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했던차]피아트 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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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했던차]피아트 500
  • 박병하
  • 승인 2023.12.21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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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세워진 이탈리아의 피아트(FIAT)는 120년에 가까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자동차 기업으로, 마세라티, 알파로메오, 란치아 등의 브랜드를 거느린 이탈리아 최대의 자동차 제조사이기도 하다. 한 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이렇게 거대한 규모로 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탄탄한 소형차 개발 경험이 뒷받침되어 있는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피아트의 창업주 '지오반니 아녤리(Giovanni Agnelli, 1866~1945)'는 "자동차는 결코 부자들의 전유물이거나 레이스만을 위한 존재가 되어선 안 된다"며, "대중을 위한, 저렴하면서도 우수한 성능을 내는 자동차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의 이러한 신념 하에서 나온 첫번째 대중차가 바로 1908년 등장한 피아트 티포(Tipo)다. 피아트 티포는 자동차를 원하는 대중에 큰 인기를 끌며 피아트의 급속한 성장의 밑바탕이 된다. 대중을 위한 소형차의 개발을 중시하는 피아트의 철학은 지속적으로 유지되며, 피아트가 직면했던 여러 위기들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이번 특별했던차에서는 이탈리아의 국민차이자, 오늘날에는 패션카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한 차, 피아트 500에 대해 알아 본다.

피아트의 명품 소형차 계보를 잇는 모델로 태어나다
이탈리아에서 말하는 피아트 500의 정확한 이름은 누오바 500(Nuova 500), 즉 '새로운 500'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또 다른 500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아트의 역사에서 500이라는 차명이 사용된 사례는 1915년에 프로토타입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500이 존재했고, 그 다음으로는 2도어 세단형 소형 승용차인 '토폴리노(Topolino)'가 있다.

최초의 500이라고 할 수 있는 1915년도의 피아트 500은 미국에서 만들어진 저렴한 대량생산 자동차 '포드 모델 T'의 영향을 받아 개발된 차였다. 피아트는 먼저 생산했던 피아트 제로(Fiat Zero)보다 저욱 저렴한 가격의 자동차를 만들고자 했다. 당시 피아트 제로의 가격은 8,000리라 정도였는데, 이는 당시 이탈리아의 중산층도 접근하기 어려운 가격대였기 때문이다. 차명인 500은 차량에 탑재된 4기통 엔진의 배기량이 500cc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이 차는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전간기에 크게 유행하기 시작한 오토바이의 유행으로 인해 빛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이 500의 컨셉트는 1930년대,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에 의해 부활을 맞았다. 1930년, 이탈리아 국가 파시스트 당의 당수 베니토 무솔리니가 지오반니 아녤리를 불러, "5,000리라 미만의 자동차를 만들어 달라"는 요구를 한 것이다. 지오반니 아녤리는 유능한 엔지니어들과 함께 여러 설계안을 두고 연구개발을 진행하다가 당시 젊은 엔지니어였던 단테 지아코사(Dante Giacosa)에게 프로젝트를 맡겼다. 이렇게 태어난 차가 피아트 500 토폴리노(FIAT 500 Topolino)였다. 1934년 처음 선보인 피아트 500 토폴리노는 당시로서는 비싼 가격이었지만, 경제성장과 자동차를 갈망했던 이탈리아인들의 열정에 힘입어, 실제 독일 국민들에게 단 한 대도 인도되지 않았던 폭스바겐 비틀과 달리, 구매자들에게 원활하게 인도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피아트 토폴리노는 1955년까지 생산이 이어진다.

1950년대, 이탈리아 경제의 급성장기... 경차 시장을 공략하라
1948년, 이른 바 '마셜 플랜(Marshall Plan)'이라고도 불리는 미국의 '유럽 재건 프로그램(European Recovery Program, ERP)'이 발효됨에 따라 서유럽에 엄청난 양의 자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넘어 온 막대한 자금 덕분에 서유럽은 빠른 속도로 재건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금속 및 기타 공산품의 수요가 급증하자, 이탈리아 산업의 성장은 더욱 촉진되었다. 그리고 1957년, 유럽 경제 공동체(EEC)가 창설되면서 더욱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고, 무역도 더욱 활발해지면서 이탈리아의 경제 성장은 더욱 촉진되었다. 그리고 마셜 플랜이 종료된 1951년부터 1963년까지 이탈리아의 경제는 연 평균 5.8%에 달하는 성장을 이룩하며 '이탈리아 경제의 기적(Miracolo economico italiano)'이라는 호황기를 맞았다.

