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카 공방, 럭셔리 브랜드로 거듭나다 - 재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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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카 공방, 럭셔리 브랜드로 거듭나다 - 재규어
  • 박병하
  • 승인 2015.1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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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자동차 제작사들 중에서는 처음부터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했던 기업이 있는가 하면, 자동차와는 큰 연관이 없는 사업을 하던 도중 자동차 사업에 발을 들이는 경우도 있다. 이번에 소개하는 브랜드, `재규어`가 그러한 경우 중의 하나다. 재규어는 현재 영국을 대표하는 럭셔리 자동차 제조사 중 하나로, 고급 승용차와 GT, 스포츠카들을 생산하고 있다. 그 외에도 영국 왕실에 자사의 자동차를 납품하며 이름을 높이기도 했다.



재규어의 역사는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이들의 파란만장한 굴곡은 1922년, 공학도이자, 이륜차 애호가였던, 윌리엄 라이온즈(William Lyons)와 윌리엄 웜슬리(William Walmsley)가 영국 잉글랜드 랭커셔 주에 위치한 블랙풀에서 `스월로우 사이드카 컴퍼니(Swallow Sidecar Company: SSC)`라는 이름의 작은 공방을 세우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두 명의 `윌리엄`이 세운 이 작은 공방은 처음에는 이륜자동차의 측면에 장착하여 승객을 태우거나 짐을 싣는 등의 용도로 사용되는 `사이드카`를 제작하는 것을 본업으로 삼았다. 사이드카를 제작하면서 이들은 판금이나 실내에 사용되는 마감 등의 기술을 차곡차곡 축적할 수 있었고, 이후에는 모터싸이클의 수리 작업 등에도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기계공학에 대한 기술도 조금씩 축적해 나갔다.



그러던 중 두 윌리엄은 당시 영국의 국민차로 통할 정도로 저렴한 가격에 팔리고 있었던 `오스틴 7`의 섀시에 자체적으로 제작한 차체를 얹는 작업을 시험적으로 실시했다. 이들이 자체 제작한 차체는 당시는 물론, 오늘날에도 럭셔리 브랜드로 유명한 벤틀리와 유사한 스타일링을 취하고 있었다. 또한, 저렴한 대중차를 기반으로 제작한 만큼, 가격은 벤틀리의 1/3에 불과했다. 상품으로서 상당히 매력적인 자동차 하나가 그 자리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될 성 부른 떡잎임이 분명했던 SSC의 처녀작은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고, 이에 두 윌리엄은 사명을 `스월로우 사이드카 & 코치빌딩(Swallow Sidecar and Coachbuilding: SSC)`으로 사명을 변경함은 물론, 1931년 런던 모터쇼에 자신들의 첫 작품을 내놓으면서 자동차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국민차 오스틴 7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벤틀리를 닮은 스타일링을 지닌데다, 가격까지 `착했던` SSC의 처녀작, `SS1`은 그 가능성을 증명하듯, 각지에 팔려 나가기 시작하며, 회사를 크게 성장시켰다. 또한, SS1의 성공은 자동차 산업에 이제 막 뛰어 든 신출내기인 SSC에게 큰 자신감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하지만 두 윌리엄 중 한쪽 윌리엄, 웜슬리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자동차 산업에 뛰어 드는 것을 회의적으로 생각했으며, 이 때문에 그는 라이온즈와 관계가 틀어지면서 회사를 떠나고 말았다.



SSC는 공동 창업주인 두 윌리엄 중 한쪽을 잃었지만, 회사에 남은 라이온즈는 작정하고 회사의 체질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그는 웜슬리가 떠난 자리에 외부의 유수한 공학자들을 불러 들이기 시작했고, 지속적인 자동차 부문의 신제품 개발을 위해 사이드카 공방을 정리, 전적으로 자동차만을 제작하는 기업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때부터 스월로우 사이드카 & 코치빌딩은 `유한회사 SS 자동차 (SS Cars Ltd)`로 다시 한 번 이름을 바꾸게 된다.



