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했던차]시트로엥 2C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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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했던차]시트로엥 2CV
  • 박병하
  • 승인 2023.12.13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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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PSA(푸조-시트로엥) 그룹과 르노 그룹은 오늘날 프랑스를 대표하는 거대 자동차 기업집단이다. 프랑스 푸조는 1810년 세워진 푀조 가문의 철공소로부터 시작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기업이며, 르노 또한, 자동차산업의 초창기인 1899년에 사업을 시작해 다양한 기술혁신을 선보여 온, 전통 있는 자동차 기업이다.

그 중에서도 시트로엥은 자동차 역사에 있어서 여러 혁신을 시도한 제동차 제조사이기도 하다. 1934년, 세계 최초로 현대적인 전륜구동 방식의 모노코크 구조를 채용한 승용차인 트락시옹 아방(Traction Avant, 11CV)을 선보인 것이다.  모노코크 구조의 채용은 이탈리아의 란치아(Lancia)의 람다(Lambda)가 최초이기는 하지만 이 구조의 대중화를 이끌었던 것은 시트로엥이라는 평가가 있다. 여기에 세계 최초로 유압식 서스펜션을 상용화하기도 했으며, 세계 최초의 자동차 애프터 서비스 제도를 실시한 회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트로엥은 오랜 역사 동안 부침도 겪었다. 창립 당시에는 기어 납품으로 시작했다가 사업을 키우며 완성차 제조사로 성장한 시트로엥이었지만, 르노와의 경쟁 과정에서 무리한 공장 신축을 밀어붙였다가 파산해 타이어 회사인 미쉐린으로 넘어간 적도 있었고, 제 2차 세계대전기에는 어떻게든 자사 공장을 이용하려 했던 나치 독일에 끝끝내 비협조적으로 나가며 경영자가 쫓기기도 하는 등, 위태로운 상황에 직면했다. 특히 이 시기를 거치면서 시트로엥에서는 여러 명차들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한 때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상용차 시장을 휩쓸었던 'H 밴(H Van)', 오늘날 고급 브랜드로 재탄생한 'DS', 그리고 이번 기사의 주인공인 '2CV'가 있었다.

농민을 위해 태어난, "네 바퀴 달린 우산"
1934년, 파산한 시트로엥을 타이어회사 미쉐린이 인수하게 되었는데, 이 때 미쉐린이 시트로엥의 경영진을 쇄신하면서 자사 경영진 중 한 명을 시트로엥의 부사장으로 앉히게 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앞에 등장한 피에르 쥘 불랑제다. 피에르 쥘 불랑제는 시트로엥의 회생을 위해 새로운 차량을 개발코자 했다.

하지만 그 대상은 이전까지 자동차 회사들이 타겟으로 삼아왔던 도시의 시민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타겟으로 삼은 고객층은 프랑스 각지의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고 있는 '농민'들이었다. 이 당시 프랑스의 농민들은 수확한 농산물을 시장까지 운반하는데 여전히 말과 수레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 때 피에르 쥘 불랑제를 비롯한 시트로엥 경영진은 "우리는 사람들을 위한 자동차를 만들어야 한다"며, "아주 편안하지는 않아도, 몇 명의 사람도 태울 수 있으면서 짐도 실을 수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단순하고 경제적인 자동차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고 한다.

시트로엥은 시장 조사 결과를 종합해, "4 roues sous 1 parapluie(1개의 우산, 4 개의 바퀴)"이라는 컨셉트를 잡게 된다. 그리고 시장 조사 당시 수집한 자료들을 토대로 다음과 같은 세부 사양을 정했다.

1. 좌석은 4개일 것.
2. 수하물은 최대 50kg까지 적재 가능할 것.
3. 과세 마력(Tax Horsepower) 기준으로 2마력(cv)을 초과하지 아니할 것.
4. 최고속도는 60km/h를 달성할 것
5. 3단 기어박스를 채용하고 초보자도 쉽게 운전할 수 있을 것.
6. 구동 방식은 전륜구동을 사용할 것.
7. 저렴하고 튼튼할 것.

이 외에도 농촌에서의 사용 환경을 고려해, "진흙투성이의 비포장 도로를 달릴 수 있을 것", "갓 쟁기질을 마친 밭에서 날계란이 담긴 바구니를 멀쩡한 상태로 운반할 수 있어야 할 것" 등의 조건이 더 붙었다. 

