닛산 GT-R 시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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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산 GT-R 시승기
  • 김기범
  • 승인 2012.04.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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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본 닛산 본사까지 가서도 ‘그림의 떡’마냥 쳐다만 봤던 GT-R을 결국 포르투갈 리스본의 에스토릴 서킷에서 시승했다. 그곳에서도 GT-R 시승차는 두 대뿐이어서 시승 시간은 턱없이 짧았다. 그럼에도 막연한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초강력 가속성능과 아스팔트에 접착제를 발라놓은 듯한 접지력은 단박에 피부에 와 닿았다.





GT- R의 첫 인상은 당당한 덩치였다. 바로 전 세대 모델인 코드네임 R34의 스카이라인 GT-R이 쏘나타라면, 이번 R35 GT-R은 에쿠스. 덩치가 이제 완연한 수퍼카급이다. 피트 한쪽에 전시된 GT-R은 차체를 예리하게 갈라 뱃속을 훤히 드러냈다. 정교한 톱니바퀴가 화려한 조명을 받아 뿜는 형형한 광채에 눈이 부셨다.

GT-R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모태가 됐던 스카이라인을 살펴보는 게 순서다. 지난해 4월 닛산 스카이라인은 데뷔 50주년을 맞았다. 올해로 45주년을 맞는 포르쉐 911의 역사보다 더 긴 셈이다. 최초의 스카이라인이 선보인 때는 1957년. 항공기 회사로 창업해 제로 전투기를 만들다 1952년부터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한 후지정밀공업의 작품이었다.

프린스 엠블럼을 붙인 1세대 스카이라인은 스포츠카가 아닌, 고급 세단이었다. 1.5L 60마력 엔진을 얹고, 최고시속 140㎞까지 달렸다. 4도어와 5도어 왜건으로 선보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선 스카이웨이란 이름의 픽업과 밴으로도 가지를 쳤다. 스카이라인은 일찌감치 레이스 트랙으로 뛰어들어 본격적으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1964년 제2회 일본 그랑프리에서 스카이라인 GT는 포르쉐의 경주차 904 GTS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치의 양보 없는 경쟁을 펼쳤다. 일본인들은 스카이라인을 보며 희망을 품었다. 선망해마지 않던 독일차와 한 번 겨뤄볼 수 있겠다는 자부심을 갖게 됐다. 이런 ‘의식의 과장’ 저변엔 패전 이후 그들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멍으로 남은 열등감이 있었다.

스 카이라인은 꾸준히 진화를 거듭해 왔다. 패밀리 룩이랄 것도 없었고, 메커니즘도 수시로 바뀌었지만 농익은 기술로 완성된 차라는 이미지만은 변함이 없었다. 1966년 닛산이 프린스자동차공업을 합병하면서 스카이라인 또한 둥지를 옮겼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인피니티 G35 세단와 G37 쿠페가 일본에선 스카이라인으로 팔린다. 벌써 12세대 째다.

한편, GT-R은 오랜 세월 스카이라인의 고성능 버전으로 군림해 왔다. 처음 선보인 건 1969년. 닛산의 레이싱카 R380의 심장을 손질한 2.0L DOHC 160마력 엔진과 5단 수동변속기를 얹었다. 첫 GT-R은 데뷔한 그 해 일본의 JAF 그랑프리에서 우승한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1세대 GT-R은 일본 국내 레이스에서 50승을 거둬 전설적인 존재로 거듭났다.

상자처럼 생겼다고 해서 상자란 뜻의 ‘하코’와 스카이라인의 ‘스카’를 합친 ‘하코스카’라고 불린 1세대 GT-R은 4년 동안 1천945대가 팔렸다. 3세대 GT-R은 일본 투어링카 선수권에서 29연승을 세웠고, 4세대는 르망 24시간 내구레이스에 출전해 국경 너머까지 이름을 알렸다. 스카이라인 GT-R은 어느덧 ‘드림카’를 넘어 일본인의 자존심으로 자리매김했다.

거품경기가 붕괴된 이후 일본엔 끝을 가늠할 수 없는 불경기가 찾아왔다. 일본인들은 3년의 미신을 믿는단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3년만 꾹 참고 버티면 좋은 시절이 올 거란 믿음이다. 그러나 3년이 지나고, 또 3년이 지나도 어려운 상황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지친 그들 앞에 어느 날 외국인 CEO 한 명이 혜성처럼 나타났다. 카를로스 곤이었다.

절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종신고용의 신화가 깨졌고, 연공서열이 뒤집혔다. 수많은 직원이 회사를 떠났다. 숫자는 거짓말을 못했다. 부채는 줄었고, 매출은 올랐다. 외국인의 기행에 가까운 개혁은 일본인의 가슴에 ‘희망’이란 두 글자를 깊이 아로새겼다. 자연스레 카를로스 곤을 겨냥한 의뭉스런 시선도 눈 녹듯 사라졌다.

스카이라인이 11세대로 진화하면서 명맥을 끊겼던 GT-R을 되살린 주인공이 바로 곤이었다. “GT-R을 반드시 부활시키겠다.” 2001년 곤은 상처 입은 일본인의 자존심을 따사로이 어루만졌다. 약속은 착실히 지켜졌다. 2005년 도쿄모터쇼에선 GT-R의 프로토타입이 선보였다. 그리고 지난해 같은 장소에서 세간의 뜨거운 관심 속에 GT-R이 부활했다.

GT-R은 이번에 R35로 거듭나면서 스카이라인과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었다. 그래서 이름도 그냥 GT-R이다. 디자인엔 일본색이 짙다. 그래서 더 GT-R답기도 하고. 닛산 디자인 부사장, 시로 나카무라는 “엔지니어링과 미학의 밸런스를 이뤘다”고 말하지만, 솔직히 ‘아름다울 미’자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전통적으로 GT-R이 예쁜 차가 아니긴 했다.