이렇게 체질을 개선한 SS 자동차는 1935년,`SS 재규어(SS Jaguar)`라는 이름의 신 모델을 출시하기에 이르렀다. 이 차가 바로, 훗날 이들이 사용하게 될 `재규어`라는 사명의 유래가 된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36년, SS 재규어를 바탕으로 성능을 키워, 최고 속도 100mph(약 161km/h)를 돌파한`SS100`을 잇달아 출시하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 SS100의 `100`이라는 숫자는 100mph(약 161km/h)를 넘은 차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승승장구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바로 전세계를 휩쓴 제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이었다.



2차대전이 끝나고, SS 자동차는 또 다시 사명을 바꾸게 된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나치독일`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나치독일이 낳은 최악의 무장조직이었던 `슈츠슈타펠(Schutzstaffel)`의 이니셜이 `SS`였기 때문에, 이 이름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이리하여 SS 자동차는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재규어 자동차(Jaguar Cars Limited)`로 그 이름을 바꿔 달고 새로운 출발을 꾀했다.



전쟁이 끝나고 3년 뒤인 1948년, 윌리엄 라이온즈는 그 동안 준비해 왔던 최신예 모델, `XK120`을 시장에 내놓는다. 이 XK120이라는 차는 재규어와 영국 자동차 역사에 꽤나 큰 족적을 하나 남겼는데, 그것은 바로, 양산차 최초로 120mph(약 193km/h)를 돌파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당시만 해도, 120mph라는 속도는 경주차가 아닌 이상, 일반적인 양산차로서는 도달하기 힘든 속도였다. 영국의 웬 조그만 자동차 제작사가 어느 날 갑자기 내놓은 ``120mph를 돌파할 수 있는`` 양산차는 당연하게도, 당시 언론에서 `120mph를 넘기는커녕, 기계의 신뢰성이 걱정된다`는 식의 의심과 조롱을 한 몸에 받기 시작했다.



XK120에 대한 언론의 의심은 재규어의 주인이자, XK120의 설계자이기도 한 윌리엄 라이온즈를 격노하게 만들었다. 그는 언론의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벨기에의 Jabbeke 지역에 위치한 왕복 2차로 도로를 폐쇄하여 XK120을 위한 코스를 만들었고, 그 곳에 XK120의 성능을 의심하는 취재진을 모두 불러 모으고는, 자신이 직접 운전대를 잡고 성능 시연에 나섰다. 그리고 그 결과는 놀라웠다. 이 날 성능 시연을 하면서 기록한 최고속도는 본래의 목표이자, 차명의 유래이기도 한 120mph가 아닌, 132mph(약 213km/h)에 달한 것이었다! 라이온즈의 이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성능 시연은 의심 많던 영국의 언론을 놀라게 하는 한 편, 재규어 자동차의 이름을 길이 드높이게 만든 대사건으로 통하며, 고성능을 추구하는 재규어의 방향성을 가감 없이 드러낸 계기가 되었다.



이 때부터 이후 재규어 XK120은 스포츠 쿠페 `XK 시리즈`로 정립되어, XK140, XK150등으로 계속 명맥을 이어감은 물론, 오늘날에도, 재규어의 대표 GT카인 `XK`의 연원이 되었다. 그리고 이 XK 시리즈는 1950년대 르망24시에서 통산 5회 우승을 따낸 `재규어 C-타입`과 `재규어 D-타입` 등의 명차를 만들어 낸 밑바탕이 되며, 그 잠재력을 인정 받았다. 여기에 당시로서는 선진적이었던, 항공기의 공기역학적 구조를 최대한 반영한 외관 디자인도 호평받았다.