피에르 쥘 불랑제는 이와 같은 조건에 부합하는 신차를 'TPV 프로젝트'라 명명하고 개발을 시작했다. TPV는 프랑스어로 "Très Petite Voiture(아주 작은 차)"라는 의미다. 이 프로젝트에는 세계최초의 양산형 전륜구동 자동차 트락시옹 아방(Traction Avant)을 설계한 유능한 엔지니어이자, DS를 탄생시킨 앙드레 르페브르(André Lefèbvre)를 책임자로 임명하고 이탈리아 출신의 디자이너 플라미니오 베르토니(Flaminio Bertoni)를 참여시켰다.

이 프로젝트는 파리에 위치한 시트로엥 시설에서 비밀리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른 제조사들이 이 프로젝트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시장을 빼앗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워낙에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이들은 차량의 개발 및 테스트 작업을 위해 파리 시내에서 100km 이상 떨어진 라 페르테 비담(La Ferté Vidame)에 돌담으로 완전히 둘러싸인 전용의 부지를 따로 매입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1938년도에는 시험주행을 위해 제작된 49대의 시제차량이 특별히 설계된 전용 코스에서 시험 주행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TPV 프로젝트의 양산차는 서스펜션 암에 무려 마그네슘 합금을 사용하고 있었고, 중량을 줄이기 위해 차체 외판을 알루미늄 합금을 사용했다. 파워트레인은 전륜구동에 트락시옹 아방의 3단 변속기, 그리고 새로 개발한 수랭식 수평대향 2기통 엔진을 사용했다. 그리고 1939 8월, 시트로엥의 TPV 프로젝트는 프랑스 정부에서 승인을 받고 10월 예정된 파리 모터쇼에서 공개할 예정이었다.

프랑스 역사 상 가장 암울했던 시기
하지만 시기가 너무 좋지 않았다. 전날인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1939년 열리기로 한 모터쇼가 취소가 되면서, TPV는 대중에게 알려질 기회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폴란드를 침공한 나치 독일군은 폴란드 점령이 마무리되자마자 프랑스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기갑부대를 앞세운 '낫질작전'을 통해 프랑스로 물밀듯이 밀고 들어왔다. 나치 독일의 작전은 의외로 허술하기 그지 없었으나, 프랑스군의 어이 없는 졸전으로 인해 독일군을 막아낼 수 없었고, 결국 1년도 지나지 않은 1940년 6월 25일, 나치 독일군에 속절없이 패배한 프랑스가 항복을 선언하고, 7월에 사실 상 나치 독일의 괴뢰정권에 가까운 비시 정권(Régime de Vichy)이 세워지며, 나치 독일군이 프랑스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치 독일은 군에서 쓸 장비와 물자를 획득하기 위해 프랑스의 산업 역량을 이용하기로 한다. 특히 자동차 사업을 하고 있었던 기업들에게 독일군의 육로 수송에 사용할 트럭을 생산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이 당시 프랑스의 자동차 기업들 중 가장 큰 규모였던 르노(Renault)의 경우에는 전쟁이 장기화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직원들의 고용 유지를 위해 나치 독일의 트럭 생산 요구에 응했다. 이에 많은 수의 르노 트럭이 독일군의 병력과 물자를 전선 곳곳에 실어날랐다. 나치 독일은 르노에게 전차의 생산까지 요구했지만 르노는 이를 거부했다.

푸조(Peugeot)의 경우에는 르노만큼 협조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독일군에 저항하지는 못했다. 소쇼(Sochaux)에 위치한 자사 공장의 6만명에 달하는 직원들의 고용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이들은 독일군이 요구한 트럭 10대 중 6대 정도를 불량품으로 납품하는 등의 '태업'을 일삼아 나치 독일의 신경을 긁었고, 훗날 연합군의 폭격으로부터 공장 인근 주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공장을 폭파시키는 결단을 내리기도 했다. 게다가 이후에도 영국 첩보 기관에 독일군의 정보를 제공하는 등, 독일군을 괴롭혔다.

