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했던차]폭스바겐 비틀
상태바
[특별했던차]폭스바겐 비틀
  • 박병하
  • 승인 2023.12.08 19: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생김새만 가지고도 누구나 알아보는 차가 있다. 바로 "딱정벌레"라는 의미를 지닌 차, 비틀(Beetle)이다. 하지만 이 이름은 어디까지나 이 차의 '별명'이다. 공식적인 이름은 따로 있다. 바로 '폭스바겐 튀프 아인스(Volkswagen Typ 1)'. 직역하면 '국민차 1형'이라는 실로 수수한 이름이다. 이 차는 딱정벌레라는 귀여운 애칭과 달리, 어두운 역사를 가지고 있기도 하며,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에게 있어서는 애증의 대상이기도 하다. 국민차 1형 폭스바겐 비틀의 역사를 되짚어 본다.

나치의 복지 정책으로 시작된 국민차 프로젝트
제국이 성립된 이후의 독일은 제 1차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실로 막강한 국가였다. 다른 열강에 비해 극히 적은 식민지만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제1강국인 영국의 바로 다음가는 경제력과 높은 교육수준, 그리고 뛰어난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918년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이 성립된 시기의 독일은 모든 것이 무너져 있었다. 베르사유 체제로 인해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게 된 독일의 경제는 완전히 무너졌고, 13%에 달하는 영토와 수많은 이권, 그리고 얼마 있지도 않았던 식민지까지 빼앗겼다. 군대가 해산하고 독일의 자랑인 기술개발도 막혔다. 

이러한 상황에 독일 국민들은 무기력해져 있었고 대공황, 살인적인 초인플레이션, 전쟁 배상금을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내기 위한 프랑스의 루르 지역 강제 점령 등, 독일은 그야말로 협상국(특히 프랑스)들에 의해 나라가 영혼까지 털리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여기에 1929년 불어닥친 대공황의 영향으로 인해 유럽 전체에 금융위기가 일어났고, 전쟁 배상금 문제로 인해 외국의 자본에 크게 기대고 있었던 독일의 경제는 말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졌다. 여기에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성립으로 사회주의 세력이 대두하는 등, 독일은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 때문에 독일 국민들은 이렇게 혼란하고 불안한 상황을 정리해 줄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고 있었다. 여기에 사회주의의 확산을 공포로 여겼던 독일의 자본가와 중산층도 이러한 경향에 동조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독일에서는 '독일 민족의 부흥'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극우민족주의적 성향의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 즉 나치(Nazi)당이 집권하게 된다.

나치당의 아돌프 히틀러는 대공황의 여파에서 벗어나 무너진 독일의 경제를 재건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규모 공공사업을 일으키고 국채가 아닌, 비공식적인 메포 어음 및 외파 어음(Mefo-Wechsel, Oeffa-Wechsel)을 발행해 인플레이션 부담을 회피하면서 돈을 찍어냈으며, 기업과의 정경유착과 노동조합 통폐합 조치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나치 독일의 부채는 바이마르공화국에 비해 눈덩이처럼 불어났지만, 실업률이 감소하고 국가에 돈이 돌기 시작하면서 독일 경제는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살아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성장의 이면에는 의외로 (어디까지나 당시 기준으로)노동자들에게 충분한 휴식과 오락거리를 보장하려 했다는 것도 일부 작용했다. 독일이 산업화되는 과정에서 살인적인 노동강도에 시달렸던 노동자들에게 적절한 복지를 제공하려 했던 것이다. 나치 독일 정부는 1933년, 기존 노동조합들을 통폐합한 어용조직인 독일노동전선(DAF)이라는 단체에 'KdF(카데프)'라는 이름의 하위 조직을 신설했다. KdF는 독일어로 "기쁨을 통한 힘(Kraft durch Freude)을 줄인 것이다.

이 조직은 "오락의 기쁨을 통해 노동의 힘을 회복시킨다"는 것을 목적으로 세워져 운영되었다. 주로 맡은 업무는 노동자들의 여가선용을 위한 프로그램들이었다. KdF는 극장을 비롯한 독일 국내의 오락/레저 시설을 보유하는 것은 물론, 크루즈 여객선까지 보유해 이를 활용한 패키지 여행 상품을 제공했고, 독일 국민들에게 체조, 수영 등, 다양한 스포츠 활동을 지원했다. 이 외에도 바느질, 체스 등 여가 선용을 위한 프로그램들을 운영하는 한 편,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평생교육 프로그램도 장려했다. 물론 이 조직의 진짜 목적은 독일 노동자 계층에 '당근'을 주면서 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얻는 한 편으로 순수한 노동계급끼리 뭉친 노동조합의 등장을 사전에 차단코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복지정책들 가운데에 '국민 자동차의 보급'까지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폭스바겐 타입 1, 비틀의 시작이다.