1955년에는 재규어 세단의 효시인, `Mk 시리즈`의 첫 차인 `MkⅠ`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 세단 역시, 성능을 본위로 하는 재규어의 피가 흐르는 차였다. 2.4리터 엔진을 심장으로 삼은 이 세단형 자동차 역시, 최고속도 120mph를 기록했으며, 4년 후 출시한 Mk II에서도 이러한 방향성이 이어져, 3.4리터 모델을 추가, 200km/h 이상의 속도를 내는 고성능 세단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Mk II 세단의 엔진의 배기량을 늘려, 출력을 강화시킨 Mk II 3.8 경주차는 1960년부터 3년간 `투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의 투어링 카 부문의 우승컵을 쓸어 담는 대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성능 중심의 설계 사상, 그리고 그것을 결과로 입증해 준 모터스포츠에서의 눈부신 성과들을 통해, 재규어는 고급 자동차 브랜드로서 꾸준히 성장을 이어 나갔다. 재규어는 1960년, 영국 최초의 자동차 제작사인 `데임러(Daimler Motor Company. 독일의 다이믈러(Daimler AG)와는 근본부터 완전히 다른 별개의 회사)`를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때 인수한 데임러의 브랜드를 훗날, 자사의 최고급 세단에 붙는 서브 브랜드인 `데임러`, 혹은 `데임러 소버린(Daimler Sovereign)` 등으로 활용하였다.




재규어의 양산차 중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E-타입`이 태어난 해도 이 때였다. E-타입은 50년대 르망24시를 호령했던 선조들의 피를 고스란히 이어 받아, 뛰어난 성능과 `롱 노즈 숏 데크`의 전형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외관 디자인, 그리고 안락한 승차감까지 겸비하여, 고급스러운 GT카로서 시장에 등장했다. 윌리엄 라이온즈는 E-타입의 디자인을 이유로 상품성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으나, 결과는 정 반대였다. 재규어 E타입은 1961년에 열린 제네바 모터쇼에 출품되는 동시에, 찬사가 쏟아졌으며, 단종되는 1974년까지의 13년동안 총 7만대가 넘게 생산되었다.



하지만 재규어의 미래가 항상 장밋빛으로만 흘러간 것은 아니었다. 60년대 후반부터 영국 자동차 산업계의 출혈경쟁이 잦아졌고, 이 때문에 재규어에게도 재정 위기가 찾아 온 것이다. 이 때문에 재규어는 1966년 `브리티쉬 모터 코퍼레이션(British Motor Corporation, BMC)`에 합병되었다. 그리고 2년 후인 1968년, 영국 노동당 정부의 자동차 산업 통합 조치였던 `레일랜드(Leyland)와 합병`을 통해, 오스틴, 모리스, 란체스터, MG, 로버 등과 함께, `브리티시 레일랜드(British Leyland Mortor Company)`의 일원이 되는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이 시절 만들어진 모델이 바로 `XJ6 세단`이다. XJ6는 고급 대형 세단으로, 출시 이후 무려 30년 동안이나 생산될 정도로 장수했는데, 이는 당시 브리티시 레일랜드 내부의 갈등으로 인한 신모델 개발 지연과 재정 악화 등으로 인해, 울며 겨자 먹기로 모델 체인지 없이 똑 같은 차만 주구장창 만들어야 했던 어두운 일면이 있다.



그리고 1972년, 재규어는 영국의 자동차 산업의 몰락에 결정적 기여를 한 브리티시 레일랜드의 일원이 된 것도 모자라, 당시의 재규어를 일궈 온 윌리엄 라이온즈가 은퇴를 선언하면서 또 한 차례의 위기를 맞는다. 이 때문에 재규어는 뒤늦게 XJ12, XJS 등의 신모델을 급하게 만들어 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부랴부랴 내놓은 신모델들은 기본적으로 30년 가량이 된 XJ6의 설계를 기반으로 했으므로, 더 이상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었던 데다, 브리티시 레일랜드 그룹 소속사들의 고질적인 문제로 항상 지적 받아 왔던 조악하기 이를 데 없는 품질과 형편 없는 신뢰성이 겹쳐, 과거의 명성에 먹칠을 거듭하고만 있었다. 이후 재규어는 마거릿 대처 정부가 주도한 민영화의 물결에 따라, 다시 재규어 자동차로 분리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듬해인 1985년, 재규어를 이끌어 온 라이온즈가 사망하고, 4년 뒤인 1989년, 재규어는 포드에 합병되었다. 그리고 그 뒤로 애스턴 마틴, 볼보와 함께, 포드의 고급 자동차 브랜드 그룹인 `PAG`를 결성하게 된다.