반면 시트로엥은 나치 독일에 대놓고 반항을 했다. 이는 당시 시트로엥을 경영하고 있었던 피에르-쥘 불랑제(Pierre-Jules Boulanger)의 영향이 컸다. 시트로엥은 독일의 그 어떤 기술자와도 중계인을 통하지 않으면 접촉 자체를 거부했다. 스스로 공장을 파괴한 장 피에르 푀조 3세를 살려주는데 도움을 준 페르디난트 포르쉐조차 이들과는 직접 접촉할 수 없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시트로엥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치에게 철저하게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불랑제를 비롯한 시트로엥의 경영진은 이미 자사가 생산한 자동차들을 파괴해서 못 쓰게 만드는 것은 물론, 일부는 알려지지 않은 곳에 꽁꽁 숨겨두었다. 자사가 생산한 자동차들이 나치독일에 넘어가 전용(轉用)되는 것을 막고, 그들이 자사의 자동차 기술을 빼앗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물론 이들도 직원들의 고용은 유지하고자 하였기에, 나치 독일의 모든 요구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나치 독일은 이들에게도 르노와 마찬가지로 트럭의 생산을 요구했는데, 시트로엥은 트럭 생산 라인에서 의도적으로 태업을 벌였다. 푸조의 경우에는 10대 중 6대 정도를 불량품으로 납품하는 선에서 그쳤지만, 이들은 한 술 더 떠서 납기를 준수하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 그나마 만들어진 것들도 미완성이거나 결함품을 제공하는 등, 가뜩이나 물자 및 수송수단 부족에 시달렸던 나치 독일의 신경을 박박 긁었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피에르 쥘 불랑제는 자사의 아이디어를 나치 독일에게 내어 줄 생각이 티끌 만큼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나치 독일에게 철저하게 비협조적으로 나가는 한 편으로, 이미 제작된 250대의 TPV 양산차 전량을 폐차장으로 보내 못 쓰게 만들었고, 일부 시제차량은 분해해서 자사 테스트센터의 구석진 창고와 자사 공장 지하에 꽁꽁 숨겨두었다. 이 덕분에 그들은 파리를 제외한 프랑스 전역이 폭격을 맞았던 가운데에서도 전쟁 이후 2CV의 양산화를 빠르게 재개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프랑스 전역에 게슈타포를 깔아두었던 나치 독일의 눈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이 때문에 나치 독일은 이 TPV를 자신들이 내건 국민차 계획에 채택해주는 대가로 시트로엥의 TPV 프로젝트 계획안을 공개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피에르 불랑제는 나치 독일의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대놓고 거절해버린다. 특히 독일의 '국민차 사업'이 사실 상, 저렴하고 생산성 좋은 군용차량을 조달하고자 하는 것으로 변질되는 것을 확인하면서 피에르 쥘 불랑제는 더더욱 나치 독일과의 접촉을 피했다. 급기야 1942년, 연합군의 횃불작전으로 단단히 화가 난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완전히 집어삼키고 군정청을 세워버린 시기에도, 시트로엥의 신차 개발 프로젝트는 은밀하게 착착 진행했다. 나치 독일은 피에르 쥘 불랑제를 '제국의 적'으로 규정하고 눈에 띄기만 하면 체포하려 들었고, 추방 위협도 받았다고 전해진다. 종전 후 파리 소재의 게슈타포(비밀경찰) 사무소에서 발견된 문건 중에는 피에르-쥘 불랑제의 이름이 1순위로 적힌 블랙리스트가 발견되기도 할 정도였다.

그들은 나치 독일의 삼엄한 감시 하에서도 지속적으로 신차의 성능을 테스트해왔으며, TPV는 이미 양산화 수준까지 완성도를 높였음에도, 더욱 꼼꼼하고 치밀한 테스트를 거쳤다. 특히 '저렴한 가격'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초기형에 상당 수 사용했던 알루미늄 합금과 마그네슘 합금의 가격이 전쟁으로 인해 폭등하자, 이들 소재는 더 이상 경제적이지 못하다고 판단, '극한의 원가 절감'으로 개발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그리하여 TPV는 강철 프레임에 강철 차체 외판, 그리고 새로 개발한 수랭식 엔진 대신, 공랭식 엔진으로 변경하게 되었다. 기어박스의 경우에는 트락시옹 아방의 3단 변속기 대신, 거의 유사한 크기로 개발한 4단 변속기를 탑재하기로 했다. 기어비가 좀 더 촘촘해지면서 중량증가로 인한 연비 하락을 상쇄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44년에는 승차감 개선을 위한 유압식 서스펜션의 시험까지 진행했다.

인고의 시간 끝에 드디어 탄생! 그런데...
이렇게 제 2차 세계대전과 프랑스의 항복, 그리고 나치 독일의 점령이라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근성으로 개발을 이어오던 시트로엥은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에 자유가 다시 찾아오자, 최종 개발 작업에 속도를 냈다. 그리하여 1948년 10월 다시 열리게 된 파리 모터쇼에서 시트로엥은 전간기부터 나치 독일 점령기에 걸쳐 뼈를 깎는 노력으로 개발한 신차, '2CV'를 세상에 공개하게 된다.