오토바이 값으로 자동차를 만들어 달라고?
독일은 바이마르공화국 시절부터 곳곳에서 짓고 있었던 고속도로(아우토반)들을 연결하는 사업을 크게 일으키면서 많은 고용을 창출했고, 자동차로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그런데 당시 자동차는 부유층에 가까운 사람들만 구입할 수 있는 값비싼 물건이었다. 당시 상대적인 자동차 선진국이었던 영국이나 프랑스는 이미 150만대에 달하는 자동차들이 도로를 달리고 있었던 반면, 독일은 50만대 수준에 불과했다. 나치당의 집권 당시 공약들 가운데에는 독일 노동자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자동차를 보급하겠다는 내용이 있었고, 이 실무를 KdF가 맡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폭스바겐 비틀이 가지게 된 첫 번째 이름은 '카데프바겐(KdF-Wagen)'이었다.

KdF는 제국 자동차 산업협회(Reichsverband der Automobilindustrie, 이하 RDA, 現 VDA)에 독일 국민에게 보급할 수 있는 '국민차(Volkswagen)' 프로젝트를 진행시켰다. 그리고 RDA는 당시 유명한 설계자였던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를 불러들여 실질적인 개발을 지시했다. 이 당시에 RDA가 포르쉐에게 요구한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1. 운전자 포함해 성인 2명과 어린이 3명이 승차할 수 있을 것.
2. 100km/h의 속도로 고속도로를 주행할 수 있을 것.
3. 가격은 1,000라이히스마르크(Reichsmark, 제국마르크, RM) 미만일 것.

다른 조건들은 차치하더라도, '가격'만큼은 당시로서는 현실적으로 달성하기에 무리가 따른다고 보았다. 저 가격은 지금의 유로화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4,800유로(한화 약 677만원) 정도로, 오토바이 가격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높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의 자동차는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원시적이고, 구조도 간단했기 때문에 지금과 완전히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당시 기준으로도 파격적으로 저렴한 가격임에는 분명했다.

게다가 독일에서는 저 가격에 맞출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아무리 탈탈 털렸다곤 하지만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화학'분야 만큼은 크게 앞서 있는 국가였고, 그 덕분에 수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각종 천연 원자재를 독일의 화학기술로 만든 인공 원자재로 대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고무가 있다. 독일은 1926년에 스틸렌-부타디엔 고무(Styrene-butadiene rubber, SBR)라고 하는 합성고무를 최초로 개발한 국가이며, 합성피혁 관련 기술, 플라스틱 관련 기술 등이 발달하여 기존에 있었던 기술을 활용하면서 구조를 최대한 단순하게 가져간다면 제조원가를 절감할 여지는 충분했다.

도둑질한 설계, 군화발에 짓밟힌 권리
하지만 위의 조건을 두루 만족하는 설계를 해내는 일은 별개의 문제였다. 포르쉐는 그전까지 이런 형태의 자동차를 설계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우토우니온에 몸을 담았던 시절에 경주용 자동차를 설계한 경험이 있고, 그 전에는 직렬형 하이브리드(!) 자동차 같은 것을 만들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다임러(Daimler)계열의 자동차 제조사에 몸담았던 시절부터 그의 설계는 항상 비싸고 특이한 것을 추구하는 '괴짜' 취급을 종종 받았다.

하지만 포르쉐는 히틀러의 주선으로 만나게 된 한스 루트빈카(Hans Ledwinka)와의 교류를 통해 새로 개발할 국민차의 설계 개념에 대한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한스 루트빈카는 지금도 존속하고 있는 체코의 자동차 제조사인 타트라(Tatra)의 기술자였는데, 당시 타트라의 승용차는 독일 상류층에서도 굉장히 인기가 좋았다. 타트라는 국내에도 어느 정도 알려지기 시작한 스코다(Škoda Auto)와 더불어, 체코 자동차 산업의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는 기업이다. 특히 19세기 말~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타트라는 공랭식 엔진을 사용하는 후방엔진 후륜구동(RR) 승용차로 유명했다.