카본파이버 재질의 앞뒤 디퓨저가 차 바닥으로 흐르는 공기의 흐름에 가속을 더하고, C필러와 스포일러는 지붕을 타고 넘은 공기를 유도해 다운포스를 만든다. 범퍼로 스민 공기는 엔진을 식힌 뒤 벤트로 빠져나가면서 엔진룸의 기압을 낮춘다. 차체의 사소한 주름 하나도 공기의 흐름을 이롭게 쓰기 위한 고민의 결과다. 공기저항계수(Cd) 0.27이 그 방증이다. 

스카이라인과 별개의 독자 노선을 선언한 만큼, 이번 GT-R은 닛산의 어떤 차종과 겹치지 않는 전용 뼈대, ‘프리미엄 미드십 플랫폼’을 쓴다. 이상적인 무게배분을 위해 엔진은 앞쪽, 변속기는 뒷바퀴 액슬 쪽에 달았다. 드라이브 샤프트와 변속기까지 다 아래쪽에 쑤셔 넣으면서 실내공간도 확보하려니 자연스레 키(1천370㎜)가 스포츠카치고는 큰 편이다.

GT-R의 심장은 닛산의 주력인 VQ 엔진을 기본으로 완성한 V6 3.8L 트윈터보. 신앙처럼 GT-R을 추종하는 이들 사이에선 ‘VR38DETT’란 코드네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최고출력 480마력(6,400rpm), 최대토크 60.0㎏·m(3,200~5,200rpm)을 뿜는다. 닛산 요코하마 엔진 공장에서 엔지니어 한 명이 한 기씩 처음부터 끝까지 손맛을 살려 만든다.

변속기는 닛산 최초의 6단 듀얼클러치(GR6). 다운시프트 때 엔진회전수를 맞추는 기능은 물론 세 가지 오토와 두 가지 매뉴얼 모드를 마련했다. 패들시프트로도 변속할 수 있다. 언덕에서 브레이크 페달을 떼면 2초간 제동상태를 유지하는 기능도 담았다. 변속기 역시 엔진과 마찬가지로 요코하마 공장에서 엔지니어가 일일이 손으로 작업한다.

GT-R은 아테사(Attesa) E-TS로 네 바퀴를 굴린다. 평소 구동력을 100% 뒤쪽에 전하다 노면상태와 접지력, 회전차이에 따라 앞쪽으로 50%까지 옮긴다. 브레이크는 브렘보제. 앞 6피스톤, 뒤 4피스톤 캘리퍼에 지름 380㎜의 V디스크를 물렸다. 서스펜션은 빌스타인제 감쇠력 조절 장치를 달아 스위치로 R(고성능)·S(노멀 세팅)·C(컴포트)를 오갈 수 있다.




GT- R의 실내는 ‘복잡한 게 첨단’이라는 일본 특유의 만화적 아이디어로 점철됐다. 그렇다고 뭔가가 굉장히 많은 것도 아닌데, 별스럽게 현란하다. 계기판 중앙엔 타코미터, 그 왼쪽엔 시속 340km까지 그려 넣은 속도계가 자리한다. 센터페시아에 박힌 모니터는 드로틀 열린 정도, 횡G, 변속기 오일압력, 엔진오일과 냉각수 온도를 디지털 그래픽으로 띄웠다.

닛산 GT-R의 ‘제로백’은 3.6초. 경험해 보기 전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살벌한 가속이다. 두 바퀴를 돌며 살펴본 에스토릴 서킷은 군침이 절로 돌 만큼 흥미진진했다. 구배와 고저차가 심한 블라인드 코너가 많아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짤막한 기어레버를 ‘D’로 옮기고 피트를 떠났다. 코스에 접어들자마자 드로틀을 활짝 열었다.

피가 뒤로 쏠리며 순간이동의 거친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황당한 가속성능은 앞서 익히 경험했다. 직접 스티어링 휠을 쥐니 무게중심과 접지력의 미묘한 변화가 느껴진다. 코너링 때 네 바퀴는 아스팔트에 접착된 느낌이다. 무게중심이 코너 바깥 쪽 뒷바퀴에 실리면 점진적인 오버스티어가 나는데, 대처방법은 간단하다. 가속페달을 더 밟아주면 된다.

그러면 앞바퀴가 차체를 끌어 슬쩍 라인을 다잡는다. 언더스티어가 났을 때도 마찬가지. 드로틀을 열면 뒷바퀴에 힘이 실려 코너 안쪽을 예리하게 파고든다. 처음엔 GT-R의 존재감에 한없이 위축되기 쉬운데, 한 랩만 돌고 나면 의기양양해진다. 운전이 쉬워서다.

시승시간은 야속하리만치 빨리 흘렀다. GT-R을 어렴풋이 맛보는 데 그쳤지만, 두 가지 사실은 피부에 확실히 와 닿았다. 한 가지는 예상대로였고, 한 가지는 전혀 반대였다. 전자는 빠르다는 사실. 그건 GT-R의 숙명이기도 하다. 그만큼 엔지니어는 쫓기는 입장이 된다. 역시나, 닛산 엔지니어는 보란 듯이 GT-R을 팬의 기대치를 멀찌감치 웃도는 수준까지 끌어 올렸다. 나아가 예상과 달리 GT-R의 운전은 싱거우리만치 쉬웠다. 그들의 주장처럼, 닛산 GT-R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 몰 수 있는 수퍼카였다. 다른 표현으론, 자동차광을 위한 최고의 하이테크 장난감이었다.


글 김기범 | 사진 닛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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