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쉐 356은 히틀러의 작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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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쉐 356은 히틀러의 작품일까?
  • 이창호
  • 승인 2018.10.31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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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드는 차가 없었다. 그래서 직접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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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박사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가 한 말이다.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는 1875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기술자이다. 포르쉐는 이미 전간기인 1931년부터 자동차 설계 사무소를 설립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1948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한 상점에서 그의 아들 페리 포르쉐(Ferry Porsche)와 2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해 포르쉐 자동차회사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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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3월 히틀러가 페르디난트 포르쉐를 베를린에 불러 국민차 개발 계획을 포르쉐에게 맡긴다. 독일어 그대로 Volks(국민)+(합성어)+wagen(차)로서 국민차라는 뜻을 가진 폭스바겐의 역사도 시작됐다. 당시 독일 엘리트계층 사이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제 타트라 T77 (Tatra T77)이라는 대형세단이 큰인기를 끌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타트라 T97을 보며 페르디난트 포르쉐에게 ‘최소한 이 정도 수준의 자동차’를 만들길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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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쉐는 그 즉시 국민차 프로젝트 폭스바겐의 첫차로 타트라 T97과 유사한 Kdf-Wagen을 개발한다. 페르디난트 포르쉐와 페리 포르쉐가 3년동안 만든 Kdf-wagen은 미국으로도 수출되었다. 미국에선 딱정벌레를 닮은 외형을 보고 ‘비틀(Beetle)’이라는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타트라사는 포르쉐에게 손해 배상을 청구했고 포르쉐는 기꺼이 손해배상에 동의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손해배상건을 대신 해결해 주겠다 하며 소송을 취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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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히틀러는 타트라 본사가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주데텐란트(Sudetenland)지역을 점령해버렸다. 자연스럽게 타트라 T97은 생산이 중단되었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타트라는 소송을 재개해 1965년 폭스바겐에게 보상금 1,000,000 독일 마르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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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에는 페리의 아버지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프랑스 정부에 의해 전범으로 체포되었고 20개월간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당시 아들인 페리 포르쉐는 혼자 회사를 운영해 나갔고 이때부터 스포츠카 설계를 시작했다. 

1948년 당시 오스트리아령이었던 그뮌트(Gmünd)에서 그의 아버지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설계한 폭스바겐 비틀의 차체와 부품을 활용해 만든 스포츠카 포르쉐 356을 개발한다. 최초의 356 프로토타입은 폭스바겐 비틀에 쓰인 1.1리터 4기통 공랭식 수평대향 Type 369엔진을 차체 가운데에 얹었다. 엔진 성능은 35마력 로드스터 프로토타입의 무게는 585kg으로 최대속도는 135km/h를 발휘했다. 

1950년 그의 아버지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돌아온 후 독일 슈투트가르트 돌아온 뒤 인근 로이터 (Reutter) 차체 공장에서 본격적으로 356생산을 시작했다. 당시 차체만 전문으로 만들던 카로체리아 로이터사를 포르쉐는 1963년 인수해버린다. 로이터는 사업의 일부였던 시트 제조공장을 남겨뒀고 그 회사의 이름을 레카로(REACARO)로 바꿨다.

처음부터 포르쉐 356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자동차 경주 매니아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1948년 첫번째 프로토타입을 선보인 후 2년동안 50대의 356을 만들었다. 1950년대 초반 포르쉐 356은 우수한 공기역학성능 핸들링, 괜찮은 품질로 인해 전세계 자동차 매니아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후 1951년 프랑스 르망(LeMans)에서 356이 출전한 클래스 우승 또한 포르쉐 인기에 한몫했다. 그 당시에는 경주용 자동차 주인이 길거리에서 운전하거나 자동차 경주를 직접 나가는게 일반적이었다. 포르쉐는 1954년 경주용 4캠 엔진과 새로운 디자인을 적용한 356을 공개했다. 경주용 차와 일반 도로용 자동차는 1만개가 넘개 주문이 들어왔다. 포르쉐 356은 약 7만 6천대가 팔리며 356의 생산은 1965년 종료된다.

356은 4개의 모델로 출시되는데 기존 356, 356A, 356B, 356C로 나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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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6

1951년 생산된 356은 1.3, 1.5리터 엔진을 도입했다. 1952년 후반 356은 분할된 윈드스크린을 안썼다. 1953년 모델은 1300S 또는 Super라고 불렸다. 1954년 포르쉐의 유일한 미국 수입업체 대표 맥스 호프만(Max hoffman)은 포르쉐 356이 최소한의 장비와 윈드스크린을 없앤 로드스터 버전을 만들기 원했다. 호프만은 자동차 공장을 얻었고 공장에 ‘컨티넨탈(Continental)’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호프만이 수입한 새로운 포르쉐 356은 강력한 1.5리터 엔진을 얹은 70마력의 스포츠 쿠페, 카브리올레 등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미국 포드자동차가 딴지를 걸었다. 당시 포드자동차는 자사의 최고급 승용차 모델인 컨티넨탈을 이미 판매 중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드는 포르쉐에게 356 컨티넨탈이라는 이름의 사용 중지를 요청했다. 그 결과 1956년부터 미국 시장에 수입된 포르쉐 356은 ‘유러피언(European)’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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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6A

1955년 후반 작지만 중요한 변화가 많이 반영된 포르쉐 356A가 소개되었다. 당시 공장에서는 Type1으로 불렀고 자동차 매니아들은 T1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초기 미국에 수출된 수출형 356모델은 컨티넨탈 뱃지가 붙여졌다. 1955년 가을부터 1956년 1월까지 더 희귀한 모델 T1 유로피언으로 들여온후 다시 356으로 들어왔다. 이후 1957년 초 타입2로 알려진 356A의 두번째 개정판이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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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6B

1959년 중요한 스타일링과 기술적인 개선이 이뤄진 356B가 탄생했다. 1962년 중반 356B 모델은  뒷면 엔진룸 트윈 엔진그릴, 외부 연료필터, 오른쪽 앞날개, 펜더, 커진 뒤창문으로 변경되었다. 포르쉐 공장은 모델명이 다른것과 달리 눈에 띄는 디자인 변화를 주는데 신경쓰지 않았다. 356B의 카르만 하드탑(Karmann hardtop)또는 노치백(Notchback)모델은 각각1961년 1962년 생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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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6C

356의 마지막 변경 모델로 1964년 도입되었다. 모든 바퀴에 디스크 브레이크를 장착했고 옵션으로 포르쉐가 생산한 가장 강력한 푸시로드식 OHV 엔진을 달아 95마력을 내는 SC옵션을 선택할 수 있었다. 356의 생산은 1964년 14,151대를 기록했다.

폭스바겐 비틀의 형제차이면서 포르쉐 브랜드 시작점이 된 포르쉐 356은 지금도 자동차 언론인들이 좋아하는 자동차에 손꼽히는 모델이다. 356은 2004년 미국 Sports Car International 잡지에서 선정한 1960년대 최고의 스포츠카 10위를 차지했다. 또한 미국내에서 2만~10만 달러 이상의 가치를 지닌 자동차 수집가들이 소유하고 싶은 자동차로도 알려졌다. 한정 생산된 카레라 스피드스터(Carrera Speedster) 모델의 경우 경매에서 30만달러이상 받을 수 있는 차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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