그리고 포르쉐는 루트빈카와의 교류, 그리고 훗날 현대적 충돌안전 개념의 기본인 '크럼플 존(Crumple Zone)' 개념을 확립한 설계자 벨라 바레니(Béla Barényi)를 통해 타트라가 새로 개발하고 있던 승용차, T97의 설계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듣게 된다. 포르쉐는 타트라의 설계가 굉장히 효율적이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엔진을 후미에 얹어 전방엔진 후륜구동 자동차의 기나긴 구동축을 제거하는 한 편으로, 실내 공간도 크게 확보할 수 있었으며, 전방에 넉넉한 트렁크가 있어 활용하기에 좋았다. 여기에 작지만 충실한 동력을 발휘하는 효율적인 수평대향 4기통엔진을 채택해 성능도 챙기면서 단순한 구조로 설계되어 대량생산에도 용이해 제조원가를 상당히 아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시간이 없었던 포르쉐는 타트라 T97의 설계개념을 속속들이 파악해 두었다. 그리고는 독일로 돌아가 타트라 T97의 설계개념을 되짚으며 카데프바겐의 설계를 시작했다. 그가 타트라로부터 설계도를 빼돌리거나 한 정황은 전혀 포착되지 않았지만, 뛰어난 공학자인 그가 그 단순명료한 구조를 파악하고 그것을 자신의 설계로 전환하는 작업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렇게 타트라로부터 '훔쳐 온 설계'를 바탕으로 포르쉐는 1937년부터 카데프바겐의 설계를 시작했다. 그리고 1938년, 최초의 국민차 1형 '카데프바겐'이 등장하게 된다.

한편 카데프바겐보다 1년 앞서 T97을 출시한 타트라는 독일에서 만들어진 카데프바겐이 자사의 T97을 통째로 베껴 온 차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물론 직접 설계도를 훔친 것은 아니었지만 거의 전적으로 자사의 설계 개념을 무단 도용한 결과물이라는 것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이에 격분한 타트라는 포르쉐와 폭스바겐을 상대로 특허 침해와 관련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그리고 포르쉐는 기꺼이 손해배상에 동의했다. 그러나 히틀러가 손해배상 건을 대신 해결해 주겠다며 일방적으로 소송을 취소했다. 그리고 1938년, 뮌헨 협정으로 타트라 본사가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주데텐란트(Sudetenland)'지역이 나치 손에 넘어가자 '없던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독일이 체코 전역을 점령해버리면서 체코의 각종 제조기업들은 나치 독일의 조병창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원본에 해당하는 타트라 T97은 생산이 중단되고 말았다.

마이카의 꿈을 이용한 나치 독일의 대국민기만
카데프바겐은 KdF에서 제공하는 특별 구매 프로그램을 통해 일반에 판매되었다. 카데프바겐은 '국민차 저축'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형태로 판매되었다. 독일인 노동자가 KdF나 DAF에 국민차 저축 프로그램을 신청하면 DAF에서 발급하는 저축 책자를 제공받는다. 여기에 장당 5RM인 특별 우표를 구매하고 이를 한장 한장 적립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총 198장의 우표를 모아 990RM의 돈을 적립하면 그때 차를 인도한다. DAF는 일주일에 한 번씩 우표를 구매할 것을 장려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우표를 구매하면 목표금액 달성까지 약 4년이 걸리는데, 이렇게 한 이유는 볼프스부르크에 세워질 예정이었던 공장이 아직도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을 벌기 위한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당시 독일 노동자들의 수입으로는 이 일주일에 우표 한 장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당시 독일 중산층의 평균 월 소득이 300~360RM였던 반면, 서민 노동자 계층의 평균 월 소득은 중산층의 1/3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에 여전히 자동차를 구매하는 것은 부담이 가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카데프바겐 프로그램을 신청한 이들 중에는 노동자들도 굉장히 많았지만 실질적으로는 중산층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독일인들은 상류층이나 즐기던 '이동의 자유'와 '마이카'의 꿈을 안고 이 저축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1938년 8월부터 접수를 받기 시작한 지 반년도 되지 않은 동년 12월, 청약자 수는 17만명에 육박했고, 예금액은 2,200만 RM에 달했다. 전쟁이 발발한 시점인 1939년 12월에는 누적 27만명 이상의 독일인들이 이 프로그램을 신청했고, 1억 3,600만 RM에 달했다. 심지어 전쟁이 끝날 때 즈음인 1944년에는 청약자 수가 무려 33만명에 달했고, 예금액은 약 2억 8,900만 RM에 달했다. 그리고 이 자금은 간접적으로 나치 독일의 전쟁자금으로 쓰이게 되었다.

하지만 카데프 프로그램을 신청한 독일국민들은 전쟁이 끝날때까지 자신의 차를 인도 받을 수 없었다. 심지어 볼프스부르크에 세워진 공장조차 민간에 공급할 차는 제쳐두고 카데프바겐을 기반으로 한 나치 독일군의 기동 차량인 퀴벨바겐(Kübelwagen, VW Typ 82)과 수륙양용차 쉬빔바겐(Schwimmwagen, VW Typ 166)을 생산했다. 퀴벨바겐은 전쟁이 끝날때까지 약 51,000대, 쉬빔바겐은 14,000여대가 생산되었고, 제대로 된 카데프바겐이 생산된 것은 1940년에 지휘관용 차량 4대가 생산된 것이 고작이었다. 