이렇게 완성된 2CV는 그야말로 '원가절감'의 끝판왕이나 마찬가지였다. 스탬핑 공법으로 제작된, 절곡처리된 철판을 그대로 사용한 것은 물론, 시동 모터 없이 손으로 크랭크를 돌려서 시동을 거는 방식을 사용했으며, 심지어 디자인조차 모양새가 굉장히 우스꽝스러웠던 탓에 네덜란드의 언론에서 이 차를 두고 "미운오리새끼(het lelijke eendje)"라는 조롱 섞인 별명을 붙였다.

폐허가 된 유럽에서 이동의 자유를 제공
그렇지만 당초 목표로 했던 저렴하고 유지보수가 용이한 차량을 만드는 것은 성공했다. 극도로 단순한 설계를 비롯하여 오토바이에 사용되는 것과 진배 없는 375cc의 공랭 2기통 박서 엔진을 적용해 세금 부담이 적었고, 전자장치를 극단적으로 줄인 덕분에 신뢰도도 높았다. 이 뿐만 아니라 강철 차체는 용접으로 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볼트 접합으로 제작했던 탓에, 사용자 레벨에서 직접 강철제 루프 패널을 들어내고 롤 타입의 비닐이나 캔버스 탑을 씌우는 것도 가능했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생긴 것과 다르게, 2CV는 박서엔진 채용과 더불어, 극단적으로 단순화되어 있으면서도 무게를 많이 차지하는 모든 요소들을 최대한 낮게 배치했다. 이 덕분에 무게중심도 상당히 낮아서 뒤뚱거릴 것만 같은 생김새와 달리, 코너링시 차체의 안정성이 뛰어났다. 여기에 4륜 모두에 드럼 브레이크를 적용해 제어력까지 높여, 안정적인 주행을 할 수 있었다.

시트로엥 2CV의 375cc 수평대향 2기통 엔진은 9마력의 최고출력을 냈고, 앞서 언급한 전용 4단 수동 변속기와 짝을 일루었으며, 구동방식은 트락시옹 아방에 사용된 전륜구동계를 활용했다. 초기형에 적용된 이 파워트레인을 통해 2CV는 70km/h의 최고속도를 낼 수 있었다. 그리고 1970년도에는 28마력의 최고출력을 내는 신형의 602cc 엔진을 탑재해 견인력을 높이고, 최고속도도 113km/h로 높아졌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시트로엥 2CV는 당초 타겟층으로 겨냥하고 있었던 농민들 뿐만 아니라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자유로운 이동수단을 갈구했던 도시의 시민들에게도, 심지어 적국이었던 독일에서도 인기가 좋아 주문이 폭주했다. 1949년도부터 본격적인 생산을 개시한 시트로엥 2CV는 주문이 마구 밀려들어, 당시 시트로엥의 생산 역량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당시 2CV의 주문량은 자그마치 7년치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 물량적체는 공장 라인이 제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빠르게 해소되기 시작했다. 바로 다음 해인 1950년도에는 특유의 극단적으로 단순한 구조 덕에 생산 시간이 엄청나게 빨라져, 말 그대로 '찍어내기' 시작했는데, 하루 평균 무려 400대가 생산되어 출고가 진행되었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시트로엥은 2CV의 실용적 특징을 더욱 강조한 밴(Van) 모델까지 공개했다. 2CV 밴 모델이 공개되자 프랑스 전역의 유틸리티 차량 수요가 몰려 주문이 쇄도했다. '2CV AU'로 명명된 이 차는 1951년도부터 생산을 개시했으며, 프랑스 전역의 배달용 차량 수요는 물론 소상공인들과 농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1958년도에는 엔진을 2개 탑재하는 방식으로 사륜구동을 구현한 2CV 사하라 모델도 출시되었고, 59년도에는 탈착식 라디오가 적용된 라디오엔(Radioen)이라는 변종도 등장했다.

시트로엥은 2CV를 저렴한 가격을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엔진과 디테일 보강 등, 지속적인 개량을 통해 상품성을 유지했다. 시트로엥은 이 차를 무려 1990년까지 장장 40여년에 걸쳐서 생산했다. 프랑스에서는 1988년, 포르투갈에 위치한 만구알데(Mangualde) 공장에서는 1990년도에 생산을 종료하면서 TPV 프로젝트로부터 반세기를 넘은 역사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시트로엥 2CV는 암울했던 시기, 모진 환난을 겪고서 태어나,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유럽에서 유용한 운송수단이 되어 주었고, 지금도 폭스바겐 비틀과 함께, 유럽에서 손꼽히는 국민차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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