이렇게 제조업을 중심으로 경제가 성장하면서 이탈리아는 사회적으로도 큰 변화가 일어난다. 빠른 경제성장으로 인해 농업이 중심이 되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제조업이 중심이 되는 이탈리아의 북부의 제노아(Genoa), 밀라노(Milano), 그리고 토리노(Torino)로 대표되는 북부의 공업삼각지대로 인구가 몰리기 시작한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1955년부터 1971년까지 약 900만 명의 인구가 남부에서 북부로 이동했으며, 이 때문에 이탈리아 북부는 새로운 운송 수요가 발생했다. 이번 기사의 주인공인 피아트 500은 이러한 배경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다.

피아트는 1950년대 들어, 토폴리노의 노후화를 절감하고, 이를 계승할 후계차종의 개발에 나섰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피아트의 경영을 맡게 된 비토리오 발레타(Vittorio Giuseppe Valletta, 1883~1967)는 토폴리노의 개발을 진두지휘했던 단테 지아코사에게 두 가지의 신차 개발을 맡기게 된다. 단테 지아코사는 당시 폭스바겐 비틀과 르노 4CV 등에서 채용한 후방엔진 후륜구동 방식에 주목하고, 이미 상용화된 요소들을 적절히 조합하는 방식으로 차량을 개발했는데,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차가 바로 600, 그리고 '누오바 500'이다.

하지만 누오바 500의 개발은 600에 비해 더디게 진행되었다. 피아트의 경영진이 조금 더 큰 체급을 가진 600의 시판을 더 우선했기 때문이다. 피아트 600은 후방엔진 후륜구동 승용차로 과거부터 견지해 왔던 단순한 구조와 준수한 실용성, 합리적인 가격으로 1955년 출시되자마자 이탈리아의 중산층을 중심으로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이탈리아 노동자 계층에게 자동차를 구입한다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그 때문에 많은 수의 노동자들은 오토바이, 혹은 오토바이에 얄팍한 껍질을 씌운 것에 불과한 버블카(Bubble Car)에 몸을 싣고 있었다. 

피아트는 600이 성공적으로 시장에 진입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던 새로운 500, 누오바 500의 개발을 서둘렀다. 단테 지아코사는 1953년 600을 개발하고 있었던 당시 채용한 후방엔진/후륜구동 방식의 경차(마이크로카)의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엔진은 4행정 가솔린 직렬 2기통 엔진을 사용하기로 했다. 최초 개발 당시에는 수평대향 엔진을 사용하려고 하였으나, 진동 문제와 더불어 비용상승 문제로 폐기되었다. 그리고 엔진의 진동을 어떻게든 흡수해내기 위해 캔틸레버식 엔진 마운트에 별도의 작은 스프링 서스펜션을 설치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이 뿐만 아니라 기존 대비 더욱 단순한 엔진 구조를 적용하고, 크랭크샤프트를 비롯한 부품들을 저렴하면서도 강도가 높은 주철로 제작해 비용을 절감했다. 누오바 500의 2기통 엔진은 공랭식이며, 479cc 의 배기량으로 13마력을 낼 수 있었다.

1957년, 이탈리아의 국민차가 탄생하다
이렇게 1957년 7월 4일, 피아트의 새로운 500이 완성되어 이탈리아에서 대중에 공개되었다. 피아트 누오바 500은 당시 피아트에서 가장 저렴한 49만 리라의 가격으로 출시되었는데, 이는 당시 이탈리아 노동자 연봉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었다. 1955년 피아트 600의 출시 당시 정가가 59만 리라였으니, 10만 리라 정도 더 낮은 가격으로 출시한 것이다.

하지만 피아트의 기대와는 달리, 누오바 500은 출시 초기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지는 못했다. 이미 자동차를 살 만한 소비자들은 2인승에 불과한 누오바 500보다는 4인승 좌석과 더 넓은 내부 공간을 갖춘 600쪽에 더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수많은 자동차와 오토바이에 사용되면서 이탈리아인들에게 익숙해진 크롬 장식들을 원가절감을 이유로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극초기형의 누오바 500은 윗급 차종인 600에 비해 지나치게 저렴해보인다는 평가가 있었으며, 600과의 가격 차이도 체감 상으로 그렇게 크지 않아, 메리트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외에 도어의 개폐 방식도 진행방향으로 열리는 수어사이드 도어(Suicide Door)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도 문제시되었다.