히틀러가 카데프바겐에 감탄했던 점 중 하나는 대량생산이 아주 용이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군용차로 전환하기 쉬운 구조라는 점이다. 이렇게 '마이카'를 향한 33만명에 달하는 독일 국민들의 꿈은 히틀러의 전쟁 자금 및 물자로 쓰이는 기만으로 짓밟히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 국민차를 인도받은 독일 국민은 한 명도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빛을 발하다
인류 역사 상 가장 참혹한 전쟁으로 마무리된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의 국민차는 아이러니하게도, 폐허가 된 독일 땅에서 국민차 1형은 당시 볼프스부르크 지역을 점령했던 영국군의 지시에 따라 생산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이 차는 '폭스바겐 타입 1'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나치 독일 시대에 국민차 저축을 했던 독일인들은 1948년, 카를 슈톨츠(Karl Stolz)의 주도로 '국민차 예금자 협회(Hilfsverein ehemaliger Volkswagensparer)'를 조직했다. 약 4만명의 회원이 모인 이 협회는 나치 독일이 짓밟고 빼앗아간 마이카의 꿈을 되찾기 위한 법정 싸움에 들어갔다. 그리고 지리멸렬한 법정 싸움 끝에, 1961년, 폭스바겐AG가 'KdF 예금자 혜택'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하면서 일단락된다. 폭스바겐은 국민차 예금자들을 대상으로 신차 구매시 신차 가격의 거의 1/6에 해당하는 600마르크(Deutsche Mark, DM)를 할인해주거나 최대 100DM을 현금으로 보상했다. 그리하여 1970년도까지 총 13만여명의 신청자가 구제를 받을 수 있었다. 이 보상 프로그램에 쓰인 돈은 총 6,27만 6,175DM에 달했다. 이 뿐만 아니라 설계를 도둑맞은 타트라 역시 1965년도에 폭스바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100만 DM의 손해배상을 받아냈다.

이렇게 전후 배상에 대한 문제로 시끌시끌했던 동안 폭스바겐 타입 1은 1946년도부터 정식으로 생산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생산된 차량 중 일부는 영국 점령군에게 제공되었고, 일부는 독일 정부에 전달되었다. 첫 해 동안에는 일반인은 차를 구매할 수 없었다. 그러다 마셜 플랜이 가동되며 유럽의 전후 복구가 탄력을 받고, 화폐개혁이 실시된 1948년 이후 본격적으로 생산 및 일반 판매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특히 '라인강의 기적'으로 일컬어지는 전후 독일의 빠른 경제회복과 성장, 그리고 해외 수출 등에 힘입어 비틀의 생산량은 늘어갔고, 1955년도에는 100만대의 폭스바겐 타입 1이 생산되었다. 비틀은 1930년대 후반의 기반설계를 고스란히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차량의 기골을 보강하고, 개선된 성능의 엔진을 새롭게 적용하는 등, 지속적인 상품성 개선 작업을 더해 저렴한 가격과 신뢰성으로 전세계에 뻗어 나갔다. 그리고 1968년, 폭스바겐이 '비틀(Beetle, 獨 Kaefer)'이라는 애칭을 정식 명칭으로 지정하면서 비로소 이 차는 비틀로 불리기 시작했다.

폭스바겐 비틀은 미국 시장에도 많은 양이 수출되었다. 특히 이 차는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이른 바 '마이크로버스'라고 불리는 폭스바겐 타입 2(Volkswagen Typ 2)와 함께 '반전주의'로 유명한 히피(Hippie)들이 아주 좋아해서 히피들의 상징으로 통했다. 전쟁을 일으킨 원흉인 히틀러의 지시로 만들어진 자동차가 반전주의를 부르짖는 히피들의 상징이 된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폭스바겐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굉장히 꺼림칙하게 여겼지만, 이들 덕분에 미국에서 비틀과 타입2가 날개 돋친 듯 팔리자, 나중에는 마케팅 수단으로 잘 써먹었다고 한다. 이후 비틀은 1978년도가 돼서야 생산이 중단되었다.

한편 비틀은 중남미에서도 인기가 대단했다. 폭스바겐이 유럽에서 비틀의 생산을 종료했음에도 멕시코에서만큼은 21세기에 접어든 2003년도까지 계속 생산이 이루어졌다. 이 덕분에 유럽 시장에서는 1985년도까지 멕시코 공장에서 생산한 비틀을 구매할 수 있었다. 멕시코에서는 비틀의 기본 세단형은 물론, 픽업트럭형 모델까지 자체적으로 제작해 판매했다. 이러한 덕분에 폭스바겐 비틀은 65년의 세월 동안 총 2,700만대가 넘게 생산되며 2023년 현재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만들어진 자동차로 남아 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