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카 제조사 그들만의 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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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카 제조사 그들만의 리그
  • 김상혁
  • 승인 2017.12.21 14: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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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슈퍼카는 남자들의 로망이자 드림카로 불린다. 비싼 가격으로 인해 꿈속에서나 그리는 자동차이면서 풍부하다 못해 차고 넘치는 배기음과 날렵한 몸놀림, 폭발적으로 뻗어나가는 속도에 아드레날린이 반응한다. 보는 것만으로도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게 만드는 슈퍼카를 만드는 제조사들은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다.

이탈리아 슈퍼카의 대표격인 페라리는 많은 이들의 드림카로 꼽힌다. 하지만 올해로 70주년을 맞은 페라리가 이탈리아 내에서는 비교적 짧은 역사를 가진 제조사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많다. 심지어 창업주 엔초 페라리가 알파 로메오 출신이라는 말에 이른 바 ‘차알못(차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 취급을 하기도 한다. 알파 로메오는 1910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설립되어 117년에 달하는 장구한 역사를 가진 제조사다.

​알파 로메오는 설립 이후인 1911년 곧장 자동차 경주에 뛰어들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움츠러들었다가 1920년대 후반부에 진가를 발휘했다. 1928년 밀레 밀리아 우승을 기점으로 1930년대 후반까지 승승장구하며 명성을 쌓아갔다.

알파 로메오가 자동차 경주에서 명성을 쌓아가던 시기에 페라리의 창업자인 엔초 페라리는 모터스포츠 매니저 겸 레이서로 알파 로메오에 몸담고 있었다. 알파 로메오의 레이서로 활약하던 중 엔초 페라리는 자신이 운영하는 레이싱팀을 만들었다. 그 팀이 바로 페라리의 기원으로 알려진 ‘스쿠데리아 페라리’다. 스쿠데리아 페라리는 아마추어 레이서들에게 알파 로메오 차량을 제공해주며 레이스 실력을 갈고닦았던 작은 팀이었다.

하지만 알파 로메오가 스쿠데리아 페라리를 알파 로메오 소속 레이싱팀으로 흡수하려고 하면서 엔초 페라리와 갈등이 생겼다. 결국 알파와의 갈등에 견디다 못한 엔초 페라리가 알파 로메오를 떠나게 된다. 또한 알파 로메오는 엔초 페라리에게 더 이상 자사의 차량을 제공할 수 없으며 향후 4년간 팀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며 고춧가루를 뿌렸다.

1947년 페라리는 오랜 제약을 끝내고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사용했다. 또한 이때부터 페라리는 자동차 경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첫 장을 열었으며 알파 로메오에게는 깊은 한숨을 안겨주었다. 특히 포뮬러 1에서는 두 팀 간의 선두 경쟁이 치열했다. 1951년 페라리 375가 알파 로메오 159를 누르며 우승했을 당시 엔초 페라리는 “기쁘면서 슬프다. 나의 어머니를 죽였기 때문에”라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엔초 페라리가 언급한 어머니는 알파 로메오를 비유한 것이었다. 장고의 시간 끝에 거둔 승리였지만 엔초 페라리의 알파 로메오에 대한 애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엔초 페라리는 다혈질의 성격에 자존심이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엔초 페라리의 성격을 잘 드러낸 일화가 람보르기니 설립 비화다.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본래 자동차를 만들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군대에서 자동차 정비를 배웠다. 제대 후 트랙터를 만들어 팔면서 큰 성공을 거둔 인물이다.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자동차를 좋아했고 관심도 많았다. 특히 페라리의 차량을 좋아해서 페라리 모델을 몇 대씩이나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페라리들이 자주 말썽을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이에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자신의 페라리를 직접 뜯어보며 문제점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클러치 부분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문제가 생기는 부분을 알려주고, 공학자로서 엔초 페라리와 메커니즘에 대한 대화를 나누기 원했다. 그러나 엔초 페라리는 단칼에 거절했다. "트랙터나 만드는 사람이 자동차에 대해서 뭘 알겠느냐"라는 것이 이유였다. 자신감을 넘어선 오만한 태도에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크게 실망하였고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엔초에 대한 실망과 상처는 엔초 페라리에 대한 '도전 의식'으로 승화되었다. 페루치오는 페라리보다 빠르고 강력하며, 기계적으로도 완벽한 차를 만들겠다는 야심을 불태웠다. 그리고 1963년, 자신의 이름을 건 ‘아우토모빌리 람보르기니’를 설립했다. 회사의 이념 첫 번째는 당연히 ‘페라리보다 빨라야 한다.’였다. 1964년 3.5리터 12기통 엔진을 얹은 350GT를 내놓으면서 고성능 자동차를 만드는데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 있음을 증명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이 차는 훌륭한 GT였지만 당시 페라리의 250GTO, 270GTS 등의 정통 스포츠카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페라리를 뛰어넘는다'라는 람보르기니의 목표가 이루어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66년 람보르기니는 후방 미드십 엔진을 채택한 미우라를 선보였다. 후방 미드십 엔진 배치는 경주차에는 사용된 적이 있었지만 양산차에 적용된 것은 처음이었고 이러한 혁신성은 오늘날까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람보르기니 슈퍼카 계보를 이루게 됐다. 이후 뛰어난 밸런스를 보이는 미드십 엔진 방식을 채택한 슈퍼카들이 속속들이​ 출시됐고 페라리도 마찬가지로 208, 308GT 등을 내놓았다. 이에 람보르기니는 “페라리는 우리를 의식하고 심지어 우리를 흉내 내고 있다."라며 호쾌한 한방을 날렸다. 또한 미우라의 후속 모델 쿤타치로 또 한번 견고한 입지를 다지면서 완벽하게 설욕했다.