포드로의 합병은 재규어에게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을 가져다 준 계기로 작용했다. 재규어는 포드와의 합병을 통해, 포드의 일부 차종과 플랫폼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고, 기존 재규어에 비해, 신뢰성과 생산성 면에서 크게 발전된 신 모델들을 연달아 출시했다. 그 산물들이 바로, 재규어 X-타입과 S-타입이다. 재규어 X-타입은 유럽 포드의 `몬데오`와 플랫폼을 공유하는 모델로, 전륜구동계를 채용한 유일한 재규어 모델이었으며, 브리티시 레일랜드 시절에서 벗어난 품질과 상품성을 지녔었다. S-타입은 링컨 LS의 후륜구동 플랫폼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준대형급 세단 모델로, 미국 시장에서 호평 받으며, 재규어의 재건을 도왔다.



2000년에는 모터 스포츠를 마케팅에 이용한 과거의 성공 사례를 참고하여 `재규어 레이싱(Jaguar Racing)`을 설립, 재규어 사상 처음으로 F1에까지 진출하는 등,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기도 했다. 그에 앞서, 1990년대 초에 재규어는 수퍼카를 제작하기도 했다. 재규어 수퍼카의 이름은 `XJ220`이었다. 차명은 재규어의 역사 초기에 120mph를 넘는 성능을 자랑했던 `XK120`의 작명법을 따른 것으로, 이 차의 목표 최고속도인 220mph는 당시를 주릅 잡았던 페라리 F40과 포르쉐 959보다 빠른 속도였다. 엔진은 초기에는 530마력의 6.2리터 V12 엔진과 상시 4륜구동계를 실으려 했으나, 차체 및 환경 문제에 발목이 잡혀, 3.5리터 V6 터보 엔진을 사용하게 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새로이 적용한 엔진이 제원 상 출력과 토크 수치가 당초 계획했던 6.2리터 V12 엔진에 비해 조금 더 높았는데도 불구하고, 원래 목표인 220mph 도달에는 실패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같은 시기, 세계에서 가장 빨랐던 `386km/h`의 최고속도를 자랑한, `멕라렌 F1`이 등장하면서 XJ220은 수퍼카 시장에서 별 다른 이목을 끌지 못했다.


이와는 별개로, X-타입은 대중차인 몬데오와 플랫폼을 공유하면서, 재규어만의 개성이 흐려진 실패작으로 평가 받았고, S-타입은 초기 시장 반응이 무색하게, 곳곳에서 품질 문제가 터져 나왔다. 그리하여 `1999년 올 해의 상품`으로 선정됐던 차는 불과 몇 년 사이에, 미국에서 가장 미국에서 가장 인기 없는 차 Worts 10에 이름을 올리는 굴욕을 맛 봐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다소 무리한 사업 확장과 함께, 2000년대 후반을 강타한 세계 금융위기에 직격타를 맞은 포드가 경영난에 봉착하면서, `원 포드` 전략 하에, 산하 브랜드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인도의 타타자동차에 랜드로버와 함께 넘어가게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재규어는 애스턴 마틴의 디자이너로 유명한 이안 칼럼의 디자인을 입고, 적극적인 신제품 개발과 브랜드 이미지 강화를 통해, 재기에 성공한 브랜드로 평가 받는다. 현재 재규어가 생산하고 있는 차종으로는 알루미늄 차체를 적용한 최고급 세단, `XJ`를 시작으로, 준대형 세단이자, 재규어를 살린 일등공신 `XF`, 재규어식 GT카의 정수인 `XK`, E-타입을 잇는 스포츠카 `F-타입`, 그리고 X-타입 단종 이후, 6년여 만에 나타난 엔트리급 재규어인 `XE` 등의 모델들을 생산하고 있으며, 그리고 최근 발표한 `F-페이스` 등을 통해, SUV 시장에도 도전장을 내밀려 하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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