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소형차의 흥망성쇠 -1970년대, 소형차의 성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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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소형차의 흥망성쇠 -1970년대, 소형차의 성장기-
  • 모토야
  • 승인 2022.05.26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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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형차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동차의 보급과 자동차 산업의 육성에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해 왔다. 대한민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은 물론, 자동차의 역사가 시작된 유럽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유럽에서 자동차는 마차와 마찬가지로, 귀족이나 신사 등과 같은 유산계급(有産階級)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전간기에 만들어진 폭스바겐의 카데프-바겐(KDF-Wagen)을 시작으로, 초대 피아트 500, 로버 미니 등의 소형차들 덕분에 유럽 전역에 자동차가 보급될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도 소형차는 자동차 보급의 첨병으로 활약했다. 소형차는 상대적으로 높은 생산성과 저렴한 가격으로 대한민국의 마이카 시대를 연 중추였다. 하지만 2010년대 후반에 현대자동차의 엑센트, 기아 프라이드, 쉐보레 아베오 등이 줄줄이 단종, 혹은 국내 판매를 완전히 중단되었다. 이로써 국내 시장서 대한민국의 토종 소형 승용차는 완전히 멸종하고 만 것이다. 대한민국 소형차 역사에 이름을 남겼던 차들을 시대 순으로 되짚어 본다.

기아산업 브리사(1973)
기아산업(現 기아)은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상용차를 주력으로 하고 있었다. 기아산업이 처음으로 생산한 차량은 일본 토요공업(現 마쓰다주식회사)에서 개발한 소형 삼륜 화물차인 K-360이었고 최초로 생산하기 시작한 사륜차 또한 중형 화물차인 복사(Boxer)였다. 하지만 기아산업은 1970년을 전후하여 승용차 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당시 승용차 시장은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상용차 대비 높은 대당 이익을 낼 수 있었기에 회사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승용차 모델이 필요했다. 

또한 1970년대 당시는 1차 석유파동으로 인해 이에 대응할 저렴하고 연비가 우수한 차량을 확보하기 위한 정부 주도의 국민차 생산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 여기서 내건 조건은 1972년 말까지 주력 차종의 100% 국산화를 달성하는 것이었으나, 자동차 산업의 기술적인 토대가 한참 부족했던 당시로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이에 상공부는 72년 말까지의 국산화율을 67%로 하향 조정하는 한 편, 100% 국산화는 단계적으로 해 나가기로 방침을 변경했다. 그리고 이를 도약의 기회로 여겼던 기아산업이 토요공업의 소형 승용차 파밀리아(Familia, 323)의 2세대 모델을 기반으로 하는 자체적인 소형 승용차를 개발하기 시작했는데, 이 차가 바로 브리사(Brisa)다.

기아산업은 브리사를 개발하면서 이전까지와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그동안 기아산업은 토요공업의 차량을 단순히 SKD(Semi Knock Down반조립 생산) 내지는 CKD(Complete Knock Down, 완전조립생산) 방식으로 생산하는 것을 넘어서 첫 승용차를 독자모델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67%의 국산화율을 달성하여 국민차 사업을 따내고자 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기아산업은 이를 위해 엔진을 시작으로 전면적인 국산화에 돌입했다. 토요공업으로부터 파밀리아에 사용되는 레나 엔진의 생산라인을 가져와 국내에서 생산하는 한 편, 파밀리아의 디자인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독자적인 디자인을 적용했다. 이러한 각고의 노력을 통해 1974년에 국산화율 63.01%를 달성하기에 이른다.

기아산업은 1973년, 브리사의 픽업트럭 모델을 먼저 선보였다. 기술적 완성도를 시험함으로써 새로 출시할 브리사 승용 모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74년, 기아는 당대 양산차 중 가장 높은 국산화율을 달성한 브리사 승용 모델을 출시, 국내 자동차 보급의 선두주자로 나서게 되었다. 브리사는 출시되자마자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현대자동차 포니의 등장 직전인 1975년도까지 한 해에 1만 대 이상 팔려나가며, 51.2%에 달하는 승용차 시장 점유율을 차지했다.

하지만 1975년, 대한민국 최초의 독자개발 승용차인 포니의 등장으로 인해 그 기세가 한 풀 꺾였다가 1980년대 신군부 세력의 자동차공업 통합조치에 의해 강제로 생산이 중단되고 만다. 기아산업의 브리사는 비록 순수한 독자개발 모델은 아니었지만, 당시 정부의 자동차공업 육성 기조와 맞물려 자동차 보급의 선봉장이 된 자동차로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현대자동차 포니(1975)
사업 초기 미국 포드자동차의 양산차를 라이센스 생산하는 것으로 사업을 영위하고 있었던 현대자동차는 1970년대 들어, 독자모델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현대자동차는 포드 20M과 코티나를 라이센스 생산하는 과정에서 포드의 일방적인 요구에 끌려다니기 바빴다.

이 때문에 현대자동차를 이끌고 있었던 故 정주영 회장은 이러한 체제에서 속히 벗어나고자 했다. 제휴사의 요구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니기만 해서는 국내 시장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제휴사의 태도에 따라 사업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 바로 '신진자동차'였다. 1970년, 토요타자동차의 일방적인 제휴관계 청산으로 인해 토요타의 라이센스 생산 체제에 전적으로 의존했던 신진자동차가 순식간에 몰락하는 것을 눈 앞에서 지켜보게 된 것이다. 