'꼬리에 꼬리를 문다'는 말은 슈퍼카 제조사들 사이에서도 통용된다. 엔초 페라리는 알파 로메오와의 불화로 인해 페라리를 설립했고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엔초 페라리의 매몰찬 한 마디로 인해 람보르기니를 세웠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파가니의 창업주인 호라치오 파가니가 있다. 그는 본래 람보르기니 소속 엔지니어였다.

파가니의 설립자 호라치오 파가니는 카본 파이퍼 전문가로 람보르기니에서 근무했었다. 하지만 카본 파이퍼의 확대 적용에 대해 람보르기니와 의견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는 자동차를 대하는 람보르기니와 파가니의 생각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결국 호라치오 파가니는 독자 노선을 선택하고 1992년 이탈리아 모데나에 수제 슈퍼카 제조사 ‘파가니’를 설립한다. 마치 엔초 페라리의 알파로메오와 갈등으로 페라리를 설립한 것처럼 말이다.

호라치오 파가니도 상당한 다혈질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런 파가니에게도 동경의 대상이자 우상으로 여기던 인물이 있었다. 그는 바로 아르헨티나 출신의 전설적인 드라이버, 후안 마누엘 판지오다. 호라치오 파가니는 과거에 F3 레이서로 활동했을 정도로 레이스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F1의 전설이자, 같은 아르헨티나 출신이란 점에서 판지오를 좋아했다. 더구나 후안 마누엘 판지오는 호라치오 파가니가 독자노선을 선택했을 때 AMG와 연결해 고성능 엔진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까지 했다. 후안 마누엘 판지오의 도움으로 AMG 고성능 엔진을 얹어 태어난 첫 모델이 바로 ‘존다’다.

존다의 뜻은 아르헨티나 멘도사 지방에서 봄철에 불어오는 바람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하지만 사실 첫 차명은 존다가 아닌 ‘판지오 F1’였다. 호라치오 파가니는 동경심에 더하여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고 또 그를 도와주기까지 한 '살아 있는 전설'에게 자신의 작품을 헌정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바램과는 반대로, 1995년 후안 마누엘 판지오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판지오 F1'은'존다'로 개명됐다. 파가니는 후안 마누엘 판지오와 인연으로 현재까지도 AMG와 좋은 파트너십 관계를 이어가고 있으며 세계에서 손꼽히는 슈퍼카 제조사 반열에 올라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판지오가 알파와 엮여 있었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1951년, 페라리 375가 알파 로메오 159를 누르고 우승하며 엔초 페라리가 감격의 눈물을 흘렸던 그날, 당시 알파 로메오 159를 몰았던 드라이버가 바로 후안 마누엘 판지오였다. 슈퍼카의 세계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드라마틱한 인연들이 얽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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