이에 피아트는 누오바 500의 대대적인 상품성 개선 작업에 들어갔다. 먼저 엔진은 밸브 타이밍을 수정하고 카뷰레터를 교체해 15마력으로 출력을 높이는 한 편, 엔진의 회전 질감을 개선해 저회전 아이들링시의 진동과 고회전에서의 소음을 줄였다. 그리고 차체 곳곳에 크롬 장식을 적용하고 크롬 및 알루미늄 휠 커버 등을 새로 적용해 화려함을 더했다. 여기에 시트 또한 후방에 패딩 처리한 시트를 설치해 4인승 좌석으로 구성했다. 여기에 윈드 디플렉터 장치 등, 운행 시 불편함을 덜어줄 수 있는 장비들을 추가했다.

이렇게 대대적인 개수를 거친 피아트 누오바 500은 같은 해 10월에 개최된 토리노 모터쇼에서 공개되었다. 토리노 모터쇼에서 공개된 누오바 500은 '노르말레(Normale)'라는 트림명이 따로 붙었고, 먼저 공개한 극초기형 누오바 500의 상위에 위치한 모델이었지만 가격은 초기형과 동일한 49만 리라로 설정했다. 여기에 극한의 원가절감 버전에 해당하는 초기형은 '에코노미카(Economica)'라는 트림명을 붙인 저가형 차종으로 재편되었는데, 가격은 46만 5,000 리라로 가격을 크게 낮췄다. 또한 기존에 이미 초기형 모델을 구입한 고객에게는 25,000리라의 차액을 받거나 차량을 무료로 업그레이드 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했다고 한다. 이렇게 상품성을 대대적으로 보강한 피아트 누오바 500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주문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58년, 피아트는 누오바 500에 더욱 강력한 엔진과 금속제 루프를 갖춘 누오바 500 스포트(Nuova 500 Sport)를 출시했다. 누오바 500 스포트는 배기량을 499cc로 늘여 21.5마력의 최고출력을 냈으며, 최고속도 105km/h의 성능을 냈다. 이듬해인 1959년에는 캔버스탑과 선루프를 혼합한 버전도 추가되었다. 

피아트 누오바 500은 미국 시장으로 수출되기도 했다. 1957년 12월부터 수출되기 시작한 미국 시장용 누오바 500은 500 아메리카(500 America)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당시 미국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조그마한 크기와 독특한 소음을 내던 2기통 엔진으로 인해 미국 대중들이 꽤나 관심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큰 차를 선호하는 미국 시장에서는 그리 오랫동안 판매되지 못했고, 1961년도부터 수출이 중단된다.

누오바 500의 생산이 본 궤도에 오르고 인기를 얻은 1960년, 피아트는 기존 누오바 500 라인업을 일거에 대체하는 새로운 버전인 500D를 출시한다. 피아트 500D부터는 누오바 500의 전체 캔버스탑이 사라진 대신, 선루프 버전만 만들어졌다. 엔진은 누오바 500 스포트에 사용된 21.5마력 엔진을 디튠하여 17.5마력을 내는 엔진으로 전면 교체했고, 접이식 등받이가 적용된, 제대로 된 뒷좌석을 갖추게 되었다.

이 뿐만 아니라 다양한 파생모델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스테이션 왜건의 형태를 띈 500 지아르디니에라(Giardiniera)와 상용차 버전인 코메르치알레(Commerciale)다. 이 두 차종의 공통점은 기존 피아트 500의 휠베이스를 크게 늘린 형태를 띄고 있으면서도, 테일게이트를 설치한 것이다. 그런데 피아트 500과 같은 후방엔진-후륜구동 레이아웃은 구조적으로 테일게이트를 구현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단테 지아코사는 실린더가 바닥과 완전히 평행을 이루도록 누워있는 기막한 엔진 배치를 실현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피아트 500D는 1960년대, 일반적인 자가용 승용차 수요는 물론, 패밀리카 수요, 심지어 경상용차 수요까지 대응하며 성공을 이어갔다.

