 GT24를 양산형으로 다듬은 시로코 R도 선보였다. 2.0L TSI 엔진을 정성껏 갈고 닦아 출력을 265마력까지 끌어올렸다. 동시에 블루모션 기술로 군살을 뺀 1.4L TSI 122마력 엔진도 얹는다.

한때 폭스바겐이 코라도를 부활시킬 거란 소문이 돌았다. 포르쉐와 함께 4기통 엔진을 미드십에 얹는 소형 스포츠카를 내놓을 거란 추측도 무성하다. 그러나 막연한 미래의 일이다. 반면 시로코는 생생한 실체다. 지금 소유할 수 있는 가장 섹시한 폭스바겐이다. 다행히 국내엔 골프 GTI가 5도어 해치백으로만 나온다. 폭스바겐코리아가 고민 하나를 덜어준 셈이다.

글 김기범|사진 최진호, 폭스바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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