이에 현대자동차는 '생존'을 위해, 그리고 1970년대 진행되고 있었던 국민차 사업 및 부품국산화 정책에 따르기 위해 독자모델 개발을 서두르게 되었다. 하지만 독자모델 개발에 대한 사내에서의 우려도 만만치 않았다. 당시 다른 자동차 제조사에 비해 규모도 영세한 데다, 원천기술이 없다시피했던 현대자동차가 독자모델을 개발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 회장은 완고하게 밀어붙였다. 이에 현대자동차는 새로운 제휴사를 찾아 나섰고, 이 때 손을 내밀어 준 곳이 바로 미쓰비시자동차였다. 차량의 스타일링은 자체적으로 진행하려고 했지만 당시의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해외의 전문업체에 맡기기로 했는데, 이 때 이 프로젝트를 맡아 준 인물이 바로 '거장'으로 칭송받는 조르제토 주지아로(Giorgetto Giugiaro)였다.

이렇게 완성된 현대자동차의 첫 독자모델 포니(Pony)는 1974년 토리노 모터쇼에 출품되었고, 1975년도부터 국내 시판에 돌입했다. 당시 잘 나가고 있었던 미쓰비시의 기술력을 토대로 유럽식 스타일링을 입은 포니는 출시 첫 해부터 1만대를 넘는 판매고를 올리며 기아산업 브리사에 이어, 국내 승용차 시장의 새로운 별로 떠올랐다. 포니는 당대 국산 승용차 중 뛰어난 연비와 우수한 성능, 접근성 있는 가격으로 브리사의 기세를 크게 꺾어 놓은 것은 물론, 국내 승용차 시장의 성장과 자동차 보급에도 크게 기여했다. 또한 포니는 국산 승용차 중 첫 번째로 해외 시장에 수출된 차량이었는데, 이는 제휴사의 차량을 라이센스 생산하는 모델이 아닌, 독자개발 모델이기에 가능했던 것이기도 하다. 현대자동차 포니는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의 중흥에 이바지한 역사적인 국산차로 남았다.

새한자동차 제미니(1977)
1970년대 토요타의 일방적인 제휴관계 청산으로 인해 벼랑 끝까지 몰린 신진자동차는 서둘러 새로운 제휴사를 물색해야 했다. 그리하여 1972년, 미국 제너럴 모터스(이하 GM)과 5:5로 자본을 출자해 '제너럴모터스코리아자동차(지엠코리아, 이하 GMK)'를 설립하며 활로를 찼았나 싶었지만 GM에서 '시보레 1700'과 같이, 당시 국내실정에 맞지 않는 모델들만 골라다가 밀어넣는 바람에 승용차 시장의 주도권을 현대자동차에 완전히 빼앗기고 주저앉게 되어버린다. 이 과정에서 신진자동차는 1976년 부도가 났고, 산업은행이 구 신진자동차 측의 지분을 넘겨받으며 탄생한 회사가 새한자동차다.

새한자동차는 출범 초기에는 舊 GMK가 생산했던 카미나(시보레 1700의 후속차종), 캬라반(카미나의 스테이션 왜건형 모델) 등을 생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차종 역시 시보레 1700과 마찬가지로, GM측에서 일방적으로 생산을 요구했던 차종이었으며, 역시나 국내 시장 상황에 맞지 않아 경쟁사들에게 밀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기아산업 브리사와 현대자동차 포니 등의 소형 승용차가 인기를 끌기 시작하자 내놓은 차가 바로 제미니(Gemini)다. 새한 제미니는 GM의 월드카(World Car) 개념으로 개발된 후륜구동 소형 승용차 오펠 카데트(Opel Kadett) C형을 일본 이스즈자동차(Isuzu Motor)에서 손 본 모델을 들여 온 것이었다.

새한 제미니는 이스즈 제미니에 비해 여러 부분이 변경되었다. 화려한 디자인을 선호하는 국내 시장의 성향에 맞춰 라디에이터 그릴, 윈도우 몰딩에 크롬도금을 적용하였으며, 당시의 소형 승용차로서는 흔하지 않았던 바디컬러 사이드 미러를 적용하는 등, 스타일링 면에서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5-볼트 휠 허브를 적용한 것도 특징이며, 고강성 차체구조와 당시로서는 선진적이었던 충격흡수 기능이 적용된 스티어링 시스템 등이 적용되어 있었다. 이에 새한자동차는 '안전'을 키워드로 제미니의 마케팅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새한 제미니는 여러모로 한계가 명확했다. 일단 출시 시기가 너무 늦어버린 점이 발목을 잡았다. 이미 기아 브리사와 현대 포니가 시장을 선점한 상황에서 새한 제미니가 파고 들어갈 틈이 없었던 데다, 시보레 1700과 카미나에 사용했었던 파워트레인을 배기량만 1.5리터로 줄인 채 그대로 사용한 탓에, 앞선 두 차종에 이어 '연비가 나쁜 차'라는 오명을 벗지 못했고, 실제로도 연비가 경쟁차종에 비해 좋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이 파워트레인은 카미나에 탑재되었을 당시에도 차체와 부조화를 이루었으며, 제미니에서도 마찬가지로 부조화를 일으켰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여러 이유로 새한 제미니는 시장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후일 이를 대폭 개선한 '맵시', 그리고 대우자동차 시절 만들어진 '맵시-나'로 개선을 거치면서 시장에서 다시 주목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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