또 한 번의 진화
그리고 1965년, 역사 상 가장 많이 판매된 피아트 500이라고 할 수 있는 피아트 500 F가 등장했다. 피아트 500F는 드디어 도어 힌지가 뒤쪽에서 앞쪽으로 옮겨가게 되어, 일반적인 컨벤셔널 도어가 적용되었다. 이는 이탈리아의 고속도로법이 개정된 것에 따른 것이었다. 개정된 고속도로법에서는 향후 생산하는 모든 자동차의 도어 힌지를 앞쪽에 설치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단, 지아르디니에라 모델은 기존과 같은 수어사이드 도어가 계속 적용되었는데, 이는 새로운 규제 적용 대상에서 상용차는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때를 기점으로 피아트 500에는 기존에 금속이었던 부품들 중 상당수가 플라스틱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도어 힌지 구조의 변경으로 인해 차체 구조도 상당히 많이 변화하여, 사실 상 0.5세대급에 준하는 변화를 겪었다고 한다. 전면 윈드스크린은 기존 대비 더욱 확대되어 시야가 개선되었고, 루프는 필러와 일체형으로 성형되어 볼트로 고정되었던 기존 대비 구조강도가 높아졌다. 원형인 500D에서 변경되지 않은 부분이라고는 보닛과 전면부 일부분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때부터 뉴질랜드에서도 피아트 500의 생산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968년, 피아트는 피아트 500에 고급화까지 시도하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차가 피아트 500L이다. 피아트 500L은 범퍼 바에 추가적인 크롬 가드를 덧대는 한 편, 직선형의 새로워진 피아트 배지와 크롬 도금 휠캡, 루프의 빗물받이 선을 따르는 크롬 몰딩 등으로 한층 화려하게 꾸몄다. 인테리어 역시 새로운 스트라이프 디자인이 적용된 고급 직물 소재와 가죽 시크를 적용해 더욱 화려하게 꾸며졌다. 이렇게 고급화된 경차인 피아트 500L의 가격은 1968년 당시 기준으로 52만 5,000리라였으며, 1972년까지 생산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1972년, 최후의 오리지널 피아트 500이라고 할 수 있는 '피아트 500 R'이 토리노 모터쇼에서 공개되었다. 피아트 500R의 'R'은 이탈리아어로 'Rinnovata' 즉 '리노베이션'을 의미하며, 같은 해 출시된 피아트 126과 함께 공개되었다. 엔진은 126에 사용된 것과 동일한 594cc의 2기통 엔진을 탑재했다. 단, 최고출력은 126에 탑재된 사양보다 디튠된 18마력이지만 토크는 더 높다고 한다. 기존의 하단 도어 실링 크롬 몰딩이 제거되고 한층 현대화된 편의사양, 그리고 플라스틱을 대량으로 적용한 실내 장식이 특징이다. 이렇게 첫 출시후 20의 세월 동안 이탈리아의 사랑을 받은 국민차 피아트 500은 해치백 모델이 1975년, 지아르디니에라 모델이 1977년을 끝으로 단종을 맞게 되었다.

400만대 이상이 생산된 베스트셀러
피아트 500은 원제조사인 피아트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내 다른 자동차 제조사, 심지어 국외에서도 상당한 양이 생산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슈타이어-다이믈러-푸흐(現 마그나 슈타이어)에서 57,871대가 생산되었고, 1959년부터 피아트의 독일 자회사인 피아트 네카르(FIAT Neckar)에 의해 6천여대가 독일에서 생산되었다. 이 뿐만 아니라 아우토비앙키(Autobianchi)에서 30만대가 넘는 500 지아르디니에라 모델들이 생산되었다. 이렇게 생산된 피아트 500의 대수는 425만대 이상에 달한다.

원조 '총알 경차', 아바스 695 SS
피아트 500은 수많은 모델들이 만들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조그마한 크기에 강렬한 매운맛으로 무장한 '포켓 로켓'도 존재한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오늘날까지 피아트의 인하우스 튜너로 활약하고 있는 아바스(Abarth)의 튜닝 버전, '아바스 695 SS(Esseesse)'가 있다. 1964년도부터 1966년까지 생산된 아바스 695SS는 기본형 모델 대비 크게 확대된 휠 아치와 더욱 커진 타이어, 그리고 일반 버전에 비해 2배에 달하는 38마력의 엔진으로 무장했다. 또한 강력해진 엔진의 냉각을 위해 후방의 엔진 덮개를 열고서 주행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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